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가지 않을 용기
해외 살이 10년 차, 기회와 신념 사이
시간이 참 빠르게 간다.
2020년 말 네덜란드에 왔으니, 어느새 다섯 해가 다 되어 간다. 여러 나라를 돌아다녔지만, 이렇게 오래 한 곳에 머문 적은 없었다. 나와 잘 맞는 환경 속에서 오래 일할 수 있다는 건 축복이다. 이곳에서 참 좋은 사람들을 만났고, 회사에서도 하는 일들이 잘 되고 있어 감사한 일들이 많다. 그런데 요즘은 마음이 자꾸 헛헛하다. 가을이 와서 그런가.
내가 고국 떠나 이곳에서 뭘 하고 있는 걸까.
그렇다고 향수병이 온 것은 아니다.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냐면, 사실 그렇지는 않다. 한국으로 돌아가면 미래가 불투명할 것 같고, 또다시 사회가 말하는 대로 남들 눈치 보며 달리는 경주에 무작정 뛰어들고 싶지 않다.
가끔 그런 생각이 든다. 왜 한국에서 자리 잡지 못했을까.
사실 돌아보면, 기회가 아예 없었던 건 아니었다. 모잠비크에서 돌아와 바로 한국에서 새 직장을 얻었을 때, 연봉 제안은 어찌된 영문인지 처음 공고보다 훨씬 낮았지만 그래도 감사한 마음으로 일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좋은 사람들을 만나 인정받았다. 하지만 결국 국제개발협력 쪽에 계속 관심이 가서 새로운 해외 파견 기회를 찾았고 결국 케냐로 떠났다.
지금 생각해 보면, 월급은 낮지만 안정적인 일자리가 있었고, 내가 원해서 지원한 일이었기에 한국에 기회가 없었다고 불평할 수는 없다. 물론 해외 파견은 경력과 연봉 등 여러 면에서 내게 더 나은 기회였다. 그때 나는 해외 석사도 없었고, 영어도 완벽하지 않았으며 NGO 경력뿐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뽑혔기에 감사한 마음이 크다. 결국 한국에서 기회가 없었다기보다는, 내가 더 나은 방향이라고 믿는 길을 선택해 온 셈이다.
그렇게 더 나은 기회를 쫓아 살아왔다는 것에 후회는 없다. 20-30대를 여러 나라에서 좋은 경험을 하고 좋은 사람들을 만나며 일한건 분명 큰 자산이니. 그런데 마음 한구석이 헛헛한 건, 내가 정말 잘 살고 있는 건지, 이렇게 계속 기회를 좇아 해외에서 살아가는 것이 과연 의미 있는 일인지 하는 질문이 들어서인 것 같다.
그런 생각을 하던 중, 제임스 맥브라이드 (James McBride)의 '하늘과 땅 식료품점(The Heaven & Earth Grocery Store)'을 읽었다.
이 책은 1920~30년대 펜실베이니아의 ‘치킨 힐’이라는 마을을 배경으로, 서로 다른 인종과 종교, 계급의 사람들이 만들어가는 공동체의 이야기를 그린다.
가장 마음에 남은 인물은 초나 (Chona)였다. 초나는 병든 몸으로도 자신이 옳다고 믿는 일을 포기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녀와 남편 모셰는 유대인 이민자였고, 치킨 힐 (Chicken Hill)이라는 동네에서 ‘하늘과 땅 식료품점’을 운영했다. 치킨 힐은 처음에는 유대인들이 모여 살았는데, 치킨 힐 아래 동네가 점점 발전하면서 잘 사는 사람들은 모두 밑 동네로 이사를 갔고, 나중에는 흑인들이 자리 잡았다.
남편인 모셰 (Moshe)는 초나에게 우리도 얼른 잘 사는 다른 동네로 이사를 가자고 설득했지만, 그녀는 자신이 운영하는 식료품점을 포기할 수 없다며 이사를 거부한다. 그리고 그녀가 지킨 그 가게는 단순히 물건을 파는 공간이 아니라, 흑인과 유대인, 외국인들이 차별 없이 드나들 수 있는 작은 피난처 같은 곳이 된다.
그러던 어느 날, 청각장애를 가진 흑인 소년 도도 (Dodo)가 정부에 의해 수용소로 끌려갈 위기에 처한다. 정부는 장애나 질병이 있는 아이들은 모두 사회에서 격리되도록 조치하고 있었다. 초나는 엄마를 잃고 오갈데 없는 그 아이를 불쌍히 여기고 자신의 집에 숨겨주기로 결심한다. 정부에게 발각될 위험을 감수하면서도, 그녀는 자신이 옳다고 믿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안타깝게도 그녀는 죽음을 맞이한다. 시간이 흐른 뒤, 사람들은 초나의 이름을 딴 커뮤니티 센터를 세운다. 그녀의 이름과 삶은 그렇게 사람들에게 기억되고 전해진다. 그리고 마지막 성인이 된 도도가 그녀를 기억하며 이야기가 끝난다.
책을 덮고 나서 한동안 생각했다. 나는 언제나 기회를 좇아 움직여 왔다. 더 나은 환경, 더 큰 배움, 더 넓은 세상. 그런데 초나는 자신이 가진 작은 공간 안에서, 흔들리지 않는 신념으로 누군가의 삶을 지켰다.
그녀는 사회적 시선으로는 잘 사는 동네로 갈 수 있었음에도 가난한 동네에 계속 머무는 도태된 사람으로 보일 수 있다. 하지만 그녀는 사회적 시선 보다 어려운 이들을 돕는 것이 옳다는 신념이 있었기에, 그곳에 남아 흑인들에게 식료품을 팔고, 고아가 된 흑인 소년 도도를 지켜주었다. 그리고 그 마을 사람들과 도도에게 그녀는 자신들을 도와준 사람으로 세대를 지나 오랫동안 기억되었다.
나도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내 삶의 지향이 지극히 내 성취와 기회만을 쫓아다니며 사는 것이 아니라, 오늘 하루 내가 있는 자리에서 선한 영향력을 남기는 삶을 살고 싶다. 내 주변 사람들을 사랑과 관심의 눈으로 바라보면 나 보기에 좋은 기회만을 쫓기보다는 초나 같이 다른 어려운 이들을 위해 가게를 더 좋은 곳으로 옮기지 않고, 어려운 아이를 도울 수 있는 생각과 선택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오늘은 잠시 멈춰 서서 생각해 본다. 나는 기회를 좇는 사람일까, 아니면 기억되는 사람일까. 후자로 사는게 더 의미있지 않을까. 그렇게 살아간다면, 한국으로 돌아가든 이곳에 남든, 신념있게 선택을 하고 그 속에서 선한 열매들을 맺으며 살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