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60년, 단일팀 논의 연기에 외교력을 동원한 이승만 정부
지금까지 여정을 보자면
◯ 1957년 북한의 IOC 조건부 인준
◯ 1958년 북한의 남북올림픽단일팀 구성 제안
◯ 1959년 5월 뮌헨 IOC 총회에서 남북한의 홍콩회담 주선 의결
◯ 그리고 이 기간 동안 남한과 KOC의 지속적이고 의도적인 북한 접촉 회피.
그러나 남한과 KOC는 ‘한국문제’에 대해 회피만으로 일관할 수는 없었습니다. 상황이 변하고 있었으니까요. 특히 59년 뮌헨 IOC 총회의 결정은 남한과 KOC가 무엇이든 보다 명료하고 적극적으로 대응할 것을 주문했던 것입니다. 59년 뮌헨 총회 직후, 이 소식을 접한 이승만 정권은 곧바로 김용식 주 제네바 공사에게 브런디지를 만나 상황을 파악하고 우리 정부의 입장을 전하라고 지시합니다.
김용식을 만난 브런디지는 IOC가 남북단일팀으로 올림픽에 출전할 것을 요청하고 있음을 확인해 줍니다. 또 브런디지는 비밀을 전제로, IOC 사무국으로부터 의사결정 요청 통신이 오는 경우 즉각적인 답을 피하고 지연 전략을 쓰라고 합니다. 김용식은 보고서 마지막에 우리 정부가 각국의 국가올림픽위원회 NOC를 통해 KOC를 적극 지원해 줄 것을 요청해달라고 이승만 정부에 제안합니다.
이 보고서는 경무대에서 즉각적으로 실행됩니다. 이기붕과 이상백은 브런디지와 IOC에 남북단일팀 구성을 위한 북한과의 만남은 물론이고 이 문제 자체를 언급하는 것조차 불쾌한 것으로 대응합니다. 이승만 정부는 각국의 대사들을 통해 주재국의 NOC와 접촉하도록 합니다.
이승만 정권의 한국문제 관련 활동은 국립외교원의 59-60년 경무대 자료에서 나타납니다. 1959년 9월 3일 이승만은 김영기 장관 (20-1)에게 이탈리아 정부가 자국의 IOC 대표단에게 한국의 단일팀 구성 문제에 대해 우리 입장을 지지할 것을 지시했다고, 임 대사 (Ambassador Lim)로부터 연락받았다고 (여기서 임대사는 임병직 주 UN대사로 추정됨) 통지합니다 (20-2).
1960년 1월 31일 당시 프랑스 대사 정일권은 당시 프랑스 IOC 위원이었던 (이후 프랑스 NOC 회장 1967-1971, IOC 부위원장 1970-1974) 콩트 드 보몽 Conte de Beaumont에게 편지합니다. 정일권의 편지는, 60년 2월 15-16일에 샌프란시스코에서 개최되는 IOC 총회에서 60년 로마올림픽 한국 단일팀 참가 문제가 논의될 것이나, KOC는 이를 강력히 반대하며, 북한 괴뢰 정부가 남한을 전복시키려 하고 독일과는 상황이 다르니 우리의 요청에 귀를 기울여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2월 1일, 외무부는 다음과 같은 전문을 띄웁니다.
‘북괴는 IOC에 참여하기를 주장하고 있는 바, 정부와 KOC는 IOC와 회원국에 이를 명확히 반복적으로 반대해왔음. 이유는 1. 아직 전쟁 중임, 2. 남한위원회가 남북선수 모두를 관할함, 3. 한국에서는 KOC가 유일한 팀이고 대표임. 현재 북괴의 점령으로 북을 관할하지 못하고 있는 것임. 앞으로 이 문제와 관련하여 해당국 정부, 해당국 NOC, 또는 IOC와 교섭이 가능하면 즉시 접촉하여 우리를 지지해 줄 것과, 이 문제 거론을 중단하며, 이를 남한 정부와 KOC에 맡겨줄 것을 요청하기 바람.’
이 전문에 대해 한규영 제1비서관 (프랑스 대사관 비서관으로 추정)은 외무부 장관에게 다음과 같이 보고합니다.
‘2월 2일, 프랑스올림픽위원회 위원장이며, IOC 부위원장인 아흐멍 마싸흐 Armand Massard와 그의 사무실에서 면담. 위 전문의 지시에 근거해 설명함. 그는 프랑스 대표로 한국 입장을 지지하나, 부위원장으로서 개별 위원의 의견 개진이 끝날 때까지 중단시킬 수 없었다고 함. 그러나 한국의 노력을 알고 있으며 IOC 개개 위원 설득에 최선을 다하라고 제안함. 콩트 드 보몽 Conte de Beaumont는 그의 일정 때문에 만나지 못하였으나 마싸흐 Massard를 통해 우리의 입장에 전적으로 동의해 주길 요청하는 메모를 전달함. 두 위원의 입장은 동일함. 다음 국가의 NOC에 지지를 요청하는 메모를 보냄. 네덜란드, 벨기에, 모나코, 포르투갈, 스페인.’
한규영은 위 내용을 2월 14일에 이승만 대통령에게 보고합니다.
59년 말부터 60년 초까지의 이승만 정부의 외교활동과 함께 KOC도 단일팀 구성과 관련한 사안이 IOC에서 거론되는 것을 막기 위한 활동에 가세하기 시작합니다.
1960년 2월 4일 KOC는 브런디지에게 편지합니다 (20-3). 2월에 샌프란시스코에서 개최될 총회에서 17번 안건인 한국문제가 의제로 상정되지 않기를 바란다는 내용이었습니다. 한국전 정전협정에 의하며, 48년 런던올림픽 이후 우리 선수단의 거의 반이 북한 출신 선수이고 한국문제는 통일되면 자연스레 해결될 것이라고 강조했습니다.
이어 2월 8일 이기붕은 브런디지와 IOC 위원들에게 편지합니다 (20-4). 브런디지에게는 KOC를 도와줄 것을, 위원들에게는 한국 질문의 논의를 중단해 줄 것을 요청합니다. 특히 북한의 정치적 이용과 독일과의 상황이 다름을 강조합니다.
같은 날 2월 8일, 이상백도 브런디지에게 편지합니다 (20-5). 이상백은 자신의 건강과 업무로 참석하지 못하지만 샌프란시스코 총회에서 브런디지의 관심과 노력을 기대하고 의존하고 있다고 적습니다.
IOC 56차 샌프란시스코 총회는 1960년 2월 15, 16 양일간 개최됩니다. 총회 회의록은 한국문제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20-6).
‘브런디지가 한국의 상황을 설명하고, 위원들은 한국의 상황을 잘 이해하고 있으며, 전쟁 전 서울에 위치한 위원회에 한반도 전체를 대표해 인준하였으나 현재는 북과 소통이 없는 상태임. 홍콩에서 IOC 대표를 두고 양측 회의를 제안했고, 북은 동의, 남은 거부했음. 북이 인준을 요청했고 스토이체프가 지지했지만 회장 브런디지는 이미 내부 업무만 관장하도록 인준된 상태임을 언급함. 결국 로마 총회에서 이 문제를 다루기로 함.’
1960년 2월 23일 브런디지는 이기붕에게 한국 질문에 대한 논의가 로마올림픽까지 연기되었음을 알립니다 (20-7). 이에 대해 이기붕은 브런디지에게 한국 질문에 잘 대처해 준 것에 감사의 답신을 보냅니다 (20-8).
이기붕이 IOC 위원으로서 브런디지와 왕래한 편지는 이것이 마지막이 됩니다. 이 편지 왕래 후 2달여 만에 이기붕은 생을 마감하고 이승만 정권은 붕괴합니다. 4·19 학생의거가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이승만 정권의 붕괴는 ‘한국문제’를 새로운 국면으로 끌어갑니다.
남한 정부는 각국의 NOC와 IOC 위원들을 개별적으로 접촉하여 설득하는 동시에, 이기붕과 이상백을 통해 브런디지와 IOC도 설득하고 있었습니다. 1960년 2월 1일 오토 마이어가 브런디지에게 보낸 메모에도 이러한 정황이 나타납니다. 메모는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20-9).
‘제네바에 있는 한국대표부 관료를 만났음. 그는 당신을 제네바에서 작년에 봤다고 했음. 샌프란시스코에서 어떤 일들이 벌어질 것인지 알고 싶어 했으며 한국문제가 논의될 것이라 들었다 했음. 아마도 이기붕 위원이 그를 제네바에 오게끔 요청한 것으로 보임. 그는 KOC가 한국 전체를 대표하도록 인준된 것을 확인했고 북한이 인준되어서는 안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음. 만약 북한이 인준되면 로마올림픽에 참가하지 않을지 모름. 나는 로마에서 한국문제가 논의될 것임을 말했고, 어떠한 결과가 나올지 모르겠다고 했음. 남한은 지금까지 만족할만한 것들을 보였으며 인준에 대해 더 이상의 의문은 없다고 말했고 그는 기뻐했음.’
여기서 제네바의 한국대표부 관료는 아마도 김용식 주 제네바 공사일 것으로 보입니다. 남한 정부는 KOC의 확실한 위상을 확인하고 싶어 했으며 북한과 공산국들이 KOC의 인준, 그러니까 1947년 예비 인준(provisional recognition)과 그 조건을 근거로 인준을 박탈해야 한다는 논리에 맞서고 싶어 했던 것이었죠.
이 내용은 남북단일팀 구성을 회피하는 KOC를 두고 공산국 위원들의 KOC 자격 문제를 거론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합니다. 1959년 5월 IOC 뮌헨 총회를 기점으로 북한과 공산국들의 단일팀 구성 요청은 더욱 강력히 제기되었던 것입니다. 만약 KOC가 IOC 의결을 받아들이지 않거나 못하면 KOC의 자격 자체를 박탈해야 한다는 말이 돌았기 때문입니다.
1959년 10월 7일, 이기붕이 브런디지에게 보내는 편지의 일부에서 이 상황이 나타납니다. 내용은 이렇습니다 (20-10).
‘... 우리가 듣기로는 러시아 올림픽위원회 위원장 Constantin Andrianov와 불가리아 올림픽위원회 위원장 Vladimir Stoitchev 가 동시에 IOC 집행위원이 되면서 KOC가 IOC 규정을 이행하지 않았으므로 IOC로부터 제명되어야 한다고 말했다는 소식을 들었음. 이는 참으로 안타까운 일임. 이러한 언사는 IOC의 정신과 규칙을 어기는 것임. KOC는 모든 임무를 충실히 수행하고 있으며, 어떠한 규칙을 어긴 적도 없었음....’
남북단일팀 구성을 회피하는 KOC가 자격을 잃어가면서까지 회피나 지연술을 쓸 수는 없었을 테니 남한 정부와 KOC는 이 상황을 파악하고 문제가 없음을 확인하고 싶었던 것은 당연했던 것이죠.
(20-1) 김영기는 1957년 7월 주이탈리아 공사관 공사로 임명, 1959년 4월 대사관으로 승격되면서 주이탈리아 초대 상주대사로 1959년 10월 신임장을 받음. 대한민국외교사료해제집 1949-1959. 대사 파견-이탈리아. 59-008. MF 번호 B-1/1486-1555(70p), 1959.
(20-2) Rome 올림픽 남·북한 단일팀 구성 1959-1960, 자료 번호 (L-0002-03) [1261] [757.1], 경무대. 1960. 국립외교원
(20-3) KOC가 브런디지에게 보내는 편지 (1960. 2. 4.) Brundage Collection, KOC-01, Olympic Studies Center, 로젠, 스위스.
(20-4) 이기붕이 브런디지와 IOC 위원에게 보내는 편지 (1960. 2. 8.) Brundage Collection, Lee Ki Poong 1955-60, Olympic Studies Center, 로젠, 스위스.
(20-5) 이상백이 브런디지에게 보내는 편지 (1960. 2. 8.) Brundage Collection, Lee, Dr. Sang Beck, 1946-1966, Olympic Studies Center, 로젠, 스위스.
(20-6) CIO, Minutes of the 56th session of the IOC in San Francisco, ‘Comité International Olympique - Session et CE – 1894-2013’, ‘Archives CIO Consultation Hard Drive’, OSC, Archive, IOC, Lausanne.
(20-7) 브런디지가 이기붕에게 보내는 편지 (1960. 2. 23.) Brundage Collection, Lee Ki Poong 1955-60, Olympic Studies Center, 로젠, 스위스.
(20-8) 이기붕이 브런디지에게 보내는 편지 (1960. 3. 2.) Brundage Collection, Lee Ki Poong 1955-60, Olympic Studies Center, 로젠, 스위스.
(20-9) 오토 마이어가 브런디지에게 보내는 메모 (1960. 2. 1.) Brundage Collection, KOC-01, Olympic Studies Center, 로젠, 스위스.
(20-10) 이기붕이 브런디지에게 보내는 편지 (1959. 10. 7.) Brundage Collection, Lee Ki Poong 1955-60, Olympic Studies Center, 로젠, 스위스.
정일권 (1917-19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