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운 여름에 달리면 시원한 가을엔 날아갑니다
여름에는 무엇이든 하기에 앞서 굳건한 핑계 하나가 생긴다. '더워서'라는 세 글자가 바로 그것이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더워서' 나갈 수가 없어. '더워서' 꼼짝할 수가 없어. 거기에 '습해서'까지 붙는다면 정말이지 꿈쩍할 수 없다. 사정이 이러할진대 달리기는 오죽할까. 그렇게 한동안 '더워서‘ 달릴 수 없는 날들이 이어졌다.
그리 덥지 않을 무렵부터 달리기를 재개해 보려고야 했다. 한데 어찌 된 영문인지 흥미가 영 붙지 않았다. 러닝 머신 위를 달리는 건 수월했는데, 야외에서 뛰기만 하면 기록도 좋지 않고 지치기 일쑤였다. 7km를 목표로 하면 5km를 간신히 뛰었고, 1시간을 달리리라 마음먹으면 30분도 버거웠다. 그러다 보니 달리기를 좋아했던 마음은 온데간데 없어졌다. 머뭇거리는 사이 달리기와의 관계는 더더욱 시들었는데, 차차 여름이 도래한 것이었다. 마음이 식어 가는 와중에 이간질까지 당하는 모양새였다. 이별이 머지않은 듯했다.
그러다 우연히 2개의 동영상을 보고 나는 모처럼 달리기를 다시 만날 결심을 냈다. 하나는 어떻게 달리는 것이 좋은가에 대한 내용이었고, 하나는 무더운 여름에 달리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는 영상이었다. 그래서 하루는 열대야를 뚫고 집 근처 공원으로 향했다. 한때는 잘 달렸던 나를 다시 만나고 싶었다. 그렇게 내리 1시간을 다시 연속해서 달렸고, 목표치인 7km를 뛰었으며, 무엇보다도 편안했다. 그 과정에서 깨달은 것들이 있는데 다음과 같다:
첫째, 스스로의 중심을 잡는 게 우선입니다.
애플워치를 차면서 좋은 점은 '수치'를 알 수 있다는 점이다. 애플워치를 차면서 나쁜 점도 '수치'를 알 수 있다는 점이다. '수치'를 아는 것은 약이 되기도, 때에 따라서는 독이 되기도 한다는 말이다.
나는 애플워치에 기록된 최고 기록을 늘 경신하고 싶었다. 그래서 욕심껏 달리다 보면 어쩐지 허리도 무릎도 배도 아파 곧 멈춰야만 했다. 러닝머신 위를 달릴 때는 괜찮다가도 야외에서 달리면 탈이 났다. 왜 그런지를 고민한 끝에 알게 되었다. 밖에서 달릴 때는 기준이 되는 틀(=트레드밀)이 없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즉 스스로의 중심을 유념하며 달려야 한다. 내게 필요한 것은 빨리 달리기가 아니라 지속 가능한 달리기였다. 그래서 속도를 올리려 들 때마다 '슬로우, 슬로우' 하고 스스로에게 주문을 걸었다.
몇 km를 뛰겠단 목표도, 얼마의 속도로 달리겠단 계획도 모두 없앴다. 그저 달리고 싶지 않을 때까지 뛰기로 했다. 그게 3분이라면 3분만 뛰는 것이고, 1시간이라면 1시간을 뛰면 그만이었다. 그런데 수치에 대한 욕심을 내려놓으니 오히려 평소 목표치로 삼던 7km를 가뿐히 통과할 수 있었다.
사실 이 멋진 문장은 내가 본 동영상의 제목이다. 여름의 푹푹 찌는 더위는 분명 달리기에 있어 최선의 조건은 아니다. 봄이나 가을의 선선한 바람을 따라 달리는 것의 쾌적함에 비하면 여름의 달리기는 손가락 끝에 이는 끈적함만으로도 피하고 싶은 무엇이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달리고자 하는 마음만 있다면, 여름이라고 해서 못 달릴 게 무얼까? 하고자 하는 의지가 있다면 그 외의 부연은 대수롭지 않은 것투성이다.
달리면서 ‘더운 여름에 달리면 시원한 가을엔 날아간다’는 말을 내내 곱씹었다. 그러다 불쑥 산다는 것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무더운 여름에 달릴 수 있다면 시원한 가을에는 날개 돋친 듯 날아가는 건 당연한 일이지. 견디기 어려운 무더운 여름은 온다. 중요한 건 그때도 달릴 수 있는 사람이 될 것인가, 말 것인가 하는 선택의 문제는 아닌가. 이 즈음 최근에 읽었던 양귀자의 소설 '모순'의 한 대목이 떠오른다. 삶을 약동하게 만드는 생명력은 사시사철 쾌적한 온실이 아닌, 일교차가 난잡하기 그지없는 야생에서 기인한다는 아이러니 말이다.
나도 그렇게 사는 것처럼 살고 싶었어. 무덤 속처럼 평온하게 말고.
- 양귀자의 '모순', 284쪽
나는 지금 무더운 여름을 달리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