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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떼 Apr 12. 2021

올해는 유난히도 꽃이 일찍 피었다.

계절을 대하는 방법

대학시절 기억 속의 벚꽃은 중간고사 시험기간에 피었다. 바깥이 보이지 않는 어둑하고 허름한 도서관에서 공부하던 학생들은 창문 사이를 뚫고 풍겨오는 훈훈한 봄 기운에 꾸벅꾸벅 졸았다. 시험에 대한 의무감에 억지로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있으면서도 바깥에서 들려오는 말소리와 깔깔거리는 웃음소리는 마음이 간지러웠다. 애써 무시해보려 이어폰을 껴보기도 하고 차가운 커피를 벌컥벌컥 들이키며 참아보다가 이내 이기지 못하는 척 책을 덮고는 삼삼오오 꽃놀이를 갔다.


올해는 유난히도 꽃이 일찍 피었다. 뉴스에서도 올해 개화시기가 여느 해보다도 더 빨랐다고 했다. 이게 다 지구 온난화 때문이라고 했다. 3월부터 최고 기온이 22도인 것은 분명 이상하긴 했다. 하지만 어떻게 생각해보면 지금 날씨가 따듯한 이유가 이 또한 어쩌면 자연의 다른 뜻이 아닌가 싶기도 했다. 전염병과 추위로 집안에 웅크리고 있던 사람들에게 이제 바깥으로 나오라고 손짓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겨울 동안에는 집 밖에 나가지 못하는 사람들을 놀리기라도 하는 듯 주말이 되면 날씨가 화창했다. 날이 따듯해지니 하늘이 꽃의 아름다움을 시샘하기라도 한 것인지 주말에 한 번씩은 비가 내렸다. 따듯한 햇살을 받아 얼굴을 일찍 내밀었던 꽃잎들은 주말 사이 내린 봄비에 속절없이 떨어져 내렸다. 꽃잎이 피기 시작한지 불과 며칠이 채 되지 않은 날의 일이었다. 비를 견뎌낸 꽃망울들은 따스한 햇볕아래 차례로 해사한 꽃잎을 드러냈다. 사람들은 거리로 나와 벚꽃과 함께하는 이의 아름다운 모습을 카메라에 담기 바빴다.


토요일 아침 창문을 두드리는 비 소리에 눈을 떴다. 장대비였다. 평소였다면 비 내리는 소리가 운치 있다고 생각 했겠지만, 그 날 아침은 더 이상 벚꽃을 볼 수 없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들었다. 아마도 이번 봄 꽃은 어제로서 끝이 났을 것이다. 이렇게 일찍, 4월의 첫 토요일에 말이다.


일요일에도 비가 올 줄 알았는데 창문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해에 눈을 떴다. 한창 비를 쏟아내고 난 후의 하늘은 먼지 없이 청명했다. 눈이 시리도록 아름다웠다. 날이 좋아 집에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신발을 챙겨 신고 밖으로 나왔다. 길을 걷다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아름답고 잔인한 장면에 눈길을 빼앗겼다.


바닥은 간밤의 비에 낙화한 분홍 꽃잎 천지였다. 이전에 보았던 낙화와는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으레 보던 광경은 만개한 벚꽃나무가 드리운 분홍 꽃 터널 아래에서 바람에 살랑살랑 흩날리며 바닥에 내려앉는 수줍은 분위기의 모습이었다. 그에 반해 그 날 목격한 풍경은 축축했다. 채 마르지 않고 물기를 머금은 작은 분홍 원들은 가라앉아 있어 차분한 기운을 주었고, 꽃을 벗고 조금씩 돋아나는 이파리만 남겨진 앙상한 가지들은 약간 음울한 느낌을 주었다. 갓 돋아난 푸른 잔디 사이에 빼곡히 자리한 분홍 점들을 들여다 보고 있노라니 쇠라의 그림의 한 장면을 보는 것 같기도 했다. 낭만적이지만 한편으로 잔인한 그 장면은 어색해서인지 뇌리에서 잊혀지지 않았다.


이토록 낭만적이고 아름다운 봄의 전령은 왜 이렇게 야속하게도 짧은 시간 동안만 머무르는 것인지. 벌써부터 그리운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이내 납득이 갔다. 아마도 영원하지 않기에 더 아름다운 것이다. 그 시간이 아니면 볼 수는 없기 때문에 더욱 더 눈이 부신 것이다. 꽃 구경을 하는 학생들을 보니 부러운 마음이 들었다. 친구들과 깔깔대며 돌아다니는 그 앳된 얼굴이 정말 예뻐 보였다. 어쩌면 나도 이제 다시 돌아오지 않는 그 시절을 그리워하는 지도 모른다.


봄의 중간에서는 봄이 좋은 줄을 모른다. 그 무지와 어설픔 때문에 또 그 때만 느낄 수 있는 감정이 있다. 그래서 그토록 더 소중하고, 더 아쉽고, 또 그립고, 다시 돌아가고 싶은가 보다. 하지만 다시 돌아간다고 해도 나는 같은 실수를 반복할 것이고 변하는 것은 없을 것을 알기에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기도 하다. 항상 모든 것은 지나고 나서야만 비로소 깨닫게 되는 것 같다.


식물원에 산책을 가보니 튤립이 활짝 피었다. 이 꽃이 지면 푸르른 녹음이 오겠지. 지금 나는 여름 즈음에 있다. 이 또한 지나면 노랑 빨강 낙엽이 세상의 색을 칠하겠지. 겨울이 되면 또 하얀 눈이 내릴 것이다. 앞으로 다가올 계절과 그 계절을 수놓을 다양한 색깔들이 기다려진다. 지나간 계절만을 그리워하다 보면 다가오는 계절을 놓칠 수도 있다. 앞으로 다가올 계절을 부지런히 예뻐하고, 부지런히 즐겨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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