캐네디언 로키인 밴프에 도착했다. 10월 초 로키산은 꽤 쌀쌀했다. 여기저기 돌아다니다 저녁이 되면 숙소로 돌아와 뜨끈한 음식이 제일 먼저 당겼다. 하지만 밴쿠버에서 휘슬러를 거쳐 온 이곳은 캐나다의 세 번째 도시였다. 이 말인 즉 여행의 초반이기에 한국에서 가져온 라면은 최대한 아껴두어야 한다.
그날 저녁 따뜻한 밥과 달걀 프라이를 얹어 고추장에 비벼 막 식사를 시작하려는데 등산복 차림의 한국 할아버지께서 내 앞을 오시더니 멸치 두 마리와 구운 땅콩 한 줌을 접시에 놓고 가셨다.
"많이 주고 싶은데 많이 없어서... 맛있게 들어요."
그리고는 다른 테이블의 한국인에게도 똑같이 멸치 두 마리에 땅콩 한 줌을 내어 주셨다.
"감사합니다."
이건 한국인 여행자의 정이었다.
그날 나와 같은 방을 쓰는 일본인 미쯔코는 잘 구워진 연어에 레몬즙을 뿌리며 물었다.
"네가 먹는 그 빨간 소스는 뭐야? 기무치는 아닌 것 같은데?"
"고추장이야. 조금 매운데 한번 맛볼래?"
나는 미쯔코에게 저녁 재산의 한 스푼을 덜어주었다. 그녀는 구운연어를 고추장에 찍어먹더니 너무 맛있다며 그녀의 재산 절반인 연어를 떼어주었다. 우리는 내일 레이크루이스를 같이 가자고 약속을 하며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었다.
이것은 일본인 여행자의 정이었다.
그때 우리 옆 테이블에 있던 옅은 갈색눈의 서양 아저씨가 다가왔다.
"나는 이탈리아에서 온 셰프입니다. 내일 저녁은 제가 이 유스호텔에 있는 여러분들에 이탈리언 정통파스타를 선물하고 싶습니다. 당신들도 함께 해 줄 수 있나요?"
우리 주변에서 함께 듣던 배낭족들이 테이블, 접시, 머그 등을 두들겨대며 환호했다.
다음날 미쯔코와 나는 레이크 루이스에서 따뜻한 차와 고급진 쿠키 하나만 먹었다.
"오늘 저녁 이탈리안 파스타! 정말 좋아!"
우리는 그곳에서 만나는 다른 숙소의 배낭족들에게도 자랑을 했다.
"오늘밤 우리 숙소에서 이탈리안 셰프가 전통파스타를 해준대. 그래서 우리는 지금부터 굶고 있는 거야.
완전기대대. "
레이크루이스투어 버스에 내린 우리는 다른 집에서 나는 음식냄새가 마치 우리 숙소에서 나는 것처럼 환상의 냄새길을 만들어 따라갔다. 아니나 다를까 우리 숙소에는 더 맛있는 냄새가 났다. 올리브유에 볶은 양파냄새가 진동을 하면서 우리를 더 설레게 만들었다. 드디어 셰프가 와인잔에 포크를 두드리며 시작을 알렸다.
"이탈리언 파스타 타임!!"
모두 소리를 지르며 앞다투어 줄을 섰다. 우리는 조금 소심하게 멀치감치 떨어져 줄을 섰다. 하지만 인생에 있어 줄이 얼마나 중요했던가? 그건 장소불문 어디에서나 통했다. 우리 앞에 있던 서양인들은 큰 접시를 들고 와 김이 모락모락 나는 파스타를 뜸북뜸북 덜어갔다. 저대로 계속 가면 나중에 남은 파스타가 없을 것 같아 초조해졌다. 하지만 세계경제대국의 2위인 일본에서 온 미쯔코 앞에서 없어 보이고 싶지 않아 애써 초조함을 감추며 말했다.
"우리도 많이 먹자. 점심부터 굶었잖아!"
우리 차례였다. 얼마 남지 않은 파스타를 반으로 나눠 미쯔코에게 덜어주고 내 접시에 담았다. 옆에서 지켜보던 셰프가 안타까운 듯 말했다.
"너희가 너무 늦게 와서 남은 게 이것밖에 없어.
"괜찮아!"
"혹시 너희들 다음 여행지는 어디니?""
"나는 리자이나이고 얘는 퀘벡이야."
"그래? 잘하면 토론토에서 또 만날 수 있겠다. 그럼 그때 내가 또 해 줄게."
정이 넘치고 폭발할 지경의 서양인이었다. 기대에 찬 우리는 다른 이들처럼 후추를 뿌리고 포크로 걸쭉한 크림파스타 뱅그르르 돌려 한입 가득 입안에 넣었다.
느끼했다. 씹으면 씹을수록 크림의 느끼함이 무겁게 식도를 타고 내려갔다.
이번에는 크림이 약간 덜 묻은 쪽의 면을 들어 입안에 넣었다.
맛을 느끼기가 싫었다. 마치 마요네즈 한 주걱이 내 입안 가득 들어찬 느낌이었다.
테이블마다 돌아다니며 반응을 살피는 오지라퍼 셰프가 우리를 잊지 않고 찾아왔다.
"맛있어?"
"그럼! 정말 맛있어!"
"그런데 양이 적어서 어떻게 해?"
"괜찮아! 토론토에서 또 만나면 되잖아!"
나는 혹여나 남은 파스타가 더 있을까 봐 겁이 났다. 그리고 얼른 그 자리를 뜨고 싶었다. 그가 보고 있는데 깨짝깨짝 거릴 수 없어 한방에 남은 파스타를 때려 넣었다. 입안 가득 우그적우그적 씹으며 그에게 미소 한번 날리고 들고 있던 스푼을 가지고 그대로 방으로 향했다. 방에 도착하자마자 얼른 배낭을 열어 고추장을 꺼내 한 스푼 퍼서 입안에 넣었다.
살 것 같았다.
그리고는 바로 냉장고로 가 콜라를 따서 한 모금 마시니 마침 주변이 보이면서 여유가 생겼다. 콜라를 홀짝홀짝 마시며 주변을 살펴보니 미쯔코는 머그잔에서 뭔가를 타고 있었다.
그녀의 곁으로 가 슬쩍 물었다.
"그건 뭐야?"
수줍음 민망함이 더 해진 미쯔코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미소수프"
난 그녀 면전에다 콜라를 뿜을뻔했다. 그녀도 느끼함을 견디지 못하고 결국 일본된장국을 마시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서로 피식 웃으며 그리고 홀짝홀짝 거리며 주변을 여유 있게 지켜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