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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월 Oct 14. 2024

일몰 풍경, 그리고 '부부 같은' 교수 커플

스르지산 전망대를 구경하면서 일어난 일

로크룸섬 투어 후 우리 자매는 침대에 뻗었다.

점심 먹고 샤워하고 잠옷으로 갈아입은 후 에어컨 빵빵하게 틀어 놓은 침대 3개짜리 방에서 여유로운 오침을 즐겼다. 뒹굴거리며 누군가 말했다. 

"자유 여행 오니까 이런 게 좋네. 놀다가 피곤하면 숙소에 와서 쉴 수도 있고."


이 여행을 기획하고 계획을 짜고 실행에 옮긴 나는 이 한마디에 모든 피로가 풀렸다. 

'역시 세 자매들끼리 자유 여행 오길 잘했어!'

스스로를 기특해하며 한낮의 잠 속으로 스르륵 빨려 들어갔다. 


두어 시간쯤 각자의 방식으로 여유를 부렸다. 나는 꿀보다 달콤한 낮잠을 즐겼고, 큰언니는 밀린 일을 보았다고 했고, 작은 언니는 자다가 유튜브 보다가 낮 동안 찍은 사진을 단톡방에 올리기도 했다고 했다. 

숙소에서 와이파이가 터지긴 했지만 세 사람이 동시에 사진을 올리면 멍텅구리가 되곤 했다. 두 명이 인터넷을 안 쓸 때 작은 언니는 한 뭉텅이의 사진을 단톡방에 올려놓았다. 작은 언니는 사진을 잘 찍는다. 이 사진들은 이따가 천천히 감상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오늘 오후에는 두브로브니크의 관광 명물인 스르지산 전망대에 올라서 일몰을 감상하기로 했다. 일몰 시간을 확인하니 오후 7시 30분. 한 시간 전에는 전망대에 오르는 게 좋겠다고 얘기를 나눴다. 


스르지산 전망대에 오르는 방법은 인터넷을 조금만 쳐보면 수십 개의 블로그에서 아주 친절히 안내되어 있다. 사람들이 가장 많이 선택하는 케이블카를 타는 방법, 택시를 이용하는 방법, 걸어 올라가는 방법, 버스와 도보를 같이 이용하는 방법 등. 


우리는 이런 안내를 볼 필요가 없었다. 왜냐하면 우리는 가장 편한 방법을 이용할 것이기 때문이다. 

50대 여인 세 명은 왕복 관광에서 최대한 무리가 없는 방법을 이용해야만 한다. 그것이 오래도록 여행을 즐기는 방법이다. 섣불리 저렴한 모험을 강행하다간 즐기는 여행이 아닌 생고생 여행을 해야 한다. 가급적 고생은 젊어서 하는 것이 좋고 노는 것도 젊어 노는 것이 좋다. 나이가 좀 들면, 조금씩 되도록 형편에 맞는 편한 방법이 오래도록 사이좋게 여행을 그리워하게 하는 요령이다. 나는 그것을 내 나이 50이 넘어서야 온몸으로 체득하고 있다. 하물며 언니들이야 오죽하겠는가!


숙소에서 케이블카 정류장까지 도보로 15분. 4시가 넘은 시간이었지만 15분의 걸음에도 땀이 낡은 배관이 터져 새어 나오는 물처럼 얼굴에 흘러내렸다. 늦은 오후에 조금만 걸으면 된대서 휴대용 선풍기도 손수건도 가져오지 않았다. 아무도. 우리는 서로의 '무비유환'을 탓했다. 딱히 다른 도리는 없었다. 


케이블카를 기다리는 줄은 국민학교 운동회 때 사용했던 줄다리기 줄보다 더 길었지만 그래도 빨리 줄어들어서 지루하지는 않았다. 

매표는 키오스크와 사람이 하는 것, 두 종류가 있었다. 우리는 나름 IT강국 출신 코리아에서 왔다고 키오스크 앞에 섰다. 자신 있게 클릭 클릭을 해대며 카드를 넣었다. 그런데 자꾸 에러가 떴다. 뒤에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괜히 눈치가 보였다. 왜 안되지? 서너 번을 시도하자니 우리 뒤에 있던 사람이 패스워드를 치라고 힌트를 주었다. 그러고 보니 키오스크 맨 하단에 카드 비밀번호를 입력하는 번호판이 있었다. 내가 서 있는 곳에서는 보이지 않았다. 뒤 줄에 있는 사람의 눈높이에서는 번호판이 보였던 모양이었다. 나는 쏘리와 땡큐를 남발하여 마침내 키오스크 매표에 성공하였다. 


케이블카는 별다를 게 없었다. 바다 위를 떠 가는 목포 해상 케이블카가 더 길고 더 스릴 있었다. 날씨가 좋고 체력만 된다면 걸어서 오르내리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 하지만 우리는 8월의 가장 더운 여름날, 50이 넘은 여인네 3명이 두브로브니크를 간 것이다. 세 명이 105유로의 돈을 쓰는 것이 가장 편하고 안전한 방법임이 확실했다. 


좌)전망대에서 바라본 풍경  우)케이블카안에서 찍은 로크룸섬과 올드타운 전경


전망대에 도착했다. 사람들로 붐볐다. 일몰을 구경하기에 가장 좋은 자리는 이미 먼저 온 사람들에게 선점을 당했다. 우리는 최대한 케이블카 선이 없는 온전한 저무는 태양 빛을 바라볼 수 있는 자리를 찾아 아프리카의 굶주린 하이에나처럼 자리를 옮겼다. 하지만 그런 자리가 행동이 굼뜬 우리 같은 아줌마들에게 쉬이 내어질 리 만무하다. 


자리를 찾아 방황하는 사이 커플로 보이는 중년의 남녀가 우리에게 말을 걸어온다. 한국인이 거의 없던 전망대여서인지 나름 반가운 체를 한다. 

어디서 오셨어요?, 어떻게 오셨어요?, 자유 여행인가요?

이런 질문이 오고 가고 커플의 여정이 우리 귀에 들어온다. 정녕 원치 않았지만 그들이 먼저 썰을 풀어놓았다. 

"우리는 이태리에서 학회 차 온 대학 교수들입니다. 학회를 마치고 마음 맞는 사람 넷이서 유럽을 좀 둘러보자고 했지요. 밀라노 구경하고 베네치아 갔다가 크로아티아로 건너왔습니다. 자그레브를 거쳐 스플리트를 보고 이제 두브로브니크가 마지막이에요. 이야, 여기 참 좋네요. 유럽에서 렌터카 여행해 보셨어요? 아, 안 해보셨구나. 다음엔 꼭 해보세요. 길도 잘 닦여 있고 운전도 쉬워요. 몸도 편하고요. 자매끼리 보기 좋네요. 다음엔 꼭 렌터카 여행 해보세요. 허허"


그들은 (커플이 아님이 밝혀졌으니 이제 그들이라고 불러야 한다) 렌터카 여행을 강조했지만, 내 귀에는 학회와 교수와 여행이 꽂혔다. 궁금증을 못 이겨 한국 아줌마 오지랖을 부렸다. 

"넷이서 오셨는데 두 분만 계시네요. 다른 분은요?"

"다른 두 사람은 긴 여행에 피곤하다며 오기 싫다고 숙소에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둘만 올라왔지요."


여기서 우리 둘이란, 중년의 남자 교수와 중년의 여자 교수였다. 그런데, 암만 봐도 두 사람은 동료 교수처럼 보이지가 않았다. 우리 세 자매는 당연히 그들이 부부인 줄 알았다. 그런데 동료 교수라고 하니 우리가 드라마를 너무 많이 본 속물인 건지, 그들이 천연덕스러운 건지 헷갈릴 뿐이었다. 

진실은 그날 바다 넘어 사라져 간 태양도 모를 뿐이었다. 


찾아본 여러 블로그에서 케이블카 선이 없는 일몰의 전망을 온전히 즐길 수 있는 뷰 포인트가 전망대 아래로 조금 많이 내려가면 있다고 해서 내가 찾아내려 갔다. 한 3~400미터를 내려갔는데도 블로거가 찍은 포인트를 찾을 수 없었다. 시야에서 사라져 오지 않는 동생이 걱정된 언니들이 보이스톡이 오고 난리가 났다. 

"그깟 뷰포인트 없어도 된다. 여기도 좋으니 여기서 보고 사진 찍고 하자. 욕심내지 말고."


다시 전망대로 올라와서 그나마 좀 호젓한 곳에 자리를 잡았다. 이제 태양이 수평선에 닿을락 말락 하고 있었다. 유일하게 사람이 태양을 정면으로 바라볼 있는 시간, 질 무렵. 

존재를 살아 있는 동안 열심히 알리려고 하는지 어떤지 태양은 빛은 바스러졌지만 바스러진 태양이 내뿜는 빛깔은 온 하늘과 온 바다를 자신의 붉은색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우리는 태양을 바라보면서 자그마한 바위돌에 하나씩 자리를 잡았다. 바다에서 불어온 건지, 스르지산에서 시작된 건지 모를 바람이 내 볼을 애무하고 귀 속에 작은 소용돌이를 만들고 지나갔다. 배관이 터져 새어 나오는 물 같은 땀은 일찍 감치 말라버렸고 그 자리엔 흩날리는 머리카락이 뺨과 볼을 간질이고 있었다. 

 

우리 세 자매는 서로 아무 말이 없었다. 그저 하늘과 바람과 태양과 두브로브니크의 오래된 도시만을 바라보았다. 자연과 도시가 조화로운 속에서 각자의 삶을 돌아보았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서로 씨-익 하고 그저 웃을 뿐이었다. 


내려오는 케이블카를 기다리면서 예의 그 '부부 같은 교수 커플'과 또 마주쳤다. 

다정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학회의 뒤풀이를 나누었을지도 모르겠다. 때때로 웃음소리도 들렸다. 

진짜 부부도 저런 밝은 웃음과 미소를 나누었던가. 머리를 굴려 본다. 동료가 맞겠지. 

요새 우리가 너무 드라마를 많이 봤어. 그래 그래, 그런 거야. 좀 자중해야겠어. 그래 그래.

상상과 소설과 현실을 넘나들면서 우리는 케이블카에서 내려 두브로브니크 올드 타운 플로체 게이트를 막 통과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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