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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멜랜Jina Jul 20. 2024

당신, 한국 사람 맞아?

아주 가끔이지만 지금처럼 직접 담근 김치를 먹고 싶을 때가 있다.


그런 시점이면 꼭 떠오르는 장면 하나가 있는데 바로 월마트의 진열대다. 처음 미국에 도착하고 달러를 아껴야 했기에 월마트에서 $1짜리 컵을 들고 살까 말까를 고민하며 진열대를 서성이던 바로 그때가 떠오른다. 아이가 어리니 미국의 대표 음식인 피자나 햄버거는 비싼 돈을 주고라도 사 먹여야 했지만 매운 김치는 어른의 입맛이라 되도록 사 먹지 않고 담가 먹어야 돈을 절약할 수 있었다. 누구에게 물어볼 사람도 없고 인터넷도 없는 시절이니 그저 내 식으로 김치를 담았다. 아마 몇 번 시도했으나 맛과는 거리가 멀어서였는지 곧 그만두었지 싶다. 비싸지만 마트에서 조금씩 사 먹다가, 아는 분에게 부탁도 했다가 그럭저럭 한국의 김치와 함께 20년 세월이 훌쩍 흘렀다.


드디어 세 아이 30년 양육이 끝나고 막내를 대학에 보내는 나 스스로에게 칭찬을 해줄 만한 일이 일어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았고 아이들이 방학이라 한국에 여행을 간 관계로 한꺼번에 주어진 자유시간을 어찌 써야 할지 막막해지기 시작했다. 이런 시간이 오리라 짐작했고 아주 착실히 혼자만의 시간을 즐길 거리를 꽤 준비를 잘하고 있었고 '잘했다' 생각하고 있었는데도 막상 처음으로 갖는 중년 아줌마의 홀로서기는 쉬운 일이 아니었나 보다. 24시간 중 6시간을 제외한 시간이 점점 무료해지는 시간이 조금은 무서워지기 시작할 때쯤이다. 딱 지금이...


정확히 6시간의 근무를 마치고 집에 들어가려니 뭔가 허전함을 느꼈다. 퇴근길에 곧장 마트로 갔다. 아직도 혼밥은 익숙지 않고 그렇다고 집에 가서 대충 라면으로 때우기를 며칠 해보니 그것도 못 할 짓이고 간편식이라도 사 볼 요령이었다. 냉동식품보다는 한 끼 식사 대용으로 끓여 먹을 수 있는 게 있으면 좋겠다 싶었다. 김밥처럼 너무 인간적이지 않은 무의미한 맛도 싫고 그렇다고 아이들에게도 주의 주는 인스턴트도 아닌 나름 고상하면서도 몸에는 좋은 건강식이 없나 두리번거리며 무언가를 찾고 있었다.


그러다 배추가 보였다.


한국은 당연하겠지만 미국에도 김치 냉장고가 선풍적인 인기를 끌면서 우리 집에도 떡하니 자리를 잡은 지 오래다. 물론 김치 냉장고의 기능은 많은 양의 김치를 담가 숙성시키고 오랫동안 그 맛을 유지시켜 항상 맛난 김치를 먹는다는 취지였겠지만 우리 집 김치 냉장고는 한 곳은 채소저장고로 다른 한 곳은 냉동기능으로 쓰고 있다. 그저 보관 창고로 전락한 김치 냉장고의 기능을 순간 되살려보자는 취지였는지도 모르겠다.


암튼 한 번만 고생하면 아주 오랫동안 건강한 음식을 걱정 없이 먹을 수 있고 그것도 내 손으로 만들 수 있는 것을 발견해 낸 내가 대견하기까지 했다. 성격대로 큰 걱정 없이 배추 한 박스를 떡하니 카트에 실었다. 그리고는 추가적인 것들을 생각나는 대로 담기 시작했다. 고춧가루, 굵은소금, 새우젓, 무, 양파 그리고 파까지.. 어릴 적 친정엄마가 하시던 모습을 어깨너머로 보았던 그런 것들을 떠올리며 두서없이 담았고 집까지 무사 귀환시켰다. 한 박스가 얼마나 무거운지 질질 주방 바닥에 끌고 열어보니 커다란 배추가 열두 포기나 들어있었다. 웬만한 김장 수준의 배추 개수를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일단 절여야 하니 소금물을 풀고 살짝 배추를 흔들어가며 물을 묻히고 켜켜이 굵은소금을 뿌렸다. 인터넷을 찾아보니 10시간에서 12시간을 절였다가 살짝 구부려보고 두꺼운 부분이 구부려지면 다 되었다는 팁을 보고 확인해 보니 너무 구부려지나 싶게 반으로 접혔다. 조금 걱정이 되었지만 이제 와서 어쩌랴. 두어 번 흔들어 씻으며 소금물을 빼고 물기를 뺐다. 이때 물기를 잘 빼지 않으면 다 담고 나서 물이 많이 생길 수 있다길래 하나씩 페이퍼 타올로 남은 불기를 빼는 일도 놓치지 않았다.


그전에 밀가루 풀을 쑤어야 했다.


말이 밀가루 풀이지 여기에서 난관에 부딪쳤다. 얼마만큼 쑤어야 하는지 어느 정도의 농도로 물을 넣고 밀가루를 넣어야 하는지 도무지 감이 오지 않았다. 제일 큰 냄비에 물을 가득 넣고 밀가루를 두 스푼 넣었지만,  너무 묽어서 한 스푼씩 넣다 보니 너무 돼졌다. 또 어쩌랴.. 푹푹 소리가 나도록 끊이다가 식혀놓았다. 그사이 무채를 썰고 양파와 파를 썰고 커다란 양푼에 고춧가루 두 팩을 넣고 밀가루 풀을 부었고 무와 양파 그리고 파를 넣고 양념을 시작했다.


먼저 새우젓을 넣고 빻아놓은 마늘, 설탕, 그리고 약간의 다시다를 넣었다. 팔이 아프도록 섞고 또 섞어 드디어 되직한 김치 양념이 완성되었다. 그런데 살짝 이상한 건 너무 걸쭉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밀가루 풀이 진해서인가? 아니면 고춧가루가 너무 많이 들어간 걸까? 모르겠다며 맛을 보는데 그런대로 맛은 있는 거 같다.


절인 배추를 양념이 든 양푼 한쪽에 쌓아놓고 한 개씩 양념을 묻히기 시작했다. 이것이 바로 포기김치를 담그는 것인데 왜 이리 되직해서 죽처럼 축축 늘어지는 건지 잘 모르겠다. 몇 포기를 해서 김치통에 담기기 시작하는데도 아삭한 느낌은 전혀 없고 꼭 고추장에 푹 절여진 짠지 같은 느낌이 왜 나는 건지 도무지 알 길이 없었다. 하지만 맛만 있으면 거기서 거기겠지 하는 마음과 옛 어른들이 하시는 말이 김치는 아무리 맛이 없어도 김치찌개라도 해 먹으면 되니까 무조건 김치는 있어야 한다는 말만 굳게 믿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드디어 열두 포기 그러니까 48조각을 다 했다.


가득 찬 딤채 김치 2통과 작은 통 하나를 쌓아놓고 있자니 얼마나 흐뭇한지.. 솔직히 맛은 보장 못 하지만 이 많은 김치를 내 손으로 직접 했다는 생각에 그저 감동적이었고 몇 달은 딤채에 놓고 있으면서 마음껏 아이들에게 '이것이 바로 엄마의 김치란다'하며 한껏 어깨를 올리는 모습을 상상해 보니 그리 좋을 수가 없었다.


미국에 살면 한국에 사는 사람들은 의례 김치는 못 먹겠거니 하거나, 잘하면 마트에서 사 먹을 수 있으려나 하는 염려를 하시지만, 마음만 먹으면 김치를 담가 먹을 수 있고 많은 분이 그렇게 하며 살고 있다. 물론 한국처럼 여건이 훌륭하진 않다. 이미 깔끔하게 절여놓은 배추도 없고 따로 양념만 섞어 놓은 것도 없으니 모든 걸 손수 움직여 김치를 담가야 한다. 한국처럼 재료가 싸지도 않고 품질이 좋지도 않고 젓갈이 내 입맛대로 다양하게 구비되어 있지도 않다. 개개인의 취향이 아닌 마트의 유통에 달려있어 최소의 구매와 오로지 최고의 손맛으로 김치를 담가야 하는 최고 난이도의 어려움이 있다. 특히 나처럼 음식솜씨가 없는 사람에게는 더욱 고역인 것이 사실이다.


암튼 이틀에 걸친 김치 담그기에 성공을 했다. 문제는 그다음에 발생했다. 사고도 대형사고다. 한 이틀 정도 숙성을 시키고 더 이상은 참지 못하고 드디어 식탁에 김치를 내놓으려 했는데 어라? 김치가 정말 고추장에 푹 절여놓은 것처럼 죽이 되었다. 도무지 김치다운 형태가 아니다. 어찌 보면 몇 년 묵힌 묵은지 같은 느낌도 있고 맛을 보니 푹 익진 않았지만 아삭한 맛이 아닌 그저 뭉클한 상추? 김치 담기가 이리 어려울 수 있단 말인가? 남들은 뚝딱 잘만 하던데 나는 왜 이리 김치가 어려울까? 신 것을 잘 못 먹어서 그나마 겉절이를 좋아하는 데 겉절이도 못 만드는 사람이 무슨 김치에 도전을 해가지고..


온갖 상심의 머릿속 목소리가 머리를 흔들었다. 


친한 친구가 드디어 원인을 알아냈다. 신기한 건 그 친구는 그 김치를 먹자마자 알아냈다는 데에 더욱 놀라운 일이었다. 적어도 나에게는 말이다. 고춧가루에 두 가지 종류가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다면 내가 정녕 바보란 말인가? 고춧가루에는 고운 고춧가루와 굵은 고춧가루가 있다. 고운 고춧가루는 고추장을 만들거나 물김치를 담글 때 살짝 색만 낼 때 사용하는 것이고 김치를 담글 때는 굵은 고춧가룰 사용해야 한단다. 한마디로 나는 고운 고춧가루 즉 고추장 만드는 고춧가루로 김치를 담갔다는 것이다. 아뿔싸 이럴 수가!


너무 창피하고 또 창피했다. 나이가 50이 넘어서 고춧가루가 두 가지라는 사실도 몰랐고 고추장용으로 김치를 담가 김치가 아닌 고추장에 절인 배추를 담갔다는 사실이 그래서 김치가 죽처럼 떠먹어야 한다는 사실에 고개를 들지 못할 정도로 창피함에 몸 둘 바를 몰랐다. 누가 알까 무서운 일이지만 내가 이렇게 글을 쓰는 이유는 사람 사는 일에 이런 일도 있을 수 있고 나처럼 엉뚱하게 김치를 담을 수 있는 일이니 조심하라는 이유에서이다. 물론 나처럼 바보 같은 사람은 없겠지만 남자들 특히 나이가 많이 든 남자들도 이를 모를 수 있는 일이고 행여나 나처럼 그런 사실이 있는 사람이라면 서로 위로하자는 차원이다. ㅎㅎ


누구는 그런다.


맛이 없으면 김치찌개라도 해서 먹으라고... 그래서 그렇게 해보았지만, 결코 김치찌개의 담백한 맛을 기대하진 못했다. 물론 이웃들과 솔직하게 말하고 나눠서 먹고 끝냈지만 주면서도 나의 어리석음과 실수로 미안함을 얹어 부끄러워하며 김치찌개라도 하라며 퍼주었다. 누구는 '당신 한국사람 맞아?' 라며 웃는 분도 있었고 나를 조금 생각해서 '뭐 그럴 수도 있지. 나도 그런 적 있어'라며 위로해 주시는 분도 있었고 '그래도 김치맛은 나네. 다음엔 맛나게 담을 수 있겠는데'라며 웃는 분도 계셨다.


여기가 미국이라 다행한 일이다. 타국이라는 이점으로 그래도 김치를 담가 먹겠다는 생각 자체에 박수를 주시지 않을까 하는 계산이다. 해외에 살면 이상하게도 고국에 대한 그리움이 음식의 그리움으로 사무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뜬금없이 청국장이나 우거짓국이 생각나고, 배추를 된장에 지진 된장 배추도 생각나 먹고 싶고, 굳이 찬밥에 얹은 보리굴비도 먹고 싶고 비라도 올라치면 바삭한 호박전에 막걸리도 먹고 싶어진다.  더군다나 김치를 다듬고 난 버릴법한 배추겉잎으로 우거지를 잔뜩 만들어 쟁여 놓고 겨우내 먹고 싶은 마음을 어찌 잠재우겠는가?


당장 다시 배추 한 박스를 사서 이번엔 눈 부릅뜨고 굵은 고춧가루를 확인한 후 아주아주 만난 김치를 꼭 담그리라. 그래서 남은 배춧잎을 살짝 데쳐 된장에 다시 멸치 몇 마리 넣고 들기름을 듬뿍 넣고 자작하게 지져 고슬고슬한 흰밥에 한 술 떠야 되겠다. '난 입맛이 떨어진 적이 없다' 말 하시던 엄마의 숟가락에 담긴 흰쌀밥이 고슬한 풍미를 내듯 코끝을 스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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