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 생활 22년. 참 길고도 힘든 시간. '결혼은 해도 후회, 안 해도 후회'라는 말이 있지만 지금이라면 후자를 선택할 것이다. 어느 날 미국에 있는 친구에게 연락이 왔다. "Hi~~ Celilne, 요즘 잘 지내고 있어" "Alway i'm Fine" 그는 나에게 급히 질문을 쏟아부었다 "셀린, 요즘 너를 가장 괴롭게 하는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해?, "너의 인생에서 사라지길 원하는 것은 무엇이야?", "셀린, 너의 정신이 건강해지기 위해서 너는 너 자신에게 무엇을 해 주고 싶니?" 나는 이 질문에 정신이 아득해졌다. '나 자신이 행복해지기 위해 나에게 무엇을 해 주어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을 단 한 번도 던져본 적이 없었다. 아니 던질 여력이 없다는 것이 더 맞는 핑곗거리가 되는 것 같다. 22년의 시간 동안 '나와는 너무도 다른 그'. '나의 말을 늘 무시하던 그'. 시간이 흐를수록 나는 사랑이 무섭고 사람이 두려웠다. 친구의 여러 질문들을 받은 그 하루는 나에게 길고도 힘든 하루였다. 그러나 어느 순간 나는 답을 꼭 찾아야 하는 건가? 하는 역질문이 들었다. '그래! 인간은 누구나 모두 마음속에 두려움을 안고 산다잖아' 그렇게 자위를 해야 했었다.
<석탄을 운반하는 여성 광부>
나는 공황장애와 불안증 그리고 경계성 성격장애를 앓고 있다. 어느 날 문득 가슴이 뛰기 시작하며, 숨을 쉬기 곤란하다가 하늘이 빙글 돌더니 그냥 길거리에서 쓰러지고 말았던 것이다. 이것을 시작으로 결국 퇴행 현상(5살 어린아이)까지 일어나 예술가들의 자서전에서만 읽던 그 '정신병원'이라는 곳에 내가 있었다. 병원에 들어서자 까미유 끌로델과 길거리에서 행려 병자로 죽어간 나혜석의 모습이 나와 병치되며 당시에는 슬픔이 가득 밀려왔었다. 그 동안 열심히 살아왔는데, 사회에 잘못한 것이 없는데 그리고 누구보다 사회의 정의와 봉사에 앞장섰던 내가 왜 이러한 곳에 있어야 하는가? 하며 사회의 탓만 했었다. 격리 병동이 나의 자리였다. 입원 시 몇 번의 자살시도. 그리고 자해. 그런 사이 여러 가지 검사를 한 후 20여 일 만에 퇴원을 하였다. 그 이후 글을 한 줄도 읽을 수 없었으며, 약의 부작용으로 몸무게는 13Kg이나 늘었다. 그토록 좋아하던 그림도 단 1분을 집중하지 못한 채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뇌의 기능 저하와 약 부작용으로 인해 인간다운 삶을 누리기엔 너무도 먼 나라의 타인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나는 대학원에서 서양과 동양 미술사를 모두 전공하였다. 나름 큐레이터로써 열심히 일했었고, 미술 칼럼도 쓰며, 때때로 미술에 대한 강의도 나가던 소위 잘 나가는 그런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결혼 후 22년 동안 내 자신을 단 한 번도 드러내지 못했었다. 이러한 내게 이전의 화려한 사회적 잣대의 조건들이 무슨 필요가 있는 것인가? 그래서 서울을 떠났다. 나의 사랑 반려견 감자 그리고 쿠키와 함께.
지금 나는 행복하다. 어느 날 공황이 나에게 찾아와 말을 건넸기 때문이다. "셀린, 넌 살아야 해!!!", "넌 누구보다 강한 사람이었어", "셀린 너는 지금 마음이 아픈데 왜 참고 있는 거니?" 공황이 나에게 말을 건네지 않았다면 지금쯤 천국 나라의 시민이 되어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공황이 나에게 말을 건넨다는 것은 바로 내가 살아야 한다는 무의식의 표현이라고 클라우스 베른하르트는 책에서는 말했다. 그래서 나는 공황에게 고맙게 생각한다. 공황이 나의 뇌에 신호를 보내주지 않았다면 지금 어떤 모습으로 자리하고 있을까?며칠 동안 내게 질문을 했던 미국 친구와 <어느 날 갑자기 공황이 찾아왔다/클라우스 베른하르트 저/2019/흐름출판> 이 책이 아니었다면 영원히 나를 돌아볼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오늘도 가슴에 이러한 말을 새긴다.
"사랑해라 나를"
고흐는 자신의 작품이 팔리지 않아 너무도 많은 고민에 빠져 있었다. 그의 주위 사람들은 그를 미치광이라고 비난하며 화가로서 인정해 주지 않았다. 그리고 주치의였던 정신과 의사 폴 가셰 박사마저도 그의 그림에 대해 질투?를 느꼈을 정도이니 고흐를 이해하는 이는 자연스럽게 지구의 만물인 자연과 동생 테오뿐이었다. 자연 속에서 그림을 그리며 자신의 온갖 정신적 갈등을 표현하며 쏟아부었던 고흐. 그리고 그는 주위의 사물을 깊이 들여다보기 시작했으며, 그곳에서 사물과 인간과의 본질적 관계를 이해하기 시작했다. 나는 지금 고흐와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작은 도시의 따분한 생활에 적응하며, 나를 힘들게 했던 모든 것에서 벗어나 조금씩 고흐와 같은 눈길로 사물을 이해하고 있다. 고흐의 <석탄을 운반하는 여성 광부>들과 같이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내면에 무거운 더께가 싸여가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누군가는 그것을 잘 이해하겠지만 또 다른 누군가는 나와 같이 그 더께를 견디지 못해 쓰러질 수 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림 속 여인들은 살기 위해 무거운 석탄을 나르고 있지 않는가? 우리는 삶을 견뎌낼 수 있는 힘이 누구나 내면에 있다. 지금 나는 <세 켤레의 구두>의 주인처럼 고된 노동후 지친 나의 영혼을 달래는 중이다. 아마 고흐도 자신에게 따듯한 말을 건넸다면 생을 그리 마감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는 소문처럼 자살한 것이 아닌 동네의 미친 소년이 쏜 총에 맞았지만, 끝내 그 사실을 숨기고 삶을 마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세 켤레의 구두 1886년>
Dear My friend, Thank so much. 네가 그날 나에게 그러한 질문을 하지 않았다면 나는 사회와 인간관계만을 탓하며 영원히 나 자신에게 말을 걸 수 없었을 거야. 우리에겐 한국에서 만날 날이 점점 다가오고 있지?
지금도 약 부작용으로 인한 뇌기능 저하를 극복하며 이제 책을 읽기 시작했다. 겨우 글자와 글자가 연결되어 문장으로 이해하기 시작한 지 한 달 남짓 되었다. 나의 글이 독자들에게 어떤 모습으로 전달될지 매우 조심스럽다. 그리고 브런치가 세상과 소통하는 유일한 통로가 되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