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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월 Feb 21. 2024

권력은 천륜보다 강했다.

창경궁 환경전 - 비운의 소현세자

1645년 살을 에이는 바람이 아직도 불고 있던 2월 중순의 어느 날, 소현세자 이왕은 그렇게도 그리워하던 고국 조선의 땅을 밟았습니다. 소현의 가슴은 벅차올랐습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뜨거운 것이 얼굴 위로 흘러내렸습니다. 병자호란이 끝난 후 청나라에 동생인 봉림대군, 세자빈 강 씨 등과 함께 볼모로 끌려간 지 무려 8년 만의 귀국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볼모로 조선을 떠날 때만 하더라도 소현은 조금은 심약한, 구중궁궐에서 곱게 자란 왕자였습니다. 그랬던 소현은 8년간 적국의 한가운데서 인질 노릇을 하면서 점차 담대해져 갔습니다.

순간순간 선택과 판단을 해야 했고 청국의 따갑고 의심스러운 시선을 슬기롭게 피해야 했습니다.  심약한 성정으로는 볼모 생활을 버티기 힘들었습니다. 조선보다 발달된 청의 실용 문물과 청나라에 들어와 있던 서구 문물을 접하고서 소현은 과학과 실용 문명을 배우고 깨우쳐야 두 번 다시 병자호란 같은 치욕을 당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소현은 스트레스도 엄청 많이 받았습니다.

한편으로는 청나라의 시선을 잘 무마해야 했고 다른 한편으로 조선에서 의심도 받았습니다. 청나라에게 '아~'라고 하면 청나라는 조선이 자꾸 징징거린다며 가만두지 않을 거라며 협박을 해대기 일쑤였습니다.

조선에게 '어~'라고 말하면, 청나라의 요구를 그대로 수용하고 요구한다며 소현세자가 조선인인지 청나라사람인가, 하며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았습니다.


적국 청나라와 고국이지만 시간이 갈수록 타국처럼 느껴진 조선 사이에서 소현세자는 늘 살얼음판을 걷는 기분이었습니다.

청에 이야기할 때는 조선에서 말한 것의 5~60%만 얘기하곤 하였고 조선에 청의 요구를 말할 때는 청이 말한 것의 반 정도만 얘기하였습니다. 배경과 맥락을 무시한 채 '말'이 곧이곧대로 전달되어 혹여라도 분란의 소지가 될 오해가 생길까 걱정하였습니다. 소현세자의 입장을 모르고 당장 자신의 상황만을 우선시한 청과 조선은 제각기 소현이 잘못하고 있다고 생각하곤 했습니다. 소현은 분쟁을 막고 평행을 유지하기 위하여 말과 행동에 엄청난 정신적 에너지를 쏟았습니다.  


청나라도 조선도 소현세자와 그 무리가 편안히 생활을 영위할 물자도 넉넉히 대주지 않아서 소현은 세자빈 강 씨와 함께 상업에도 관심을 가졌고 농사에도 눈길을 주었습니다. 이것이 신문물 실용 문물에 관심을 갖게 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소현세자의 신문물 수용에 대한 적극적 태도에 청은 소현에게 우호적 태도를 보이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힘든 육체적 정신적 압박을 받던 소현은 고국에 돌아와서 너무도 기뻤습니다.

이제 아버지와 그간 못 나누었던 부자간의 정도 나누고 청나라에서 배웠던 신문물도 소개하여 조선이 좀 더 발전하는데 도움을 주겠다는 생각에 신이 났습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이었을까요?

소현의 마음과 아버지 인조 임금의 마음이 달랐던 모양입니다. 소현이 도착한 첫날은 버선발로 나가 맞이하며 반가워했던 인조는 웬일인지 시일이 조금씩 지날수록 아들을 쌀쌀맞게 대했습니다. 소현이 청의 문물에 대해서 이야기하면 퉁을 놓기 일쑤였고 갖고 온 책과 기계와 비단 등을 보여주니 벼루를 던지기도 했습니다. 그 벼루에 소현의 이마가 맞아 크게 다치기도 하였습니다.  


시일이 조금 지나자 소현도 눈치를 채기 시작했습니다.

"아, 아버지는 나를 반기시지 않으시는구나!"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인조는 청에 대하여 극도의 반감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청의 문물을 소개하고 조선에 도입하려는 세자에 대하여 반감을 가졌습니다.

반면 소현세자가 청에서 보인 태도 때문에 청에서는 소현을 좋은 의논상대로 여기고 있었습니다. 의논할 일이 생기면 조선 조정과 함께 소현세자에게 직접 논의하기도 했습니다. 청의 이런 태도가 인조는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인조는 생각했습니다.

"임금은 자신인데 어찌 세자와.... 당치 않다!"


인조가 사랑하는 후궁 소용 조 씨는 소현세자와 세자빈에 대한 험담을 늘어놓아 흔들리는 인조의 마음을 더욱 어지럽혔습니다.

"전하, 세자빈이 소첩에 대해 입에 담지 못할 저주를 하였다고 들었사옵니다. 흑흑. 소첩은 무서워서 궁에 있지를 못하겠사옵니다.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소용 조 씨는 소현 세자가 궁에 돌아온 지 며칠 지나지도 않았는데 밤낮으로 인조에게  이런 말들을 속삭여대었습니다. 이 모든 것들로 인해 인조는 점점 아들을 미워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조선에 올 때부터 몸이 허약해져 있던 소현은 조선에 온 지 두 달 만에 학질이라는 병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학질은 요즘 말라리아라는 병으로 알려져 있지요. 학질에 걸린 소현세자는 창경궁 환경전에 앓아눕게 되었습니다. 내의원에서는 어의를 보냈고 어의 이형익은 세자에게 침을 세 차례나 놓았습니다. 그런데 침을 맞아도 차도를 전혀 보이지 않던 소현세자는 학질이라는 병명을 얻은 지 사흘 만에 앓아누웠던 창경궁 환경전에서 그만 숨을 거두고 말았습니다. (인조 23년, 1645년 4월 26일)


병명을 안 지 사흘 만에 세자가 죽다니요? 관리들은 인조에게 내의원 어의 이형익이 침을 잘못 놓았을 가능성이 높다며 간언 하였습니다.

"왕세자의 증후(症候)가 하루아침에 갑자기 악화되어 끝내 이 지경에 이르렀으므로, 뭇사람의 생각이 모두 의원들의 진찰이 밝지 못했고 침놓고 약 쓴 것이 적당함을 잃은 소치라고 여깁니다. 의원 이형익(李馨益)은 사람됨이 망령되어 괴이하고 허탄한 의술(醫術)을 스스로 믿어서 증세도 판단하지 못하고 날마다 침만 놓았으니, 그 신중하지 않고 망령되게 행동한 죄를 다스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형익을 잡아다 국문하여 죄를 정하고 증후를 진찰하고 약을 의논했던 여러 의원들도 아울러 잡아다 국문하여 죄를 정하도록 하소서."


게다가 세자의 죽은 모습도 기괴하였습니다.

세자의 '온몸이 전부 검은 빛이었고 이목구비의 일곱 구멍에서는 모두 붉은 피가 흘러나왔는데, 검은 천으로 얼굴 반쪽만 덮어 놓았으나, 곁에 있는 사람도 그 얼굴빛을 분별할 수 없어서 마치 약물(藥物)에 중독되어 죽은 사람'과 같았습니다.


하지만 인조는 "여러 의원들은 신중하지 않은 일이 별로 없으니, 굳이 잡아다 국문할 것 없다."라고 하며 세자의 입관을 서둘렀습니다.


세자의 장례를 치른 불과 일 년이 지난 뒤, 인조는 소현세자의 부인이자 자기 며느리인 세자빈 강 씨가 전복에 독을 넣어 임금이 자기를 죽이려 했다며 며느리의 문안도 받지 않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런저런 계략을 갖다 붙여 강 씨를 후원 별당에 가두어 버렸습니다.

이후로 세자빈은 시아버지 인조에 의해 사약을 받아 죽음에 맞이하였고, 세자빈의 친정은 몰살이 되다시피 했으며 소현세자의 세 아들도 제주도에 유배를 가야만 했습니다.


아들과 며느리를 죽음에 이르게 한 비정한 아버지 인조,

손자를 바다 멀리 유배 보내버린 매정한 할아버지 인조,

이 비정함과 매정함 때문에 역사는 지금 아들과 며느리를 죽인 숨은 배후는 인조가 아닐까, 하고 추측하고 있습니다.


소현 세자는 억울하게 죽었을까요?

아니면 정말 학질에 걸려 죽었을까요?


창경궁에 있는 환경전 앞에 서서 400년을 뛰어넘어 소현 세자와 대화를 해보는 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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