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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야 할 일을 앞두고, 책을 읽는다

by 소믈리연

봄, 가을처럼 아침저녁으로 기온이 변할 때, 무기력증을 동반한 피곤함이 몰려옵니다.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는 것도, 한 발을 땅에 내 닿는 것도, 어제까지 아무렇지 않게 하던 일을 시작하는 것도 힘듭니다. 침대에 종일 있으라고 하면, 누구보다 잘할 자신 있습니다. 멍 때리기 대회라는 게 있듯이, 종일 침대에 누워있는 대회가 있다면 순위권 안에 들 자신도 있고요.


머리가 복잡한 날은 무작정 걷습니다. KTX 승무원으로 일할 때는 기차에서 걸었죠. 걷는 걸 좋아하는 편이었기에 체력적으로는 어렵지 않았습니다. 일을 그만두니 걸을 일이 줄었습니다. 두 아이들 키우면서는 더 그러했죠. 걷기는 했지만, 쫓아다니는 데 가까웠습니다. 아이들이 조금씩 크며 다시 걸었습니다. 동네 한 바퀴, 옆 동네, 뒷동산을 올라갔죠. 생각이 복잡한 날이면 일단 운동화부터 신었습니다. 아무 생각 없이 걷는 것 같지만 머릿속에는 레이더망이 가동되나 봅니다. 꼬여있던 실타래가 서서히 풀리고, 걸음이 빨라질수록 풀리는 속도도 빨라집니다. 집으로 방향을 틀 즈음되면, 꼬였던 실타래가 일렬종대로 가지런히 놓여있죠.


스트레스를 받으면 청소를 합니다. 눈에 보이는 것을 모조리 꺼내서 한 곳에 모읍니다. 원래 있던 자리에서 정리하면 될 텐데, 늘 거실 한가운데 나 주방 구석에 쌓아둡니다. 먼저, 버릴 것과 쓸 것을 구분합니다. 20리터 종량제 봉투 속에 마구잡이로 집어넣습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조금만 더 갖고 있자'라던 물건도 가차 없이 버립니다. 부피가 큰 물건일수록 소각될 확률이 높아지죠. 조금만 거슬려도 집어넣습니다. 어제까지만 해도 아꼈던 물건들도 많았을 겁니다.

진정 '그분이 오신 날'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까지 꺼냅니다. 주방 서랍에 있는 식기류, 일회용품, 각종 물건까지도요. 애들 옷장, 행거에 걸린 옷도 바닥에 쌓습니다. 옷가지로 둘러싼 산봉우리들로 발 디딜 틈이 없죠. 이사 오던 날, 이삿짐센터 아저씨가 주신 100리터 가까이 되는 투명 비닐 입구를 펼쳐 마구잡이로 집어넣죠. '언젠가는 입지 않겠어?'라는 생각이 들다가도 잠시, 손은 이미 버리고 있습니다. '그 언젠가'가 언제 올지도 모르고, 눈에 안 보이면 기억 못 할 게 뻔하니까요.

아이들 옷은 더 막무가내입니다. 일 년에 10cm 넘게 자라다 보니 반년만 지나도 입을 수 없죠. 아들이라 옷도 엉망으로 입다 보니 중고거래는커녕 누구에게 주기도 민망합니다.

무기력하거나, 생각이 복잡하거나, 스트레스를 받을 때면 저만의 방식으로 풀어나갔습니다. 되도록 타인에게는 영향 주지 않도록, 오로지 내 안에서 해결할 수 있도록 하려 했죠. 그런데 작년부터인가 새로운 방식이 추가됐습니다.


해야 할 일이 많거나, 당장 해야 할 일이 있는 걸 알면서도 미룰 때가 있습니다. 물론, 마냥 미루는 건 아닙니다. 머릿속으로 구상은 하고 있습니다. 메모도 하고, 음성으로 짧은 기록도 남깁니다. 그러면서 제대로 시작은 하지 않습니다.

대체 뭘 하냐고요? 책, 책을 읽습니다. 언제부턴가 이런 버릇이 생겼습니다. 해야 할 일을 앞두고 도서관에 갑니다. 평소에는 읽을거리를 정하고 가기에 한 두 권만 빌리는데, 이런 날은 대여섯 권이나 빌려옵니다. 일과 관련된 책도 있고 아닌 책도 있죠. 한 아름 안고 오면 풍성하지만, 대출 기간인 2주는 지키지도 못합니다. 절 반도 못 읽은 경우가 대부분이죠. 그런 와중에, 정독하는 책 한 권이 꼭 있습니다. 현실 도피라고 해도 좋습니다. 번뇌라고나 할까요. 머리와 마음을 차지하고 있는 돌덩이의 존재를 잊게 됩니다. 독자 입장으로, 작가 입장으로 시점을 바꿔가며 읽다 보면 빠져듭니다. 독자 입장에서 밑줄 친 문장, 작가 입장에서 밑줄 친 문장도 달라지고. 사우나에 다녀온 듯, 온몸이 개운합니다. 머리도 맑아집니다. 그제야 일에 집중할 수 있는 힘이 생깁니다. 왜 그럴까요?


굳이 'A는 B이기 때문이다'라고 정의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저, 책을 읽으면서 마음의 균형을 찾는 거겠죠. 이러한 방식이 저와 맞나 봅니다. 여태껏 몰랐습니다. 책을 통해 위로받고, 여행할 수 있고, 힘도 받을 수 있다는 걸요.

오늘도 새벽 3시에 잠들었습니다. 김애란 작가의 『이 중 하나는 거짓말』을 읽느라고요. 여러 번 멈췄고, 여러 번 줄을 그었습니다. 덮고 난 뒤에도 이 작품에 대한 기사를 검색하고, 작가에 대해 더 알아보다 보니 그제야 잠이 쏟아졌습니다. 그리고, 오전부터 해야 하는 일에 집중해 나갔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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