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는 크로아티아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나라이다. 크로아티아는 주변 동, 남, 북쪽에 4개의 나라와 국경을 맞대고 있다. 북쪽에는 류블랴나, 동쪽으로 헝가리와 세르비아가 있고 남인 듯 동인 듯 한 곳에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가 있다.
우리가 가는 곳은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남쪽 끝에 있는 모스타르라는 이슬람 문화 유적지와 모스타르 근처에 있는 작은 나이아가라라고 불리는 크라비체 폭포이다.
종일 10시간 정도가 걸리는 투어라 관광객을 실은 투어버스는 아침 6시 40분에 필레문에서 출발했다. 버스에는 스물다섯 명 정도의 관광객이 타고 있었는데 우리 세 자매와 일본인 여성 두 명이 유일한 아시아 사람이었다.
보스니아 국경까지 가는 두 시간 동안 가이드가 보스니아에 대한 설명을 열심히 해주었다. 전부 다 영어여서 알아들을 수 있었던 말은 30프로나 되었을까. 주된 내용은 유고슬라비아라는 나라가 내전을 통해 여러 개의 나라로 쪼개졌고 그렇게 쪼개진 나라가 크로아티아, 세르비아, 보스니아 등이라는 것이었을 것이다. 보스니아에는 보슈냐크인, 세르비아인, 크로아티아인이 섞여 살고 있는데 종교가 다르고 종교문제를 여전히 가지고 있다는 내용도 포함되었던 것 같다.
우리가 방문하는 모스타르는 보슈나크인이 살고 있는 지역에 있고 이슬람 문화가 영향권으로, 가이드는 손님들에게 함부로 '이슬람'이 어쩌고 저쩌고를 하지 말라는 당부와 크리스천임을 드러내는 행동을 하지 말아 달라는 부탁을 몇 번이나 하였다. 분쟁이 잘 생기진 않지만 가이드로서는 만사불여튼튼이었으리라.
버스를 탄지 두 시간 정도 지나자 어느덧 국경에 도착했다. 국경을 통과하기 위해서 여권을 다 제출했고 가이드가 여권 심사를 받으러 갔다. 대륙으로 연결된 나라가 없는 대한민국 사람으로서는 다소 생소한 풍경이었다. 우리는 다른 나라를 가려면 반드시 비행기나 배를 타야 한다. 버스로 국경을 지나다니, 아무 죄를 짓지 않았는데도 남방한계선 넘어 비무장지대를 지나 금단의 땅을 가기라도 하듯, 혹여 여권이 내 손으로 다시 돌아오지 않을까 봐 버스가 되돌아가기나 할까 봐 마음을 졸였다. 반공을 국시로 삼고 주입식 교육을 받던 버릇이 심사, 군인, 국경이라는 풍경들 앞에서 여실히 나타났다.
한 20분 정도가 걸린 것 같다. 여권을 받고 버스가 출발하기 전까지. 그러고 다시 버스는 두어 시간 가까이 더 달렸다. 사이사이 가이드는 보스니아와 모스타르에 대하여 최대한 느린 영어로 설명을 해주었다. 처음에 귀를 쫑긋 세우고 듣다가 얼마 못 가 창밖으로 시선을 돌려버렸다. "뭐라 하는지 나중에 얘기해 줘"라는 언니의 물음에는 "그거 다 알아서 뭐 하려고. 잠 온다"라며 애써 동시통역의 짐을 내팽개쳤다. 사실은, 내팽개친 게 아니라 내팽개쳐진 것이었지만.
모스타르에 도착했다. 가이드가 바뀌었다. 현지에서는 현지인만 공식 가이드를 해야 하나 보다. 우리나라도 이런 제도는 빨리 도입이 되었으면 한다. 우리도 관광통역가이드라는 직업이 있고 어려운 시험을 거쳐야만 공식적으로 외국인에게 관광을 안내할 수 있지만, 여전히 무자격가이드도 많이 활동하고 있는 실정이다. 관광 경찰도 부족하고 여행사에서는 싼 값에 가이드를 섭외하려다 보니 이런 일이 발생한다.
파리나 스페인이나 유수의 나라들은 해당 국가의 공식 가이드만 설명을 할 수 있게 하거나 현지 가이드를 꼭 대동해야만 하는 법이 꽤 까다롭게 적용되고 있는데 반해, 우리는 관광가이드의 역할을 귀하게 대하는 것 같지 않다. 그냥 대충 안내하고 설명하고 인솔만 하면 되는 정도로만 여긴다고 할까. 외국에 가서 현지 가이드가 설명하는 걸 볼 때마다 업계 종사자로서 아쉬움만 한가득이다.
모스타르는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고 한다. 오스만튀르크 시절 지어진 건물과 다리가 아주 유명하다. 그런데 1992년 유고 내전 때 모스타르 다리가 붕괴되었고 오래된 건축물들이 파손되었는데 2008년이 되어서야 복구하고 복원되었다고 한다. 언덕의 한쪽에는 십자가가 무더기로 서 있었다. 가톨릭을 믿는 크로아티안의 무덤과 이슬람을 믿는 보스니아인들의 무덤이다. 모두 다 유고 내전에서 죽은 사람들이라고 한다.
인간들이 평화와 행복을 위해 만든 것이 종교일 것인데 종교 때문에 반목과 질시와 전쟁이 아직 도처에 있다. 내가 아직 종교를 전적으로 신뢰하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다.
바닥은 온통 조약돌이다. 걸을 때 모양이 삐뚤빼뚤해지지만 눈은 호강이다. 새로운 풍경은 늘 눈과 뇌에 자극을 준다. 좁고 구불구불한 길이 양 옆에 늘어선 기념품 가게와 식당을 사이에 두고 1km 정도 연결되어 있다. 야트막한 오래된 돌집, 우뚝 선 산, 산 밑에 흐르는 네레트바강, 다리 위로 멋들어지게 서 있는 모스타르 다리. 네 시간 버스를 타고 올만한 풍경이다. 쨍한 하늘과 눈이 시릴 정도의 햇빛과 푸르른 산은 카메라를 아무 데나 갖다 대도 작품이 된다. 오직 불협화음을 이루는 건 멋들어진 장관 앞에 서서 포즈를 취하고 있는 나이 든 모델뿐이다. 어디에서 찍어도 풍경을 죽이는 모델은 어디에서 찍어도 아름답다. 날씨와 모스타르 덕분이다.
점심까지 포함해서 두 시간 반을 모스타르에 있었다. 점심은 가이드가 추천한 보스니아 전통 음식으로 골랐다. 어디 메모를 해뒀을 텐데 안타깝게도 이름을 잃어버렸다.
한 상차림으로 잘 나온 점심에는 고기가 든 커다란 빵과 걸쭉한 요거트, 돼지고기 김치말이처럼 보이는 돼지고기 요리와 디저트로 달디 단 대추야자가 작은 접시에 담겨 있었다. 메인 요리는 우리나라 음식과 비슷하게 생겨서 문득 호감이 생겼다. 음식은 좀 덜 매운 국물이 자작한 고기김치말이 딱 그거였다. 가이드의 추천을 기쁘게 여기며 우리는 모든 접시를 싹싹 비웠다.
워)크라비체 폭포 아래)보스니아 전통 음식
나는 여행을 가면 현지에서는 현지 음식을 맛보자, 는 주의다. 그래서 가끔 같이 간 사람들과 갈등이 빚어지는 경우도 있다. 어떤 사람은 여행을 즐기기 위해선 음식이 맞아야 한다며 '아는 맛'만을 찾아다니는 경우가 많다. 이럴 때 내 여행의 원칙은 종종 깨지기도 하는데 갈등을 피하기 위해 '아는 맛'에 동참하기 때문이다. 끝까지 여행이 즐거우려면 새로운 현지 음식보다 동반자와의 원만함이 더 큰 역할을 하는 법이다.
모스타르를 뒤로 하고 버스는 한 시간을 더 달려서 크라비체폭포로 이동했다.
사실 플리트비체를 가고 싶었으나 이번 여행에서 플리트비체를 넣으면 일정에 무리가 많이 갈 것 같았다. 모든 욕심을 부릴 수 없기에 플리트비체를 뺐고, 뀡대신 크라비체라는 닭으로 대신했다.
크라비체는 제주도의 천지연 폭포가 여러 개 있는 느낌이었다. 산속에 있는 폭포 바로 밑에서 그렇게 많은 사람이 수영을 하고, 그렇게나 많은 파라솔과 가게가 영업을 하고, 억수로 많은 테이블과 돗자리가 호숫가에 펼쳐진 광경이 생소했다. 우리는 국립공원, 도립공원으로 정해지면 기본적으로 수영과 취식이 금지되는 게 일반적인데 여기는 그렇지 않은 가 보다. 해운대나 광안리에 피서를 온 것 같은 풍경이었다. 우리가 산속 계곡에 피서를 가는 것과 마찬가지일까?
다리 아픈 언니들은 폭포 초입 벤치에 멈춰 섰다.
"거기 갔다 오면 오늘 내 무릎 아작 난다. 혼자 가서 사진이나 많이 찍고 오너라."
수많은 피서 인파 속에서 혼자서 구경하고 사진을 찍자니 문득 쓸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구경도 누군가와 함께 해야 감흥이 나는가 보다. 나는 아직 고독과 외로움에 적응이 덜 되었나 보다. 크라비체를 눈 안에 쓰윽 담고서 언니들이 있는 벤치로 되돌아왔다.
입구로 되돌아가는 길, 조그만 웅덩이가 있었다.
"우리 저기서 발이라도 담그고 가자."
신발을 벗고 바지를 종아리께까지 걷어 올리고 맑은 웅덩이에 발을 담갔다. 생각보다 물은 차갑지 않았다. 적당한 바위돌만 있었다면 한 반시간 가량 탁족은 무리가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우리에겐 5분의 여유뿐이었다.
5분이라도, 시원한 계곡물에 발을 담그고 사진을 찍고 까르르 거리는 것에 우리는 행복하였다. 길 가던 사람들이 우리를 쳐다보았다. 어느 일행은 우리를 따라 신발을 벗고 옷을 걷어 올렸다. 국적도 모르는 채 발을 벗은 우리는 서로 미소를 교환하였다. 빡빡한 여정 속에 발견하는 소소한 여유, 이것이 돈 들여 시간 들여 여행을 가는 이유일진대, 크라비체 폭포에서 나는 여행의 이유를 알아채고 말았다.
"언니야, 저 밑에 커다란 폭포보다 여기 쬐깐한 개울물이 더 좋다. 언니들, 안 가길 잘했다."
여행의 이유를 언니들에게 발설했다. 언니들은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오후 3시 40분쯤 모두를 싣고 투어 버스는 크라비체폭포를 출발했다. 중간에 휴게소를 한번 들른 것을 빼고는 내리 3시간 정도를 왔던 길을 되짚어갔다. 갈 때는 보이지 않았던 해안가 풍경과 온갖 파란색을 그러데이션 하고 있는 바다도 보았다.
필레문을 통과하고 숙소로 가는 길, 언니는 '아는 맛'을 찾았다.
"우리 숙소 가서 김치찌개 끓여서 밥부터 먹자. 아까 보스니아 매콤한 맛은 사람 애만 태우더라."
"밥 먹고 크로아티아 해산물 요리로 맥주로 한 잔 하자."
'아는 맛'속에 나는 그나마 친숙한 새로운 현지 음식으로 딜을 걸었다. 언니들은 '콜!'이라 외쳤다. 우리는 김치찌개를 향해 발걸음을 재게 움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