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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광천선생 Jul 16. 2020

전골(煎骨)은 군대 문화의 산물?

한국어의 말뿌리 찾기 (2)

버섯전골 ©Korea.net(출처:flickr.com)


  찌개와 비슷한 음식에 전골(煎骨)이 있다. 역시 국물 요리다. 더운 여름보다는 날씨가 추워지는 겨울철에 생각나는 음식인데, 뜨거운 국물과 함께 먹을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불고기, 낙지, 버섯, 김치, 만두, 곱창, 해물 등등 전골로 먹지 못하는 재료가 없을 정도이다.

  끓여서 먹는다는 점에서 찌개와 전골은 큰 차이가 없어 보인다. 그러나 찌개는 국물을 붓고 미리 끓인 것(옛말로는 '조치'라고 함)을 먹고, 전골은 끓이면서 먹는다는 점이 다르다. 또한, 찌개는 한 가지 주재료를 끓이는 데 반해, 전골은 여러 가지 재료를 함께 끓인다는 점이 또 다른 점이다.


  이 전골(煎骨)의 기원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알 수 없다. 그래서 '전골'이라는 말의 어원도 알기가 쉽지 않다. 여기에서는 여러 가지 주장들을 살펴보면서 이 말의 말뿌리를 찾아가 보려고 한다.

  「是日也放聲大哭(시일야방성대곡)」으로 유명한 구한말의 대학자 위암 장지연(韋菴 張志淵, 1864∼1921)이 쓴 『萬國事物紀原歷史(만국사물기원역사)』(1909.3)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전골은 언제 기원한 것인지 알 수 없다. 그렇지만 옛날 군중에서 군사가 머리에 쓰고 있던 전립(氈笠) 철관(鐵冠)을 이용하여 고기를 삶아 먹었던 까닭에, 후세에 전립 모양의 솥을 만들어서 채소는 속에 넣고 고기는 가장자리에 놓고서 익혀서 먹는 것을 “전골”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어떤 이는 토정(土亭) 이지함(李之菡)이 철관(鐵冠)에다 고기를 익혀 먹던 데서 그 방법이 비롯했다고도 한다. 대개 토정은 늘 철관을 쓰고 세상을 돌아다녔는데, 고기를 구하면 솥 대신 자신의 철관을 이용하여 익혀 먹었고, 고기를 다 익히고 나면 다시 철관을 머리에 썼다. 그런 까닭에 이지함은 “철관자(鐵冠子)”라는 이름으로도 일컬어졌다.
(장지연 지음, 황재문 옮김 2014:373, 한겨레출판)


  이에 따르면, 전골은 진중(陣中) 음식, 즉 군인들의 요리법에서 유래한 음식이라고 할 수 있다(그래서 전골이 몽골의 징기스칸 시절에서 유래한 것이니 하는 등의 설들이 난무한다). 진중에서 쓰는 전립을 엎어놓고 삶아 먹었다는 것은 근거를 찾기 어려운 설명이다.

  이와 관련하여 이학규(李學逵, 1770~1835)의 『洛下生集(낙하생집)』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鐵笠些兒炙。俗以鐵造氈笠㨾。謂之氈笠套。每飯。煎珍臠嘉蔬。以佐飯。瓷匙骨董羹。
(철립사아적,  속이철조전립양,    위지전립투,     매반,   전진련가소,    이좌반,    자시골동갱)
(이학규, 낙하생집)


  이것을 번역해 보면, "철립 위에 고기 몆 점 굽고, 자기(瓷器) 수저로 고깃국물을 떠먹네." 정도로 할 수 있겠다. 주석으로 달려 있는 부분은 "민간에서는 쇠로 전립 모양의 그릇을 만들어 이를 '전립투'라고 하였다. 밥을 먹을 때마다 잘게 저민 고기와 맛좋은 채소를 끓여서 반찬으로 먹는다."로 해석되는데, 철립(鐵笠)이 곧 철관(鐵冠)이고 이것이 전립(戰笠, 氈笠)일 것이다. 이런 전립을 닮은 그릇을 '전립투'라고 한다는 것이고, 이것을 한국어로는 '벙거짓골'이라고 하였다. 그러니까 그릇이 전립을 닮아서[套: 덮개, 모양, 방식] 이런 이름이 붙여진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그러면, '전골(煎骨)'이라는 이름은 어떻게 생겨났을까?

  조선 정조 때의 실학자 유득공(柳得恭, 1749~1807)의 『京都雜志(경도잡지)』에는 노구솥이 '전립투'라는 이름으로 불린다는 사실을 지적하며 전립의 모양과 비슷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있다(鍋 名氈笠套取其形似也 과명전립투취기형사야). 그러면서 움푹한 곳에 물을 넣고 채소를 데치며, 그 둘레에 고기를 얹어 굽는데 안주를 만들거나 밥을 짓기에 다 좋다고 하였다(瀹蔬於中燒肉於沿 案酒下飯俱美 약소어중소육어연 안주하반구미).

  또한, 조선 후기의 실학자 이규경(李圭景, 1788~?)은 『五洲衍文長箋散稿(오주연문장전산고)』에서 "鍋曰煎骨(과왈전골, 노구솥(놋쇠나 구리쇠로 만든 작은 솥. 자유롭게 옮겨 따로 걸고 쓸 수 있다)을 전골이라 한다)"고 하였고, 조선 순조 때 간행된 조재삼(趙在三)의 『松南雜識(송남잡지)』에서는 이것을 '전립골(氈笠骨)'이라 하였다.

성협(成夾) 풍속화첩, 야연(野宴)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그림에 보면, 사람들이 난로에 둘러앉아 고기를 구워먹고 있는데 난로 위에 있는 것이 바로 전립투(전립골)이다. 가장자리 넓은 곳에는 고기를 굽고, 가운데 오목한 곳에는 장국을 끓이면서 각종 채소 등을 더해 뜨거운 국물을 즐기는 그런 방식이다. 고기의 기름이 흘러들어가면 얼마나 그 맛이 더해질까.

  조선 시대에는 이런 유형의 모임을 난회(煖會), 난로회(煖爐會)라고 하였다.


  이러한 기록을 종합해 보면, 애초에 전골은 음식 이름이 아니라 고기를 굽고, 채소를 볶는 그릇이었음을 알게 된다. 즉, '전립투 = 전립골 = 전골 = 벙거짓골'의 등식을 발견하게 되니 말이다. 이 말의 어원은 어떤가?


1) 전립(氈立) + 투(套) = 전립(氈立) + 골(骨) = 벙거지 + ㅅ + 골

  이와 같은 대응의 구조 속에서 우리는 '전립 = 벙거지', '투(套) = 골'의 대응 관계를 확인하게 된다. 그릇이 '전립(氈立)의 모양(套)'이라서 '전립투'라고 하였고, 이것이 '전립골'과 같은 의미라는 것이다. 또 이것은 한국의 고유어로 '벙거짓골'과도 같다. 처음에는 그릇의 모양에서 음식 이름이 비롯되었으나 나중에는 이러한 어원 의식이 사라지면서 <끓이다>라는 뜻의 '煎'이 채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氈 → 煎'의 변화가 보이는 것이다.


2) 套 = 骨

  이 대응에서는 기존의 '骨'에 대한 해석이 의심을 받게 된다. 몇몇 어원 해석에서는 '骨'을 그릇의 의미로 해석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한국어 어휘에서 '골'이 그릇의 의미를 갖는 것을 확인할 수 없다. '骨'이 <뼈>의 의미로서 '골격'을 뜻하니까 아마 <틀>의 의미 정도로 해석해서 '전골틀'이라는 말도 생겨난 것이 아닌가 추정해 본다. 이렇게 본다면 '전골'은 끓이는 그릇이라는 어원적 의미가 음식 자체를 가리키는 어휘로 변화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필자는 그렇게 보지 않는다. 여기에서 '골'은 현대 한국어 '꼴'과 같은 것으로 보고자 한다. <겉으로 보이는 사물의 모양>(예: 내 꼴이 우습다, 세모꼴)의 의미를 갖는 '꼴'의 중세 어형은 '골'이었다. 그러므로 '전립투 = 전립꼴'처럼 해석하는 것이 전혀 엉뚱한 발상은 아닐 것이다.


  결론적으로, 전골은 '전립의 모양을 한 조리용 그릇'의 의미를 갖던 말이 '끓여서 먹는 음식'의 이름으로 전이한 것으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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