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를 마흔에 낳았다.
흔히 말하는 생애주기를 한참 벗어난 나이였다.
여고 시절. 정숙하고 근엄한 표정의 가정선생님은 말씀하셨다.
서른 살 전에 두 명의 아이를 낳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일천구백. 팔십. 몇 년이었다.
인생을 거스르며 살지는 않았다고 생각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보니 나는 많은 것을 세상의 지침대로 살지 못했다. 대학까지는 그럭저럭 친구들과 비슷하게 뒤지지도 앞서지도 않고 어깨를 맞추어 갔다. 어느 순간 안도했다. 나도 남들처럼 살겠구나 하고... 살아보니 너무 일찍 한 생각이었다.
그 이후 나는 흔히 말하는 생애주기를 내 맘대로 만들게 되었다.
삼십 대 후반에 결혼했다.
못할 뻔했다. 나이가 많아서...
어쨌든 2000년대 초반 내 결혼 소식은 많은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었다.
삼십 대 후 반에도 결혼할 수 있다고...
출산은 사십에 이르러 겨우 했다. 친정엄마 한마디 하셨다. 내 나이 사십에 니가 열여덟이었다고.
아이 돌 사진 찍을 때 아이사진 보정보다 내 사진 보정을 많이 했다고 사진관 사장님이 친절하게 말씀하셨다.
아이 세 살에 짐보리 가서 나보다 네 살 많은 옆 아이 할머니와 친구가 되었다.
마흔여덟에 학부모가 되었다. 학부모가 된다는 설렘보다 나이 많은 엄마라는 자각이 깊어질 무렵 학교에서 돌아온 아이는 그날 배운 노래 한 구절을 불렀다.
- 이웃집 순이 우리 엄마보고 할매라고 놀렸다.
잠이 안 온다. 내일아침 따지러 가야겠다.........-
어쨌든 6.25 때 난리는 난리도 아니게 애먼 데 먼 거리며, 동동거리며 키웠다.
죽을 둥 살 둥 온 힘을 다해 키웠지만 별로 잘 키운 것 같지 못하다는 반성 끝엔 꼭 내가 나이가 많아서 그랬나 라는 자괴감이 붙었다.
이제 한 이 년만 있으면 대학을 갈 나이가 되었다.
일단은 대학만 가면 싶다가도 문득 깨달음이 온다. 대학만 간다고 끝날 일인가. 아니 어쩌면 새로운 시작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 새로운 시작에 내 나이를 생각하면 아득해지고는 한다.
요즘 저출산이 참 문제라고 생각한다. 누구 말처럼 꼴랑 하나 낳은 주제에 나도 저출산 걱정을 한다.
그러다 생각해 보니 내가 아이를 하나만 낳은 것은 거의 한 팔십 프로 이상 나이 때문이었다. 사십 대 중반에 둘째를 낳을 수는 없었다. 그때 생각은 그랬다. 이십 년 전만 해도 마흔에 첫 아이 낳는 것도 흔한 일은 아니었고 거기에 둘째를 사십 대 중반에 낳는 일은 더더욱 흔한 일이 아니었다.
마흔이 넘은 나이는 아이 낳기에 좋은 나이가 아니었다.
이러한 인식이 주위의 반응은 둘째 치고, 내가 스스로 힘들어하게 했다.
생각해 보면 내 객관적으로 육체적 정신적으로 힘들었다기보다는 주위의 인식과 그것을 너무도 강하게 받아들인 내 자신이 힘들다는 생각을 더욱 배가시켰다고 생각한다.
나는 저출산 해결의 절대적인 방안이 될 수는 없지만 아이 낳기에 좋은 나이에 대한 인식의 변화가 저출산에 도움을 줄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서른 전에 결혼해서 아이를 낳아야 된다는 생애주기는 이제 어그러진 지 오래다. 심지어 서른은 빠르고 마흔 전에 결혼하면 된다는 생각이 퍼질 정도이다. 그런데도 아이 낳는 나이에 대한 인식은 변하지 않는 것 같다.
이십 년 내가 마흔에 아이를 가졌을 때 주위 사람들이 어찌나 벌벌 떠는지 나는 그냥 드러누워야 했다. 노산이니 조심해라. 조심해라 내가 좀 빨리만 걸어도, 무거운 것만 들어도, 옆 집 아이가 예뻐서 안기만 해도 사람들은 사색되었다. 그래서 안전하게 몇 달 누웠다 일어나니 발이 안 보였고. 그때 내 몸에 붙은 살들은 이십 년 동안 내 몸을 장악하고 있다. 생각해 보니 그렇게 겁내기보다는 정확한 지식이나 경험이 필요했다. 그런데 지금도 그 인식은 변하지 않은 것 같다.
얼마 전에도 삼십 대 후반에 임신한 후배가 임신을 알고 병원에 다녀와서 참 표정이 어두웠다. 처음 임신이라 알았을 땐 마냥 좋았는데 병원에 가니 온갖 겁은 다 주었다고 했다. 노산이라 기형아 위험이 있다. 그래서 검사를 해야 하는 게 너무 많았고, 노산이라 임신 중독의 위험도 높고, 노산이라 노산이라......
나는 노산이 위험하지 않다는 것도 아니고 늦은 나이에 아이를 키우는 게 만만하다는 것도 아니다. 조심도 해야 하고, 마음의 각오도 다져야 한다. 그러나 어차피 이제 한 이십 년 전의 시각으로 보면 대부분의 산모가 노산에 들어갈 수 있다. 세상이 이렇게 변하면 사회의 시각이나 제도 등도 같이 변해야 한다.
솔직히 아이를 낳지 않는 이유는 결혼을 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런데 나는 결혼 적령기에 결혼하지 않은 사람이 다 결혼하지 않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배움의 시기가 길어지고, 스펙을 쌓고 적당한 직장을 다니고 하는 시기가 점점 늦어지고 이기 때문에 결혼을 하는 사람들이 줄어드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 결혼하지 않은 사람들도 앞으로 할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고 생각한다. 또 결혼하면 아이를 낳고 싶은 사람도 많아질 것이다.
그런데 그 아이를 낳을 수 있는 나이는 늦어지는데 아직도 아이를 낳기 좋은 나이만 이야기하면 아이 낳기가 더 힘들어질 것이다. 좀 늦게 낳아도 카울 수 있는 조건이 되고, 늦은 나이에 아이 키우는 것에 대한 불안감이 줄어들고, 이에 따르는 여러 가지 조건들이 갖추어지면 흔히 말하는 아이 낳기 좋은 나이를 놓친 사람들도 아이를 낳지 않을까 생각하는 것은 나만의 착각만은 아닐 것 같다.
저출산은 사회적 현상으로 한 두 가지만으로 이해하기도 해결하기도 쉽지 않지만 나이가 좀 있는 아이 낳기 좋은 나이를 놓친 사람들에 대한 이해와 이들이 출산할 수 있는 환경의 조성도 필요하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