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학교를 마친 후 덜렁이는 신발주머니를 공중으로 휘휘 저으며 집으로 발길을 옮긴다. 간혹 길거리에 핀 꽃을 바라보거나, 하늘의 움직이는 구름이 신기해 몇 시간씩 그것을 혼자 즐기다가 시간이 흐르는 줄도 모르고 집으로 향해야 한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을 때가 종종 있었다. 그럴 때마다 나를 기다리던 엄마는 자신만의 걱정을 담아 나의 작은 등에 등짝 스매싱을 날리곤 하였다. 그 아픔을 견디지 못해 울음을 터트리면서도 그러한 일들은 늘 반복되어 왔었다. 재미있는 사실은 이런 이야기를 할 때면 듣는 이들은 "넌 어릴 적부터 정상이 아니었어, 그러니까 쉽게 말해 또라이라 표현하면 딱 맞는 거야"라고 말하곤 한다. 그러나 나는 집으로 가는 길이 참으로 좋았다. 엄마가 있는 집, 따스한 품이 있는 그곳 거기다 집이 가까이 다가올수록 코끝을 자극하며 스치는 엄마의 여러 가지 간식이나 밥 냄새는 허기진 나를 더욱 흥분하게 만들곤 했다. 나는 지금도 그 밥 냄새 그러니까 엄마 냄새가 참으로 그립고 좋다. 나의 어린 시절 엄마는 매일 아팠다. 그러나 손솜씨가 매우 뛰어났다. 힘든 생활 속에서도 옷을 스스로 만들어 아이들에게 입히고, 책가방까지 직접 만들어 주는 엄마였다. 겨울이면 손뜨개질로 스웨터, 장갑, 목도리, 양말까지 한 올 한 올 짜아 만들고, 스케이트의 보호대까지 만들어 주던 우리 엄마. 그리고 손만 닿으면 음식이 저절로 나오는 만능 손이자 아이디어 감성 천재였다. 감자 하나만으로도 남들이 매일 먹는 감자볶음이나 조림과 같이 흔한 요리가 아닌 다른 요리로 만들 줄 아는 그런 엄마였다. 하지만 나는 엄마와 달리 손재주가 없다. 그리고 요리도 그리 잘하지 못하는 편이다. 또한 흔한 청소와 정리조차도 잘하지 못한다. 늘 어지럽혀 있는 나의 집에 가끔 엄마가 찾아오면 냉장고가 깨끗해진다. 혼자 살고 있는 딸이 밥이라도 굶을까 지금도 하루에 두세 번씩 전화를 하신다. 이 나이 아직도 엄마의 손길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니 엄마라는 존재는 우리들의 인생에서 떼어낼 수 없는 필연적 존재이며 우주적 존재임이 분명하다.
"어머니는 더 이상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삶 전체가 하나로 통일되어 있다. 아주 나이 든 사람은 내향적이고 무감각하다. 그렇다. 그러나 덧붙인다면 이 내향적인 것은 아주 순수하며 조화를 이루고 있다. 어머니의 존재가 늘 그러하듯" <케테 콜비츠 1924년 10월 22일 삶을 마감하기 몇 달 전 일기 중에서>
나에게 가장 좋아하는 화가가 누구냐고 묻는다면 단연, 독일의 표현주의 화가인 케테 콜비츠, 에밀 놀데 그리고 빈센트 반 고흐와 마크 로스코, 빛의 예술가이자 명상가로 알려진 제임스 터렐을 꼽을 것이다. 그들의 공통점은 모두 작품의 중심에 인간애와 사회로부터 얼어버린 마음을 녹여 줄 수 있는 신비스러운 힘이 담겨 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특히 케테 콜비츠(Käthe Kollwitz 1867-1945)는 여성화가이자 판화가 그리고 독일을 대표하는 어머니상인 위대한 인물이며, 현재까지도 반전과 민중의 상징으로 자리하고 있다. 또한 그녀는 한국의 민중미술과 중국의 뤼쉰이 펼쳤던 판화 운동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인물이기도 하다. 여성의 사회적 참여가 제한적이었던 시대에 활동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예술의 사회적 기능과 역할이 강조되는 당시 시대적 현실에 그녀는 적극적으로 동참하였다. 동프러시아에서 태어난 후 자신의 외조부에게서 사회에 대한 관심과 봉사 그리고 인류애에 대해 많은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영향은 그녀의 작품 세계에도 깊숙이 녹아있다. 어린 시절부터 드로잉을 배웠으나, 그녀는 그림보다는 조각과 판화에 더 관심이 있음을 발견한 후 판화와 조각에 평생을 바쳤다. 또한 의사라는 직업을 가진 남편과 빈민가에서 무료 진료를 한 것으로도 알려져 있으며, 콜비츠의 작품은 소련에 초대되어 사회주의적 작품 활동의 공을 인정받아 훈장을 받기도 하였다. 1930년대 초 베를린 미술대학의 첫 번째 여자 교수로 재직하게 되었지만, 나치 정부는 그녀를 사회주의자로서의 공식적 활동을 비판하며 결국 그녀의 교수직을 박탈하였다. 이후 1943년 제2차 세계대전 중 폭격으로 그녀의 판화작품과 인쇄 화집들이 불타게 되며(정부의 고의적 파괴로 추정됨ㅡ콜비츠의 사회적 영향을 옅 볼 수 있을 것이다.), 1945년 4월 22일 생을 마감한 그녀는 일생 동안 총 275점의 판화를 제작하였다. 콜비츠는 세계 1차 대전 당시 자신의 큰 아들(페테)을 잃었으며, 세계 2차 대전 때는 자신의 손자(페테:전쟁에서 잃은 페테를 그리워하며 둘째 아들이 낳은 손자에게 같은 이름을 지어줌)마저 잃은 아픔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인지 콜비츠는 전쟁 속에서 굶주린 아이 그리고 전쟁에 나간 남편을 기다리는 임신한 과부 등 인간 스스로가 벌인 전쟁의 참혹함과 인류의 어두워진 사회적 현상을 판화로 표현하였다. 그녀의 작품을 볼 때면 늘 암울하고 마음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게 한다. 그것이 바로 당시 사회에 대해 고민하는 콜비츠의 철학이 담긴 모습인 것이다. 그래서인지 콜비츠의 수많은 자화상 또한 고뇌와 사색으로 가득한 모습을 하고 있다. 그녀는 주로 석판화나 목판화를 제작하였는데 그 기법을 사용한 이유는 전쟁 중 가장 구하기 쉬운 재료를 선택했기 때문이다.
<독일 어린이들이 굶고 있다/40.5x27.5cm/석판화/1924>
<죽음이 여인을 움켜잡다/51x37cm/석판화/ 1934>
콜비츠의 작품에는 삶과 죽음이 함께 공존하고 있다. 전쟁에서 살아남은 자들의 현실을 인정해야 하는 슬픔과 허망하게 이유 없이 죽은 자들의 모습을 사실주의적 표현으로 거짓 없이 보여주고 있다. 또한 어머니라는 이름으로 자식을 잃은 슬픔과 전쟁의 극악무도함을 여실히 표현하였다. 배고픔을 견디지 못해 빵을 구걸하는 아이들의 초점 없는 눈에는 어찌 보면 생존을 위한 살기? 마저도 느껴진다. 저 순수한 어린 모습에게 누가 이런 아픔을 던져 놓고 갔는가? 그리고 그녀의 모성애는 <죽은 아들을 안고 있는 어머니:피에타 1933>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예수의 죽음을 애도하는 '미켈란젤로의 피에타'에서 보이는 어머니 즉 성모의 모습은 온화함과 고결함이라 표현한다면, 콜비츠의 작품 속 피에타는 슬픔 그 자체인 것이다. 자신의 아들 페테와 손자 페테를 잃은 어머니의 모습을 볼 때면 이러한 사실적 모습이 바로 숭고함 그 차제가 아닐까?라고 나는 생각한다. 오래전 케테 콜비츠 평전 <케테 콜비츠/카테리네 크라머 저/2004/실천문학사>을 읽으며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렸는지 모른다. 단지 연구 논문 위해 읽기 시작한 그녀의 일기장은 영국의 작가 '이안 맥큐리'의 <속죄:어톤먼트>보다 더 잔인하리 만큼 전쟁의 참혹함과 인간의 복잡한 심리 등에 대해사실적으로 기술해 놓았다. 그녀의 작품에는 연작 즉 시리즈 작품들이 많다. '게르하르트 하우프트'만의 연극인 '직조공들'에서 영감을 받은 <직조공 봉기 연작/1897> 등과 같은 시리즈 작품들은 한 편의 글을 읽는 듯하다. 관심이 있는 독자들은 그녀의 작품들을 찾아보면 콜비츠를 이해하는데 더 많은 도움이 되리라 생각한다.
<죽은 아들을 안고 있는 어머니:피에타/1937-1938/쾰른 콜비테미술관>
"나의 인생에서 격정, 생활비, 고통 그리고 기쁨은 그 얼마나 강력한 것이었던가? 그때는 정말로 투쟁의 삶이었다. 그리고 점차를 나이를 먹어갔다. 그런데 전쟁이 찾아온 것이다. 희생양 페테, 페테를 잃은 나. 그의 죽음 그리고 나 또한 힘을 잃었다. 고통 그리고 사랑까지도 온통 그가 마음을 앗아가 나는 점차로 무너져 내려앉는다."
<케테 콜비츠 1918년 7월 일기 중에서>
어제는 강남역 쪽에서 약속이 있었다. 이후 여러 약속이 있었던 나는 바쁘게 움직여야 했기에 아들의 얼굴을 보지도 못한 채 시골집으로 돌아왔다. 서울에 있는 동안 나의 차는 아들의 집 아파트 주차장에 주차를 해 놓고서는 말이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아들과 한국을 떠나 공부를 위해 멀리에 있는 딸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나의 엄마는 여든이 넘은 나이에도 이 나이 든 딸을 아직도 알뜰히 살뜰히 챙기고 있거늘 나는 나의 딸과 아들에게 엄마로서 자격이 있는 것일까? 스스로 자책하게 되었다. 그래서인지 시골집으로 돌아온 나는 몹쓸 몸살을 심하게 앓고 있다. 어젯밤에는 온몸이 쑤셔 수면제를 먹어도 잠을 자지 못할 만큼 아팠다. 나는 이 글을 작성하고 있는 순간에도 약물의 힘을 빌어 앉아 있다. 그래서인지 지금 나는, 엄마가 그립다. 지금도 엄마라는 이름을 부르고 싶지만, 이제는 더 이상 딸의 아픔을 엄마에게 보이고 싶지 않기에 그녀에 대한 그리움을 목구멍 속으로 꾹 삼켜본다.
"사랑하는 나의 딸과 아들아! 엄마가 늘 너희에게 사랑을 다 나누어 주지 못해 미안하구나. 너희들이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이 있어. 그것은 바로 이 우주에서 엄마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도 아닌 엄마의 딸과 아들이라는 사실과 너희를 이 세상에서 만날 수 있었다는 사실이 내게는 얼마나 행복하고 자랑스러운지를 잊지 말아 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