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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대택 May 02. 2020

019 중재에 나선 IOC,
완강히 거부하는 KOC

- 1959년, 남북단일팀 구성을 IOC가 중재하겠습니다!

1957년 6월과 12월, 그리고 58년 12월, 북한은 세 차례나 남한에 단일팀 구성을 제안합니다. 북한의 제안을 남한은 여러 이유와 정황으로 피합니다. 북한은 이러한 남한의 외면을 국제올림픽위원회 IOC 사무총장 오토 마이어 Otto Mayer에게 하소연하면서 남한을 다그쳐 달라고 요청합니다. 그러나 KOC는 꿈쩍도 하지 않습니다. KOC가 단일팀 구성에 자발적일 것으로 기대했던 IOC는 남한의 자세에 의문을 품기 시작합니다. 


남한과 KOC의 회피는 ‘한국문제’를 새로운 국면으로 몰고 갑니다. 단일팀 구성에 남한과 KOC는 비협조적이었고 여기에 북한의 재촉은 더욱 강해집니다. 공산국들의 지원도 함께 진행됩니다. IOC는 더 이상 남한에게만 단일팀 구성의 진행을 맡길 수 없는 상황임을 알게 됩니다. 이제는 IOC의 개입이 필요하게 된 것이죠. 


1958년이 IOC가 단일팀 구성을 KOC에 믿고 맡긴 한 해였다면, 59년으로 들어서면서 IOC는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었습니다. 이제 IOC의 적극 개입이 시작됩니다. 1960년 로마올림픽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으니까요. 



단일팀 구성 문제가 뮌헨 총회에서 논의되기를 재촉하는 북한


1959년에 들어서도 여전히 단일팀에 대한 진전은 없었습니다. 북한의 홍명희는 1959년 3월 14일과 20일에 각각 브런디지 (19-1)와 오토 마이어(19-2)에게 편지합니다. 


브런디지에게 보내는 편지에서는 그간 단일팀 구성을 위한 북한의 노력을 설명하고, 후자의 오토 마이어에게 보내는 편지에서는 뮌헨에서 열릴 55차 총회 (1959년 5월 22-27일)에서 이 문제가 상의되기를 요청합니다. 


편지를 받은 오토 마이어는 3월 20일 홍명희에게 답신합니다 (19-3). 오토 마이어는 북한의 요청을 IOC 위원들에게 전달했으며, 남한이 다양한 이유로 어려움을 설명하고 있다고 전합니다. IOC가 최선을 다하고 있지만 정작 남은 일들은 남북이 해결해야 하는 것들임을 명확히 합니다. 남한의 이기붕에게도 편지를 같이 보낼 것이라고도 적습니다. 


홍명희는 4월 2일 다시 브런디지에게 편지하면서 조만간 개최될 뮌헨 총회에서 남북단일팀 문제가 안건으로 상정되기를 요청합니다 (19-4). 


이 편지를 받은 브런디지는 5월 8일 홍명희에게 답신합니다 (19-5). 편지에서 브런디지는 남한이 휴전으로 인해 단일팀 구성이 어렵다고 설명하고 있으며, 남한은 북한이 주장하는 것과 달리 북으로부터 아무런 소식을 받지 못하고 있다고 설명합니다. 



홍콩에서의 남북이 만나도록 주선하자는 IOC 뮌헨 총회 의결


1959년 5월 25일 뮌헨 총회 회의록은 ‘한국문제’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19-6). 


‘불가리아의 스토이체프(Stoïtchev)와 소련의 로마노프(Romanov)가 한국문제를 거론함. 스토이체프는 한반도 상황을 설명하면서, 북한의 노력에 남한이 응대하지 않음을 주지 시키고, 북한에게도 별도의 인준이 필요함을 제안함. 브런디지 회장은 현재까지 진행된 경과를 설명하고, 한반도의 양측이 제3지대에서 회담할 수 있도록 하자고 제안함. 소련의 안드리아노프(Andrianov)는 북한에게 남한과 같은 지위를 부여하고, 제3지대에서 만나 한 팀을 구성해 올림픽에 나올 수 있도록 하는, 브런디지와 스토이체프의 의견을 동시에 만족하는 안을 제시함. 브런디지는 남한이 한 팀을 구성하는데 협조할 의향이 있음을 보여주는 편지를 받았다고 말함. 최종적으로 양측 대표들의 회담을 주선하자고 결론 지음.’ 그리고 ‘브런디지는 홍콩에서 공동회담을 양측에 제안하는 것으로 의결함’


이 회의록은 간단히 이렇게 정리됩니다. 먼저 불가리아와 구 소련의 IOC 위원들은 남북을 따로 떼어 두 선수단을 허용하자고 했습니다. 그러나 브런디지 회장은 여전히 남북 스스로의 협의를 기대하자고 했습니다. 이를 듣던 소련의 안드리아노프 위원은 그렇다면 남북에 같은 지위를 주되, 선수단은 하나로 나오는 절충안을 제안하게 됩니다. 결국 브런디지 위원장은 양측의 회담을 주선하는 것으로 의결하게 됩니다. 



앞으로 남북의 소통은 IOC 사무국을 통하시기 바랍니다!


뮌헨 총회가 폐막된 직후인 1959년 6월 5일 오토 마이어는 한 날 두 개의 편지를 KOC에 보냅니다. 두 편지는 각각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19-7, 19-8). 


‘당신들은 북한올림픽위원회에서 당신들에게 보낸 통신들을 받지 못했다고 얼마 전 우리에게 전했었음. 우리는 그것들을 북한 측에 요청했고 그것들을 첨부함. 이에 대해 응답해 주기 바라며, 로젠으로 3개의 복사본을 보내주기 바람. 한 부는 북한올림픽위원회로 전달될 것임.’


‘최근 뮌헨에서 열린 총회에서 한국의 단일팀 문제가 논의되었음. 남북 양측에서 원칙적으로 단일팀 구성에 대해 승인되었을 것으로 이해하고 있음. 유일한 문제는 양측이 어떠한 소통도 하고 있지 않다는 것에 있음. 우리는 각 측에서 2-3명의 대표를 꾸려, 문제없다면 중립지역인 홍콩에서 만나기를 요청함. 해를 넘기기 전에 이루어지기 바람. 우리의 제안에 의견 바람. 참조, 북한올림픽위원회 평양.’


이 두 편지는 IOC가 남북의 소통로 역할을 하는 동시에 적극적인 만남의 중재자 역할을 하겠다는 뜻이었습니다. IOC는 그간 남한이 북한의 제안을 받지 못했다고 주장하는 것에 대해서도 안전장치를 걸게 됩니다. IOC에 편지를 보낼 때는 복본으로 보내도록 요청한 것입니다. 복사본을 북한에 전달하겠다는 의지였죠. 혹시나 있을 오해나 소통의 차질을 원천적으로 막고 서로로부터의 핑계를 사전에 차단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뮌헨 총회 의결에 근거해 1959년 8월 홍콩회담을 남북 양측에 제안하는 IOC 


북한은 이러한 IOC의 개입과 중재를 환영합니다. 7월 4일 북한은 브런디지에게 다음과 같은 전신을 보냅니다 (19-9). 


‘제55회 IOC 총회에서 한국 단일팀 구성에 대한 결정을 지지하며 북한은 이를 충실하게 이행할 것임.’


뮌헨 총회의 결정과 홍콩 남북회담에 대한 요청 편지를 보낸 지 한 달 후인 7월 7일 오토 마이어는 다시 KOC에 다음과 같이 편지합니다 (19-10). 


‘지난달 당신들에게 보낸 편지에서와 같이 중립지역에서 남북의 대표들이 만나는 것에 대해 북한위원회가 전보를 통해 회의에 대표를 보내겠다고 전해 왔음. 장소는 홍콩으로 하며 8월 중순 이후로 하였음. 북쪽이 동의한 내용에 대해 동의하는지 알려주기 바람. 참조, 북한위원회.’



남북회담의 문제점을 제기하는 KOC


IOC의 8월 홍콩회담 제안을 받은 KOC는 조금씩 입지가 좁아짐을 감지합니다. 그렇다고 이러한 제안을 바로 받아들일 수도 없었죠. 


오토 마이어의 편지에 8월 17일 이상백은 브런디지에게 편지합니다 (19-11). 편지에서 이상백은 다음 IOC 집행위원회가 열리기 전에 오토 마이어와 함께 한국에 방문하기를 요청합니다. 비무장지대를 꼭 봐야 한반도의 상황을 이해할 것이라고도 강조합니다. 


이 편지에 브런디지는 9월 11일 답장합니다 (19-12). 편지에서 브런디지는 한국의 상황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지만 10월에 열릴 집행위에서 한국문제 상정을 피할 수 없을 것이며, IOC 내에서 한국문제 상황이 녹록지 않음을 적습니다. 동시에 브런디지는 이 문제를 바라보는 데 있어 정치의 개입을 경계할 필요가 있음을 언급합니다. 


9월 24일 이상백은 브런디지에게 답신합니다 (19-13). 소련이나 불가리아와 같은 공산국을 경계할 필요가 있으며, 그들이 IOC를 지배하려는 노력을 경계해야 할 것이라고 적습니다. 그리고 로마올림픽에서 KOC가 한반도 유일의 대표이어야 함을 다시 강조합니다. 


이기붕도 이상백과 같은 주장의 편지를 10월 1일 오토 마이어에게 보냅니다 (19-14). 편지에서 이기붕은 지금까지 KOC가 지속적으로 주장했던 내용을 다시 반복적으로 주장합니다. 북한의 제안들이 비현실적이며 KOC가 한반도에서 유일한 NOC이어야 함도 다시 설명합니다. 
 

이기붕은 10월 7일 브런디지에게도 편지합니다 (19-15). 소련이나 불가리아의 위원들이 KOC를 비난하는 이유가 불합리함도 설명합니다. 


남북단일팀을 구성하기 위해 회담을 개최하라는 IOC 총회의 의결과 이를 이행하기 위한 IOC의 제안에 KOC는 매우 불쾌하게 생각했습니다. 이상백과 이기붕은 각자 그러나 같은 내용으로 북한을 비난하고 북을 비롯한 공산국들의 정치적인 행보를 강도 있게 비판했죠. 브런디지는 남한의 포용을 요청했고, IOC와 공산국 위원들이 남북회담을 강력히 요청하는 상황에서 KOC도 뒤로 물러날 수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된 것입니다. 



한국문제에 정치가 드리우고 있음을 감지한 브런디지


여기서 잠시 브런디지의 9월 11일 편지를 다시 찬찬히 들여다볼 필요가 있습니다 (19-12). 편지의 일부를 발췌해 보죠. 


‘... Incidently, some of your Korean diplomats have issued some public statements which are anything but helpful. The more politics that are interjected the worse the situation becomes.’


번역하면 대략 이렇습니다. ‘한국 외교관이 성명을 냈는데 도움이 되었다. 더 많은 정치가 개입될수록 상황은 더 나빠질 듯하다.’ 정도입니다. 


이 문장은 참으로 중요한 의미로 받아들여집니다. 왜냐하면 이상백과 개인적 친분을 넘어 개인사까지 주거니 받거니 하던 두 사람 사이에서 ‘한국문제’에 대해 ‘정치’라는 단어가 사용된 첫 사례이자 편지이고 이것을 브런디지가 언급했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전의 편지 왕래에서 정치 현황과 환경이 주요한 내용인 경우도 많았지만 이는 일반적이거나 타 국가들과 국가 간에 한정된 이야기들이었습니다. 한국문제에 대한 정치적 이야기는 없었습니다. 조심스럽게  브런디지는 이러한 정치적 간섭을 경계한 것이고, 넌지시 이상백에게 상황을 알리고자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상백이 눈치를 챘던 못 챘든 간에 말이죠. 



단일팀 구성 논의 자체를 거부하는 KOC 


IOC의 홍콩회담 주선에도 불구하고 KOC는 다양한 근거와 이유로 이를 여전히 회피합니다. 심지어 총회나 집행위원회의에서 논의 안건으로 상정되는 것 또한 불편하게 생각합니다. 당연히 IOC의 회담 제안에는 응하지 않죠. 답답한 것은 IOC와 북한 측이었습니다. 와중에 10월 2일 파리에서 열린 집행위원회는 한국문제에 대한 별반 소득을 얻지 못합니다. 


오토 마이어는 12월 4일 홍명희에게 편지합니다 (19-16). 10월 2일 파리에서 열린 집행위원회의 결정 사항에 대한 북한의 질문에 답하는 편지였습니다. 오토 마이어는 아무런 결정이 내려지지 않았으며, 내년 2월 샌프란시스코 총회에 상정될 것임을 알립니다. 그리고 IOC는 최선을 다하고 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한의 거부로 일이 진척되지 못함을 안타까워하죠. 


브런디지 또한 12월 3일 이상백에게 편지합니다 (19-17). 편지에서 브런디지는 남한의 사정은 이해하나 북한의 주장도 합리적이어서 빠른 결정이 필요한 시점임을 다시 강조합니다. 


브런디지의 편지를 받은 이기붕은 12월 23일 답신합니다 (19-18). 브런디지의 회장으로서의 입장, 올림픽 정신과 규정, 단일팀 구성의 필요성 등을 모두 이해하지만 북한과의 대화도 없는 상태에서 단일팀을 구성하는 것이 매우 어려움을 다시 역설합니다. 그리고 이번 논의가 연기되기를 바라며 더 이상의 거론을 거부한다고 적습니다. 이기붕과 KOC는 완고하게 한국문제 논의의 거부와 연기를 요청하고 있게 됩니다. 



반전! IOC의 요청을 지연시키라고 조언하는 브런디지이를 받아들이는 이승만


여기서 잠시 이승만 정권의 동향을 살펴보도록 하죠. 


이승만 정권은 IOC에 매우 관심이 높았습니다. 1948년 런던올림픽 참가와 함께 스포츠에 높은 관심을 가진 한국인들의 분위기와도 무관치 않았죠. 1955년 5월에 브런디지가 한국을 첫 방문한 것도, 후에 부통령이 된 이기붕이 브런디지 방문 직후인 6월 파리 IOC 총회에서 우리나라 초대 IOC 위원에 선출된 것도 모두 이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게다가 한반도에서 대한올림픽위원회 KOC를 남한이 쥐고 있다는 것 또한 국제무대에서 북한보다 유리한 위치에 있다는 것임에 명백했습니다. 다만 이승만 정권은 KOC와 IOC에 대한 북한의 도발이 없는 상태에서 굳이 액션을 취할 일은 없었죠. 


그러나 1957년 노동신문을 통한 북한의 단일팀 제안과 북한올림픽위원회의 IOC 인준 노력이 시작되면서 이승만 정권과 KOC는 차츰 이를 주시했고 대응을 마련을 고심했을 것입니다. 이승만 정부의 대응 기조는 시종일관 북한을 무시하고 외면하는 것이었으며, 북한의 제안을 지연시키는 것이었습니다. 이 방법은 최소한 대응 초기에는 비교적 효과적이었습니다. 


1959년 5월 뮌헨 IOC 총회에서 남북단일팀 구성을 촉구하는 홍콩회담 의결은 이승만 정권과 KOC의 대응 자세를 조절하는 계기가 된 듯합니다. 이제부터는 북한만이 아닌 IOC가 단일팀 구성을 요청하고 나서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지금껏 브런치 올림픽 역사를 쓰면서 남한 정권의 이야기를 쓴 적은 없었습니다. 이유는 간단한데 그간의 기록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지금 소개하려는 문건은 아마도 우리나라 올림픽 사료 관련 문건으로는 가장 오랜 것이 아닐까 합니다. 1959-1960년 경무대 자료이며, 몇 페이지 되지 않지만 요번 글과 관련된 내용이라 더욱 관심을 끕니다 (19-19). 내용을 다음과 같습니다. 


1959년 5월 뮌헨 IOC 총회 의결이 있은 직후, 아마도 남북단일팀 구성에 관한 외신 보도가 있었을 것입니다. 6월 5일 외무부 차관 김동조는 경무대 박 비서관(아마도 박찬일)에게 IOC 브런디지가 남북한단일팀 구성을 위해 홍콩에서 회합을 가진다는 외신 보도에 관한 의견을 전합니다. 




[사진 19-1] 김동조 (좌) 당시 외무부 차관, 김용식 (우) 당시 주 제네바 공사



경무대 보고가 있기 전 외무부는 외교관 (아마도 김용식 공사 19-20)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의 전문을 보냅니다. 


‘최근 IOC 위원장 브런디지가 오는 1960년 로마올림픽에 남북한 단일팀을 구성하기 위해 홍콩회담을 제안했다는 보도가 있었음. 스위스 로젠의 IOC를 찾아가 브런디지에 문의바람. 1. 보도가 옳은지, 2. 사실이면, 그러한 시도를 중단해 주기를. 왜냐하면 KOC는 이를 완강히 거부하고 있으며, 현 상황에서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임. 이것이 KOC를 돕는 길이며, 북한이 어떠한 경우에도 IOC에 발을 디디지 못하도록 부탁하기를 바람. 브런디지와의 만남을 바로 보고하도록 바람. 외무부.’


이에 6월 6일 김용식 공사는 이승만에게 편지합니다. 요약한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제네바에서 이승만 대통령에게. 브런디지와 접촉했으며 바로 날 만나고 싶다 하여 6월 4일 오전 11시 Hotel Regina에서 그를 만나 45분간 얘기 나눔. 1. 언론보도에 대한 사실 여부에 대해 브런디지 말은, 언론보도는 사실이고, IOC는 남북이 따로 나오는 것을 원치 않고, 이기붕에게도 사전에 알렸고, KOC는 강력하게 반대했고, 이번 결정은 정치적 목적이 아니며, 한 팀으로의 참가는 IOC의 의중이라고 함. 이번 결정이 최종의 결정인가를 물은 것에 대해 1960년 2월 미국에서의 동계올림픽 때 최종으로 결정될 것이고, 양측에 통보될 것이고, 홍콩에서 회담하도록 제안할 것이고, 남측이 수용하지 못하면, 1960년 샌프란시스코 회의에 상정될 것이라 함. 나는 이 생각을 강력하게 반대함을 반복함. 2. 비밀을 전제로 한 그의 조언은, IOC가 서울에 요청 편지를 보내면, IOC가 이 문제에 대해 빠른 결정을 내릴 수 없도록 남한이 즉각적인 답신을 하지 말고 지연 전략을 쓰라고 했음. 3. 이 상황에서 우리 정부가 모든 자유국의 국가올림픽위원회 NOC를 통해 우리를 지지해줄 것을 즉각적으로 요청함.' 




[사진 19-2] 주 제네바 공사 김용식이 이승만 대통령에게 보내는 남북단일팀 구성과 관련한 브런디지와의 면담 보고서 (19-19 참조)



브런디지를 만난 김용식의 보고는 이후 이기붕과 이상백의 편지에서 의도하는 지연책에도 고스란히 나타납니다. 그리고 외무부는 각국의 외교라인을 통해 각 NOC가 한국을 지지하도록 작업을 시작합니다. 한국 스포츠 역사에서 외교력을 동원해 북한과의 외교전에 돌입하게 된 사례가 시작됩니다. 이 내용은 다음 편에 쓰도록 하겠고요. 


여하튼 6월 초 오토 마이어가 KOC에 보낸 홍콩회담 의결 통보와 제안은 남한 정부로서는 이미 대응 방식이 정해진 이후가 되고 말았습니다. 오토 마이어의 편지와는 무관하게 이승만 정권과 KOC에게는 보다 적극적인 지연 방법을 이미 결정하고 IOC의 편지만을 기다리고 있던 형국이 되었죠. 


브런디지가 9월 11일 이상백에게 보낸 편지도 그러합니다. 김용식을 만났던 브런디지는 이후 한국 외교관의 언론 노출이 점차 남한의 정부 개입이 가시화됨을 느꼈을 것입니다. 주목할 것은 브런디지가 남한에 지연책을 제안하기는 했어도 단일팀 구성 자체를 거부하라고 한 적은 없었다는 점입니다. 이제부터는 더욱 복잡한 게임이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인용 자료



(19-1) 홍명희가 브런디지에게 보내는 편지 (1959. 3. 14.) Brundage Collection, North Korea Olympic Committee, Olympic Studies Center, 로젠, 스위스. 


(19-2) 홍명희가 IOC에 보내는 편지 (1959. 3. 20.) Brundage Collection, North Korea Olympic Committee, Olympic Studies Center, 로젠, 스위스. 


(19-3) 오토 마이어가 홍명희에게 보내는 편지 (1959. 3. 20.) Brundage Collection, North Korea Olympic Committee, Olympic Studies Center, 로젠, 스위스. 


(19-4) 홍명희가 브런디지에게 보내는 편지 (1959. 4. 20.) Brundage Collection, North Korea Olympic Committee, Olympic Studies Center, 로젠, 스위스. 


(19-5) 브런디지가 홍명희에게 보내는 편지 (1959. 5. 8.) Brundage Collection, North Korea Olympic Committee, Olympic Studies Center, 로젠, 스위스. 


(19-6)  CIO, Minutes of the 55th session of the IOC in Munich, ‘Comité International Olympique - Session et CE – 1894-2013’, ‘Archives CIO Consultation Hard Drive’, OSC, Archive, IOC, Lausanne.


(19-7, 19-8) 오토 마이어가 KOC에 보내는 편지 (1959. 6. 5.) Brundage Collection, KOC-01, Olympic Studies Center, 로젠, 스위스. 


(19-9) 북한올림픽위원회가 브런디지에게 보내는 전신 (1959. 7. 4) Brundage Collection, KOC-01, Olympic Studies Center, 로젠, 스위스. 


(19-10) 오토 마이어가 KOC에 보내는 편지 (1959. 7. 7.) Brundage Collection, KOC-01, Olympic Studies Center, 로젠, 스위스. 


(19-11) 이상백이 브런디지에게 보내는 편지 (1959. 8. 17.) Brundage Collection, Lee, Dr. Sang Beck, 1946-1966, Olympic Studies Center, 로젠, 스위스. 


(19-12) 브런디지가 이상백에게 보내는 편지 (1959. 9. 11.) Brundage Collection, Lee, Dr. Sang Beck, 1946-1966, Olympic Studies Center, 로젠, 스위스. 


(19-13) 이상백이 브런디지에게 보내는 편지 (1959. 9. 24.) Brundage Collection, Lee Ki Poong 1955-60, Olympic Studies Center, 로젠, 스위스. 


(19-14) 이기붕이 오토 마이어에게 보내는 편지 (1959. 10. 1.) Brundage Collection, Lee Ki Poong 1955-60, Olympic Studies Center, 로젠, 스위스. 


(19-15) 이기붕이 브런디지에게 보내는 편지 (1959. 10. 7.) Brundage Collection, Lee Ki Poong 1955-60, Olympic Studies Center, 로젠, 스위스. 


(19-16) 오토 마이어가 홍명희에게 보내는 편지 (1959. 12. 4.) Brundage Collection, North Korea Olympic Committee, Olympic Studies Center, 로젠, 스위스. 


(19-17) 브런디지가 이상백에게 보내는 편지 (1959. 12. 3.) Brundage Collection, Lee Ki Poong 1955-60, Olympic Studies Center, 로젠, 스위스. 


(19-18) 브런디지가 이기붕에게 보내는 편지 (1959. 12. 23.) Brundage Collection, Lee Ki Poong 1955-60, Olympic Studies Center, 로젠, 스위스. 


(19-19) Rome 올림픽 남·북한단일팀 구성 1959-1960, 자료 번호 (L-0002-03) [1261] [757.1], 경무대. 1960. 국립외교원


(19-20) 김용식, 당시 주 제네바 공사 또는 주 프랑스 공사. 1957년 5월 제3대 프랑스공사관에 김용식을 공사로 임명했으며, 1959년 6월 초대 주 프랑스대사관 대사로 정일권을 임명함으로 공사는 소환되고 대사가 신임장을 받음. 대한민국외교사료해제집 1949-1959. 대사파견-프랑스. 59-006. MF 번호 B-1/1419-1450(32p), 1959. 



표지 설명


1959년 뮌헨 IOC 총회의 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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