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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월 Sep 30. 2024

맑은 날에도 가리봉동에 갈 수 있다

양귀자-<원미동 사람듷>

<원미동 사람들>은 연작 소설이다. 처음에는 연작 소설이라는 게 정확히 무슨 뜻인지 잘 알지 못했다. 책을 읽으면 알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도서관에서 빌린 책은 1987년에 출판된 책의 3판 40쇄로 2009년에 발행된 책이다. 1987년에 처음 출간된 책이 20년이 넘는 세월 동안 3판까지 내고 3판도 40쇄나 찍어냈다. 지금까지 111쇄를 찍어냈다고 한다. 도대체 이 책에 무슨 힘이 있는가. 양귀자의 소설 <모순>을 너무나 재미있게 읽어서 그의 다른 작품도 읽어 봐야지, 생각만 하다가 이제야 그의 초창기 작품인 <원미동 사람들>을 찾아 읽었다. 읽은 후 바로 납득이 되었다. 왜 이 책이 지금도 여전히 인쇄가 되어 잘 팔리고 있는지.


요즘 절찬리에 판매되고 있는 현대 소설들을 보면 가끔 '내가 소설을 잘 못 이해하고 있는 건가'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다. 소설의 3요소는 '인물, 사건, 배경'이라고 배웠는데 요즘 내가 읽은 현대 소설들 중에서는 인물만 있고 사건과 배경이 생략된 작품을 많이 보았기 때문이다.

아주 작은 사건-시각에 따라 사건 같지도 않은 사건-을 놓고 인물의 생각이 시시각각 변하는데 그 생각을 나열하고 따라가고 마침내 결심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소설을 읽으면서 가슴 한쪽이 답답해오곤 했다. 혹은 서점이나 편의점 같은 일상의 작은 공간에서 벌어지는 소소한 일상을 그린 힐링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을 달래주는 소설을 보면서 '세상은 늘 이런 해피엔딩이 아닌데 그래서 어쩌자고?'라는 식의 짜증이 수도꼭지를 꼭 안 잠가서 새어 나오는 물처럼 찔끔찔끔 새어 나오곤 했다.


나의 답답함과 새어 나오는 짜증은 <원미동 사람들>을 읽은 후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원미동 사람들>에는 사람도 있고, 평범한 우리의 애환이 녹아있는 사건도 있고, 2024년과 다를 바 없어 보이는 녹녹지 않은 세상인 1986년이라는 혹독한 시대 배경도 있다. 인물들이 주저리주저리 신세타령을 하지 않아도 원미동에 사는 사람들끼리 하는 대화, 원미동의 묘사, 그네들끼리의 다툼을 보면 한 시대가 고스란히 살아 움직인다. 인물의 고뇌와 시대정신이 과녁이 된 내 마음을 향해 날아오는 화살처럼 정확히 꽂혔다. 누군가는 말할지도 모르겠다. 문학의 트렌드도 모른다고. 나는 이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다. 미안하다 하지만 내 마음이 그런 걸 어쩌겠느냐!


소설은 1986년 3월에 '한국 문학'에 게재된 '멀고 아름다운 동네'라는 단편으로 출발한다. 멀고 아름다운, 원미동에 처음 들어가는 은혜네 가족의 이사 이야기에서 시작된 소설은 은혜네 가족의 이웃인 된 원미동 사람들의 개인 사정으로 이어지고 1987년 8월에 '한국 문학'에 실린 아마도 작가 자신의 이야기인 '한계령'으로 끝이 난다.

'한국 문학' 말고도 '문학 사상' '동서 문학' '문예 중앙' 등 다양한 잡지에 실린 소설들은 모두 다 원미동에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어떤 인물은 여러 작품에 주변 인물로 등장하기도 하고(형제 슈퍼의 김반장이나 지물포 주 씨, 행복사진과 엄 씨, 강남부동산 박 씨 등) 한 개의 작품에서만 주인공으로 활약하기도 하며('마지막 땅'에서 강노인) 주변 인물이 하나의 작품에서 주인공을('찻집 여자'에서 행복사진관 엄 씨) 떡하니 차지하기도 한다. 그리고 한 번도 등장하고 사라지는 경우('원미동 시인'에서 원미동 시인)도 있다. 이런 이유로 이 소설을 연작 소설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 같다.

'멀고 아름다운 동네'와 '한계령' 사이에 있는 9개의 작품 중 두 번째 작품은 '불씨'라는 제목을 가졌다.

주인공은 최근에 실직한 진만이 아버지이다. 진만이는 연습하면 진짜 하늘을 나는 슈퍼맨이 되는 줄 아는 국민학교 학생이다. 진만이 아버지는 매일 아침 일자리를 찾아 나선다. 그러다 만난 경력도 필요 없고 기술도 필요 없는 '전통문화연구회'를 만나게 된다. 88 올림픽을 앞두고 우리의 전통문화를 널리 소개하자는 취지를 가진 멋들어진 회사, 실속은 가짜 골동품 판매회사이다. 회사에서 마련해 준 판매 문구를 그 누구보다도 더 잘 달달 외운 진만이 아버지이건만 친구에게도 친척에게도 "제 말 한번 들어보실래요?"라는 말 한마디 건네지 못하는 숙맥이다. 몇 날 며칠을 골동품을 들고 여기저기 기웃거리다 꼭 한 번은 판매는 못하더라도 자기가 외운 판매 문구를 실습이라도 해야겠다는 다짐으로 버스터미널로 향한다. 하지만 거기서도 입도 한번 벙긋거리지 못하고 있다. 그때 진만이 아버지 앞에 앉은 터미널 짐꾼 아저씨. 진만이 아버지는 불을 빌린 그에게 용기 내어 말해 본다. "아저씨, 저한테 시간 내주시겠습니까? 잠깐이면 됩니다. 그냥 이야기만 들어주시면 됩니다."

"어디 한번 들어봅시다"라는 허락은 진만이 아버지가 폭포수 같은 시원한 말을 뱉게  하는 마중물이었다. 진만이 아버지는 끝내 외워두었던 골동품 판매 문구를 도도한 강물이 흐르듯 시원하게 일갈했고 급기야는 판매로 이어졌다. 낡은 촛대 하나를 산 짐꾼 아저씨는 이제 어지간히도 긴 자신의 대사를 쏟아낸다. 자신의 말을 들어주었던 아저씨에게 진만이 아버지는 열심히 고개를 끄덕여가며 그의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여섯 번째 소설의 제목은 '비 오는 날에는 가리봉동을 가야 한다'이다. 왠지 눈에 익은 제목이다. 유명한 소설이라 그런 걸까, 아니면 이런 제목이 있는데 작가가 오마쥬를 한 걸까. 나는 그것도 잘 모르겠다. 아무튼.

'먹고살기 위해서' 이런저런 온갖 일을 하는 임 씨는 은혜네 집 욕실 공사를 맡았다. 원래 그런 일을 하는 사람이 아니었기에 은혜 엄마는 임 씨를 의심하며 잘 감독하라고 남편을 닦달한다. 은혜 아빠는 임 씨가 일을 잘하는지 잘 못하는지 알 수가 없다. 왜? 그는 사무실 내기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주인이 보고 있으면 공사가 잘 마무리되겠지, 딴생각 못하겠지 하는 생각에 처음부터 끝까지 감시 같은 감독을 한다. 어찌어찌하다 임 씨의 심부름꾼이 되기도 하고 은혜네의 욕실 공사가 견적보다 쉬운 공사로 판명 나서 서비스로 옥상 방수공사까지 도움을 받는다. 은혜 엄마와 아빠는 임 씨를 끝까지 못 믿었지만 20만 원으로 견적 낸 대금을 실질 공사비와 실질 공임인 7만 원 만 청구하고 받아 가는 것을 보고 감시와 의심을 준 것에 미안해한다.

임 씨와 은혜 아빠는 형제 슈퍼에서 술을 한 잔 하게 되는데, 술자리에서 은혜 아빠는 임 씨가 '비 오는 날에는 가리봉동에 가야 하는' 이유를 듣게 된다. 임 씨가 비 오는 날 가리봉동에 가야 하는 이유를 듣고서 은혜 아빠는 스스럼없이 술값을 치르고 나온다.


임 씨는 왜 비 오는 날에 가리봉동을 가야 하는가?

잘 알고 지내던 공장의 사장이 일 년 연탄을 고정 공급해 달라더니 연탄값을 떼먹고 도망을 갔다. 수소문하여 찾아보니 가리봉동에서 번듯한 공장을 차려 성황리에 사업을 하고 있다. 돈 달라는 임 씨의 말에는, 거래처 대금이다 직원들 월급이다는 핑계를 대며 나 몰라라를 시전하고 있다. 떼인 돈 80만 원만 받으면 한 번도 못 먹인 자식들 곰국도 나오고, 공부 잘하는 큰 놈 자전거도 나오고 농구 좋아하는 둘째 농구화도 나오고 마누라 빠마값도 쑥 빠진다. 올여름 비가 올 때마다 돈 떼먹은 사장에게 갔던 임 씨. 형제슈퍼 김반장이 묻는다.

"아따 일 년 삼백육십오일 비 오는 날은 쌔고 쌨는데 머시 그리 걱정이당가요?"

임 씨는 대답한다.

"비가 와야 가리봉동에 가지, 비가 와야...."


자기 돈 80만 원도 비가 와야 받으러 갈 수 있는 임 씨가 축 늘어진 목소리로 "비가 와야 가리봉동에 가지..."라고 말할 때 나는 86년 가리봉동으로 달려가서 그놈 사장 놈의 목을 조르고 돈 80만 원을 받아 챙겨 형제 슈퍼에서 축 늘어져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는 임 씨 손에 턱 하니 쥐어 주면서 "임 씨, 여 있소 80만 원!"라고 보무도 당당히 어깨를 쭉 펴며 말하고 싶었다.


영악한 자본가는 남의 등을 쳐서 돈을 먹고, 법 없이도 사는 서민은 있는 돈도 눈 뜨고 뺏기는 세상. 1986년이나 2024년이나 세상은 그대로다.

임 씨가 돈 떼인 1986년으로부터 약 40년이 지났다. 70대의 어디쯤에 머무르고 있을 날품팔이 임 씨는 지금은 떼인 돈을 받았을까, 떼인 돈을 받고 고향으로 돌아갔을까, 아니면 원미동 어드메에 아직 살고 있을까?

눈 뜨고 내 돈 뺏기고 있는 놈들이 더 돈을 밝히는 세상, 지금도 있을 수많은 임 씨들은 맑은 날에도 가리봉동을 갈 수 있어야 한다. 아니다, 임 씨가 직접 가지 않아야 한다. 공권력이 가리봉동에 가야 한다.


40년 전에도 40년이 지난 지금에도 같은 질문을 던지고 다양한 해답을 고민하게 만드는 <원미동 사람들>, 111쇄의 이유를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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