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겨울 이 년 만에 한국에 가서 친구와 찜질방에서 만났다. 찜질방에 누워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데 친정엄마가 전화를 하셨다. 뭐 간단한 대화 후 전화를 끊었는데 집에 오니 엄마가 매우 기분이 언짢아 보이셨다. 왜 그런가 했는데 그날 밤 엄마는 나에게 말씀하셨다.
-그래 니가 장녀라 뭐가 불만 있냐-
아닌 밤중에 홍두깨는 이럴 때 쓰는 말이다.
뜬금없는 엄마의 공격에 나는 이게 무슨 말인가를 생각하는데
-아까 낮에 네가 전화하다가 전화가 안 끊겼는지 니 말이 계속 들렸는디 니가 뭐 장녀라 뭐가 어쨌다고 하더라. 자세히는 못 들었지만 그래 니가 장녀라 뭐가 불만이냐....... 나는 너를 제일 위하며 키웠다. 니가 큰딸이라 너를 제일 생각하고 제일 잘 먹이고 남들 다 고등학교만 보내라 해도 나는 니가 큰딸이라 너를 내가 니 아버지 없이도 대학에 보내고.....-
그렇다.
엄마 말씀은 맞다. 나는 우리 삼 남매 중에 제일 대접받으며 당시엔 공주처럼 컸다(경제적으론 어려웠지만 어려운 살림살이에도 엄마는 물 한 방울 안 묻히게 나를 키웠다.)
엄마 말씀은 다 맞는데 나는 나대로 서러워졌다. 어머니는 우연히 들린 전화기에서 내가 장여 운운하는 것이 자신의 정성을 몰라준다고 생각하여서 서운하신 것이었으리라. 더 말해 봤자 그래서
-내가 장녀래서 나쁜 것이 아니라 그냥 내가 장녀여서 뭐 그런 저런 이야기를 했지...-
하고 이야기를 끝맺었으나 그날 밤 나는 나대로 많이 서러웠다. 육십 다 되는 나이에 그런 것이 서러웠다고 누가 말하면 나는 좀 쪼잔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나 나는 많이 서러웠고 내가 장녀라 가졌던 평생의 그 책임감을 생각하니 억울했다.
뭐 솔직히 엄마 말대로 나는 별로 희생한 거는 없다. 그러나 그러나 어릴 때부터 나는 언니였고 누나였고 딸이었고를 벗어날 수 없었다. 나보다는 나의 역할에 충실하려고 얼마나 노력하며 살았는데 그걸 엄마가 저렇게 몰라준다 생각하니 울고 싶어졌다.
나중에 여동생에게 말하니 여동생은 예쁘게 커피를 홀짝거리며 말했다.
-그치 언니는 사실 좀 귀하게 컸지.-
-뭐 그럼 넌 안 귀하게 컸냐. 그리고 내가 큰딸이라고 너 내가.... 나는 열 살에도 달걀 프라이라도 하면 엄마나 너 먼저 먹으라고 했다........ 내가 어릴 때 니들 데리고 놀러 다니느라 나는 잘 놀지도 못했어...... 나는 대학도 그래서 내가 가고 싶은 학과 안 가고 사범대 갔잖아....... 내가 대학교 일 학년 때부터 아르바이트해서 너 용돈 줬잖아..... 내가 교사가 좀 안 맞는 성격이지만 성격 고쳐가며 교사해서 평생 엄마 용돈, 땡균이 용돈, 지금도 집안 행사.....-
하다 보니 내가 참 치사해졌다. 평생 처음 하는 내 말에 동생은 말없이 커피 옆 쿠키를 바삭 씹으며 언니도 갱년기네 하는 표정이다. 내가 왜 이러나 할수록 나만 참......
어쨌든 나는 1960년 대 지방에서 태어난 딸 치고는 매우 사랑받고 대접받으며 잘 자랐다. 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장녀의 의무를 잊을 수는 없는 사회 분위기가 같이 존재했다. 아홉 살에 아버지를 잃은 나를 대도시 고등학교에 진학시키려고 어머니가 집을 팔고 어린 동생들을 데리고 고향을 뜰 때 많은 사람들은 걱정괴 오지랖으로 여자아이 좋은 공부시켜서 뭐 하냐는 반응을 보였고, 나는 말은 안 했지만, 니 엄마 뭐 하러 너 데리고 도시로 간다냐 하는 동네 아줌마들 말과 표정에 뭔가를 해야 할 거 같은 무한의 압력을 느꼈다.
내 친구 땡순이는 나보다 더 좋은 점수로 인문계 학교에 배정을 받았지만, k장남이었던 아버지의 결단으로 동생들을 위해 일반고 진학을 포기하고 서울에 전수학교에 진학하고 낮엔 동사무소에서 '이양'으로 사환생활을 하다가 결국은 검정고시로 대학에 진학하여 졸업하고, 세무사 사무실에서 전문직으로 일하고 있다.
내 친구 땡자는 여덟 살에 겨우 초등학교 1학년을 마치고 울면서 애보기를 하러 떠났다. 내 친구 땡화는 공부를 잘했지만 중학교를 마치고 부산 한일여상 야간에 진학해서 낮에는 의류공장에서 미상을 돌리며 상업 역군이라는 자부심으로 일하며 명절에 부모님 선물 사들고 자랑스럽게 귀향하고는 했다. 내 친구 땡희이는 내가 고등학교를 다니던 대도시의 만원 버스에서 만났는데 안내원이었던 땡순이는 내가 내민 버스토큰을 내리는 내 보조 가방에 얼른 깨워 넣고는 닫히지도 않는 버스 문에 매달려 갔는데 다 못 들어간 사람들을 뒤에서 밀치며 잡고 가느라 마지막 얼굴을 보지 못했다.
앞에 말한 땡순, 땡자, 땡희는 1960년 대의 가난한 장녀들이다. 요즘처럼 거창하게 k 장녀라는 말은 없었지만 태어나면서부터 딸이라는 서러움과 집안 살림의 밑천이 되어야 한다는 강박 속에 자신을 희생하며 열심히 살았던 장녀들이다. 그들의 희생은 집안의 기둥이 되기도 하고 또 사회의 원동력이 되기도 했다.
운이 매우 좋았던 나와 나와 같은 처지에 있었던 장녀들 또한 주위의 장녀에 대한 책임의식을 벗어날 수 없었고, 사회적으로 가정적으로 가스라이팅 당한 것처럼 스스로의 마음속 깊이 장녀라는 책임의식을 지울 수 없는 삶을 살아왔다.
이랬던 장녀들이 이제는 k 장녀로 불리며 우리 사회의 트렌드의 하나가 되었다. 어렵던 시대에 장녀로 태어나 집안을 위해 희생하고 살아온 때로는 성공해서 과거를 미담으로 이야기하고, 때로 성공은 못했지만 그렇게 살았다고 말하며 위안과 자랑으로 삼기도 하고, 때로는 그런 장녀의 삶을 후회와 비탄으로 억울해하기도 한다. 장녀라는 이름이 모든 것을 이해하게 하는 삶을 살았던 40대 이후 k 장녀들은 가부장제에서 여성이라는 불리함에 장녀라는 더 불리한 상황에서 더 많은 책임감을 가졌고 또 더 많은 봉사를 했던 것이 사실이다.
이런 k 장녀들은 2대의 좀 다른 k 장녀들을 키웠다. 나부터도 내 딸에게 조금 다른 생각으로 딸을 키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