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자매 여행기
"우리 해외여행 가자"
"그래, 그래 가자. 아직 장거리비행가 탈 여력 있을 때 유럽 한번 더 가보자"
"옛날 로마 갔을 때처럼 우리끼리 자유여행했으면 좋겠다. 그게 기억에는 더 남더라."
지난주 동생을 보러 멀리서 찾아온 언니들이 특명을 내렸다. 올해 여름에 크로아티아로 여행을 갈 것이니, 자유여행을 갈지, 패키지여행을 갈지 나더러 알아보고 결정을 내리라고 했다.
내가 어떻게 결정하든 아무 상관이 없으니 전혀 부담 갖지 말란다. 시간은 올 8월 중순, 장소는 크로아티아. 이것만 정해놓고 홀연히 그녀들은 고향으로 사라졌다.
7년 전에 우리 세 자매는 6박 7일로 로마 자유여행을 다녀온 적이 있었다. 숙소 한 군데에 베이스캠프를 차려놓고 로마와 인근 여기저기를 돌아다녔다. 숙소 주방에서 김치찌개도 끓여 먹고, 아침에 실컷 자고 여유로운 아침을 맞기도 했고, 당일 투어에 등록해서 나폴리와 폼페이를 다녀오기도 했고, 나보나광장 노천카페에서 에스프레소를 마시며 한적한 오후를 즐기기도 했다.
우리 언니들은 영어를 전혀 할 줄 모른다. 해외여행은 패키지나 영어가 가능한 동반인이 있어야만 하는데, 일정이 맞는 영어가 되는 동반인을 찾기란 서울 광장시장에서 먹거리 딱 하나를 고르는 것과 같다. 이런 이유로 해외여행은 거의 늘 패키지여행이었다. 가족들과 친구들과 여러 번의 패키지여행을 다녀온 언니들은 7년 전 우리끼리 했던 로마 자유여행의 기억이 꽤나 좋았나 보았다. 그래서인지 심심찮게 "로마 같은 자유여행 한번 더 가봤으면"하곤 했다.
7년 전과 달리 언니도 나도 나이가 들었다. 큰언니는 낼모레 환갑을 바라보고 있고, 작은 언니도 환갑이 머지않았다. 나보다 몸이 좀 더 약하고 나보다 좀 더 몸 쓰는 일을 많이 한 언니들은 체력도 예전 같지 않다. 허리가 약해 침대매트리스가 좋아야 하고, 무릎 수술을 해서 오래 걷기도 어렵다. 치아가 안 좋아서 뜨거운 것, 차가운 것 다 먹지 못하고, 좀 많이 먹었다 싶으면 소화제를 꼭 먹어야 한다.
언니들이 귀향을 하고 난 후 나는 목하 고민에 빠졌다. 속칭 '이 노친네'들을 모시고 자유여행을 가서 고생을 자처할 것인가, 편하게 패키지를 예약해서 유럽 몇 개국을 휘~익 둘러보고 올 것인가.
나도 패키지여행을 두 번 가본 적이 있다. 너무 편했다. 어디를 갈 것인지 고민 안 해도 되고, 어디서 잘 것인지 알아볼 필요도 없었다. 무엇을 먹을지 찾지 않아도 되었고 비행기표 버스표 기차표를 예매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저 버스에 몸을 싣고 운전기사와 가이드가 데려다주는 곳, 알려주는 정보만 받아먹기만 하면 됐다. 분란이 생기면 가이드에게 컴플레인을 하면 되니, 같이 간 여행객들끼리 싸우거나 다투거나 삐칠 일도 없었다. 이리 편하니 여행사가 밥 먹고 살고, 여행과 관광업종에 사람이 많이 종사하는 것이겠다.
그런데, 여행이 끝나고 나서 여행을 복기해 보면 내 기준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 몇 가지 점들이 있었다.
하도 여러 군데를 돌아다니다 보니 어디를 갔다 왔는지 강렬하게 남는 곳이 몇 군데 없었다. 하루에 세 군데를 가기도 하고 네 군데를 간 적도 있었다. 어떤 곳에서는 30분만 보고 다시 버스를 탄 적도 있었다. 나름 이쁘고 유명한 곳이라 여행사에서는 코스에 넣어 홍보를 했을 것이다. 나도 버스에서 내려 풍경을 보았을 때는 필시 "아, 예쁘다"라고 감탄했을 것이다. 시간이 지나서 사진을 보아도 그곳의 이름이 희미하다. 속성으로 너무 많은 사항을 머릿속에 집어넣으면 이런 현상이 생길 수밖에 없다. 중간고사 벼락치기하고 난 뒤 내 머릿속에 남은 교과서 내용처럼 말이다.
넉넉지 않은 비용에 많은 코스를 욱여넣다 보니 9박이든 10박이든 잠자리가 다 다른 것도 불편했다. 여유롭게 짐을 풀고 숙소에서의 시간을 즐길 수가 없었다. 이동 동선과 숙박 비용을 고려하다 보니 패키지여행은 A 관광도시와 B 관광도시의 중간 지점쯤 있는 도시에 짐을 풀게 된다. 밖을 나가도 인적 드문 곳이 대부분이다. 상점도 없고 사람도 없다. 주로 들리는 건 풀벌레 소리, 보이는 건 어둠의 벌판 혹은 인적 드문 도로를 밝히는 호텔 앞마당 불빛뿐이다.
사실 여행의 묘미는 저녁 시간이라고 할 수 있다. 낮시간 관광을 끝내고 숙소에 들어와서 씻고 시내로 저녁을 먹으러 간다. 우리로 치면 강남이나 이태원이나 종로이거나 홍대쯤일까? 현지 사람들, 관광객들로 북적이는 도시의 거리에서 우연히 들어간 식당의 낯선 음식이 내 입에 딱 맞을 때 오는 그 쾌감!
길거리를 구경하고 사람들을 관찰하고 그 나라 그 도시의 색깔을 맞춰보고 도시의 냄새를 폐 안으로 깊숙이 받아들이고 때로는 길을 잃어 예상치 못한 이방의 골목에 들어섰을 때의 그 생경함!
이런 것들을 패키지여행의 숙소에서는 느낄 수 없었다.
여행의 성공은 5할이 날씨이고, 3할이 음식일 것이다. 사실 이 두 가지만 좋으면 나머지 2할은 어찌어찌 용서와 화해가 가능하다.
스페인 패키지여행을 가서 먹었던 점심 저녁은 나름 다양했다. 여행사는 구색을 맞추느라고 나름 코스로 준비해 주었다. 샐러드가 먼저 나오고 주요리가 나오고 디저트가 나오는 전통적이고 단순한 코스요리 구성이었다. 그런데 매번 나오는 샐러드는 도시가 다른데도 모두 똑같은 생김새였다. 양상추와 당근 그 외 푸릇한 야채 두어 가지가 섞여 올리브유를 살짝 끼얹은, 차가운 샐러드였다. 디저트는 항상 오렌지였다. 4일 차쯤 되었을 때 사람들은 샐러드 접시를 건드리지 않게 되었다. 듣기 좋은 꽃노래도 실은 한 두 번이면 족하니까.
밥시간이 기다려져야 하는데, 패키지여행에서 나는 며칠이 지나자 밥시간을 크게 기대하지 않게 되었다. 물론, 같이 버스를 타고 다니는 일행을 식사 때 일일이 다 살펴보지 않았기에 일행 중에 식사를 즐기는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여행 후에 이런 점들을 느끼다 보니 나는 아주 곤란한 일정이거나 아주 힘든 나라가 아니라면 자유여행을 선호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번 경우는 달랐다. 두 언니의 안전을 내가 보장해야 하고, 모든 소통을 책임져야 하며, 온갖 일정을 도맡아 챙겨햐하는 여행이었다. 과연 자유여행을 장점을 실컷 즐길 만큼 내가 언니들을 잘 케어할 수 있을까? 이번 여행에서 언니들은 자유여행의 좋은 점을 흠뻑 만끽할 수 있을까? 즐기러 갔다가 혈연관계를 단절하게 되지는 않을까?
도서관에서 크로아티아 여행 서적을 6권이나 빌렸다. 보지 않았던 여행 예능 <꽃보다 누나>도 정주행 했다. 웬만한 관광지 정보, 이동 동선과 코스, 교통수단과 방법, 숙소 등의 정보를 섭렵하였다.
우리는 8월에 여행을 간다. 8월의 크로아티아는 전 유럽의 사람들이 다 몰리는 곳이다. 모든 물가가 평상시 대비 정확히 2배가 넘었다. 거의 모든 버스와 기차는 초성수기를 대비해 서너 달 전에 예약이 끝나야 된다고 했다. 나이 든 여인들이 짐을 들고 버스를 찾고 타고 하는 게 힘들까 렌터카를 알아보았다. 약 열흘 동안의 여행기간에 장거리 운전과 주차 문제로 신경을 곤두세울 수 가능성도 있었다.
크로아티아는 긴 나라이다. 필수 여행코스는 자그레브, 스플리트, 두브로브니크 세 곳으로 압축할 수 있지만 거리가 상당히 떨어져 있다. 인아웃을 한곳에서 할지, 다른 곳으로 할지, 대중교통으로 할지 렌터카를 할지에 따라 숙소도 달라질 수 있었다.
주요 3개 도시만 가는 데도 이 여행의 시나리오는 10가지도 넘게 만들 수 있었다. 거의 일주일을 여행 계획을 짜다 보니 덜컥 겁이 났다. 여행에서 변수가 생기면 큰일이다. 언니들은 영어로 인해 문제 해결을 현지에서 할 수없다. 하지만 여행이란, 변수의 연속인 것이다. 그래서 여행이 좋은 것이고 창의력에 도움이 되는 것이고 많은 사람들이 장려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이번 여행에서는 '반가운' 이런 변수가 생겨서는 안 된다.
언니들에게 전화를 했다. 사정을 이야기했다. 세 자매 자유여행을 내가 감당 못할 것 같다고 고백했다. 패키지여행을 제안하고 링크를 보냈다.
언니들은 막 웃었다.
"여행을 좋으라고 놀라고 가는 건데, 우리 막내가 이리 스트레스받으면 할 필요가 없지."
"그래 그래. 그냥 우리 패키지 가자. 패키지가도 된다."
반가워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작은 언니가 말했다.
"욕심내지 말고, 두브로브니크 한 곳에서만 머무르면서 지내다 와도 된다. 우리가 많이 보려고 하는 건 아니잖아? 한 살이라도 어릴 때 10시간 넘는 장거리비행을 하고 멀리 가보자는 것이고, 익숙한 여기를 벗어나 새로운 분위기에서 신선한 기분을 가져보자는 거지. 어때?"
언니들은 제안했고 좋아했고 나는 홀가분했다. 간 김에 다 보고 싶은 욕심은 내가 냈던 것이었다.
바로 인천에서 두브로브니크로 가는 비행기를 알아보았다. 도시 한 곳만 여행을 할 거라 여행기간이 줄었다. 원래 계획했던 열흘의 날짜 중에서 그나마 항공권 가격이 가장 싼 날짜를 골라 항공권을 예매했다.
한 번도 안 타본 에미레이트 항공이었고, 두바이에서 새벽에 무려 5시간을 경유해야 하는 일정이었다. 언니들은 괜찮다고 했다. 왕복 항공권 가격은 인당 121만 원. 여름 성수기치고 괜찮은 가격이다.
다음날은 숙소를 예약했다. 관광하기 편한 시내 숙소 여러 곳을 골라 링크를 보내주었다. 서로 보고 의논하여 숙소도 미리 예약을 끝냈다. 도시 한 곳만 여행을 할 거라 항공권과 숙소만 예약했더니 크게 준비할 게 없다. 나머지 계획은 이따가 여행 즈음에 시작해도 늦지 않다.
일주일 고민이 사라졌다. 역시 관계에서는 소통이 필요하다. 그리고 원래의 목적만 생각하면 욕심이 줄어든다. 여행을 벌써 반이나 한 것 같다.
지금은 세 자매의 크로아티아 두브로브니크 여행이 기대되고 설렌다. 어서 8월이 왔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