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창이나 베란다 사이로 들어오는 빛이 싫어 하루 종일 블라인드를 내려놓고 있을 때가 있다. 밖이라는 세상과 그저 단절하고 싶은 오롯이 나만의 세상에 잠수하고 싶은 때가 있다. 그러나 며칠이 지나도 나만의 세상을 향해 블라인드 사이로 새어 들어오는 빛을 보며 "너는 가려도 가려도 가려지질 않는구나."라고 말하고는 결국 블라인드를 열게 된다. 살아 있기에 햇살을 맞아야 하고 신선한 공기를 마셔야 한다. 그저 죽은 자와 같은 생활을 하기에 세상은 너무도 넓고 내게 주어진 시간은 많지 않다는 사실을 매일 깨달으면서도 실천이 왜 그리 쉽지 않은지......
에린 한스(Erin Hanson 1981-현재)의 그림을 마주할 때마다 느끼는 감정은 늘 나를 싱그럽게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흥분의 도가니 상태로 나의 감정을 빠트리는 것이 아닌 깊은 심연으로 유도하는 그 싱그러움의 아이러니. 그녀는 미국에서 태어난 현대 최고의 인상주의 화가로 손꼽히고 있는 화가이다. 그녀의 그림에는 많은 빛이 쏟아져 들어온다. 고흐의 그림에서 느낄 수 있는 거칠고 두꺼운 붓칠과 독일 표현주의 화가들이 가지고 있는 생명의 꿈틀거림을 느끼게 하는 선명한 색상을 떠 올리게 한다. 또한 그녀의 그림 속에 '빛'이란 캔버스를 가득 채우는 중요한 소재이다.
<오솔길/에린 한슨/71.12x101.6cm/oil on canvas/2014/개인소장>
늦은 가을 오솔길을 누군가와 함께 걷는다. 아니면 혼자 걸을 수도 있겠다. 조용히 말없이 걸어본다. 바람 소리 그리고 새들의 재잘대는 소리, 사그락 가을의 잔재가 밟히며 내는 소리, 바람 소리, 그 길을 걷는다는 상상만으로도 행복해질 것 같은 느낌이다. 오솔길은 마치 앨리스가 토끼를 만나 가게되었던 비밀의 동굴과같다. 금새라도 앨리스의 토끼가 뛰어나와 "자~~ 저를 따라오세요" 나는 밑도 끝도 없이 그 토끼를 따라갈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저 끝에 내 발길이 닿으면 무엇이 있을까?아니면 누군가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 그러한 궁금증을 자아내게 하는 나무들과 빛. 나무들은 나란히 서 있음에도 불구하고 가지와 가지가 연결되어 하나의 터널을 만들어 내는 효과를 자아내고 있다. 그리고 그녀의 거친 붓칠로 인해 붉은 낙엽이 가득한 바닥은 마치 융단을 깔아 놓은 듯 폭신거린다. 멀리서 조용하고 아늑한 그 오솔길을 바라보았을 때 느끼는 동화적 감정은 어른이 된 이후 쉽게 느낄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한슨의 그림 속 오솔길은 잊고 살았던 그 동화적 감정의 온도에 서서히 온기를 불어넣어 준다. 이어진 가지에 붙어 있는 나뭇잎들은 바람과 함께 춤을 즐기는 듯 보이며, 그 속으로 쏟아져 내리는 빛은 부드럽게 그림을 매만지고 있다. 그래서 보이지 않지만 빛이란 것이 그림의 주인공이라는 것을 금세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Reflections in Color/에린 한슨/76x114.3cm/oil on canvas/2018/개인소장>
가을의 고요한 나무가 강물을 거울 삼아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다. 가을의 나무들은 이제 곧 앙상하게 가지만 남아 있을 자신을 비추고 있는 고요한 물의 모습을 보며 무슨 생각을 하려는지 궁금하다. 하늘에서 내리는 빛은 나무 사이를 뚫고 내려와 강물에 반사되고 있다. 그림의 제목처럼 빛으로 반사되어버린 색은 직접 보는 것과 달리 좀 더 시적 감정을 자아낸다. 나무는봄에는 파아란 싹이 돋고 여름에는 무성하게 자신이 나무임을 뽐냈을 것이며 이 가을 그 자랑스럽던 잎들을 빨갛게 물들인 후 오로지 나무 자체로 돌아간다. 그러한 물에 비친 가을나무의 깊이는 하늘에서 나뭇가지 사이 사이를 비집고 들어온 태양의 빛이 물에 비친 나무를감싸고 있기 때문이다.
램브란트의 그림이 가지고 있는 가장 중요한 요소가 바로 '빛' 이다. 즉 하이라이트 효과를 자아내는 것에 있다는 사실은 미술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을 것이다. 빛이란 그림에 생명력을 부여하는 아주 중요한 요소이다. 그러나 빛은 그림에만 생명력을 부여하는 것일까? 그렇다. 우리에게도 빛은 매우 중요하다. 생명을 잉태하게 하기도 하며 우리가 살아 있음을 확인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기에 나는 빛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오늘 아침 커피와 함께 이 그림 저 그림을 뒤적이다 문득 한슨의 그림이 나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아직은 내가 살아있기에 나의 아이들에게 빛이 되어 주리라. 앨리스가 토끼를 찾아 비밀의 터널에서 새로운 세상을 만나게 하였듯 나의 아이들에게 그러한 비밀의 터널로 그들을 이끌어 주려 한다. 그 터널 속에서 많은 경험을 하고 나온 후 세상을 바라보는 순간, 쏟아져 들어오는 빛은 분명 눈부시게 아름다울 것이라는 사실은 자명할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