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I SEE YOU.' '나는 당신을 봅니다.' 이처럼 아름답고 로맨틱한 말이 또 있을까? 2009년 제작된 영화 아바타의 대사 중 한 마디다. 모든 사람들이 이 말을 한 번쯤은 들어봤을 것이다. 그러나 'I SEE YOU'라는 말에는 로맨틱함만 있는 것이 아니다. 나는 당신을 본다. 즉 지켜본다. 어찌 보면 상대를 믿지 못하는 불확실성의 심리에서 나오는 역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다. 사람과 사람이 믿는다는 것, 그것처럼 아름다운 일이 있을까? 인간은 누구나 가면을 쓰고 살아간다. 어떤 날은 나를 조금 숨길 수 있는 아주 작은 가면, 때로는 나를 완전히 숨길 수 있는 아주 큰 가면을 쓰고 철저하게 자신을 숨기는 행위를 하며 살아간다.
나는 'I SEE YOU'라는 말을 듣는 순간 온몸에 전율이 일어났다. 어떻게 다른 종족끼리 저러한 말을 할 수 있을까? 그러나 생각해 보면 그러한 말을 했던 근거는 바로 마음과 마음의 연결에서 나오는 결과물인 것이다. 인간의 감각은 삶의 경험으로 인해 순식간에 상대의 감정을 본능적으로 알아챈다. 그러나 그 감정과 본능이 더딘 이도 분명 있을 것이다. 경험과 본능에서 나오는 상대와의 신뢰 그것이 바로 믿음인 것이다. 나는 사람을 잘 믿지 않는다. 여러 번의 인간관계에서 이미 많은 상처를 받았기에 나도 모르게 상대에게 무의식적 방어기제가 작동하는 탓이다. 그러므로 나는 예민한 사람이다. 그 예민함이라는 무기로 가끔은 상대의 심리를 뻔히 알면서도 그 속임수에 속아 넘어가 준다. 상대에게서 내가 잃는 것 이상의 감정을 얻었을 때가 그러한 경우이며 그것은 물질적인 손해보다는 감정의 이익을 더 중요시하는 성격 때문이다. 그렇다고 나의 물질적인 손해의 크기가 너무 클 경우는 절대 그러한 행동을 하지 않는다.
믿음깨지는 순간을 신뢰를 읽었다고 표현한다. 인간관계에서 그 신뢰가 깨졌을 경우 나는 한순간에 완전히 무너지고 일어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이제는 나 스스로를 위해 상대의 심리를 알면서도 적당한 손해는 감수하기로 했다. 그러한 일이 빈번한 것은 아니지만 나를 지키기 위한 방법 중 하나로 선택할 수밖에 없다. 돌아보면 사람의 신뢰에 대한 나의 무지?의 탓도 있다. 그래서 나는 생각한다. 나에겐 언제쯤 영화 아바타의 대사 'I SEE YOU'라는 말이 다시 로맨틱하게 들릴 수 있을까?
<개에게 겁먹은 여자/램브란트/1636/18x15cm/종이에스케치>
나는 반려견과 함께 살고있다. 그것도 두 마리. 종종 사람들에게 반려견을 우리 아기라고 표현한다. 우리 아기들은 나에게 마음의 상처를 주거나 해치려 하지 않는다. 그것은 바로 우리 아기들과 나와 연결된 마음과 마음의 신뢰가 있기 때문이다. 램브란트의 <개에게 겁먹은 여자>는
거리를 떠도는 개에게 지금 어린아이가 위협을 받고 있는 상황이다. 엄마는 너무도 놀라 아이를 안고 있다.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개는 어린아이를 헤치려는 듯한 모습이다. 상대를 맹목적으로 공격하는 그림 속 개의 공포를 엄마와 아이는 너무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모녀는 지금 몸을 움직일 수 없는 상태이다. 개의 공격을 알면서도 두 모녀가 지금 할 수 있는 행위는 아무것도 없다. 누군가 목적을 가지고 나에게 접근하여 내가 벗어나지 못하는 경우가 생긴다면 아마도 램브란트의 그림과 같은 모습이 아닐까? 현실을 인정하며 그저 마음속으로 이렇게 말할 것이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마치 그림 속 모녀와 같은 모습으로.
<장님 소녀 The Blind girl/존에밀리밀레이/1854-56/81x62cm,/Oil canvas/버밍엄미술관>
지금 너른 들판에 두 소녀가 앉아있다. 그녀들은 서로를 의지한 채 함께 안고 있는 모습이다. 언니는 앞을 보지 못하고 동생은 그러한 언니에게 따듯이 몸을 기대고 있다. 그녀들은 두 눈을 감고 감각으로만 세상을 느끼고 있다. 앞을 보지 못하는 언니는 세상 즉 자연의 아름다움을 오직 소리로만 충분히 느끼고 있는 것이다. 하나의 감각을 상실하면 다른 감각이 고도로 발달한다. 그만큼 그 감각이 주는 깊이는 깊고도 깊은 감각일 것이다. 세상의 공포를 단절시킨 그녀들은 들판 뒤의 쌍무지개가 상징하는 무한한 기쁨과 행복 그리고 희망이 자신에게 다가온다는 것을 감각으로 느끼고 있을 것이다. 나는 두 소녀처럼 살고 싶다. 세상에 눈을 감고 알면서도 모른 척 그렇게 적당히 타협하며 때로는 바보스러울 만큼. 그러한 세상의 이치를 깨닫는 데는 많은 것을 잃고 난 지금에서야 비로소 느끼게 된 것이다. 아니 그렇게 살아가지 않으면 또 무너질 것임을 잘 알기에 나 스스로 타협한 것이다. 그러한 삶을 살아가다 보면 나에게도 저 넓은 들판 뒤에 뜬 쌍무지개처럼 행복과 희망이 오지 않을까? 하는 기대와 함께 오늘을 또 살아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