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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이후 슬픔의 도시가 되었던, 아름다웠던 비엔나

by ANNA

여행지에서 손님의 사망이라는 전대미문의 사건을 접한 회사도 멘붕에 빠져 우왕좌왕했다.


누군가가 남아야 한다는데, 처음엔 일행 중 한 명이었다가 결국 내가 남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다행히 자유시간을 가진 손님들이 돌아오기 전까지 시신보관 텐트도 치워지고 일단의 절차들이 마무리되었기에, 손님들에겐 고인이 위독해서 내가 남아 있기로 했다는 뻔뻔스러운 거짓말을 하면서 손님들의 동요는 최소화했지만 손님들을 공항까지 배웅할 정신줄은 남아 있지 않았다.

결국 이 모든 절차를 함께했던 가이드님께 부탁해서 처리했고, 손님들을 보내고 난 결국 주인 잃은 고인의 가방과 함께 비엔나 호텔에 남게 되었다.




유족들로는 남편과 아들, 딸이 있었다.

가장 빠른 항공편으로 오는 것이 사망 다음날 밤이었고 그들을 맞아야 하는 사람은 바로 나였다.


만 하루의 심란한 시간을 보낸 후 비엔나 유족들 미팅 전 비엔나 가이드 협회 회장님과 사건을 함께 처리했던 가이드님 그리고 마침 비엔나에 와 있었던 랜드사 대표님과의 저녁 식사가 있었다.

공항으로 가기 전

다들 우려 섞인 위로의 말을 건네주었는데 나로서는 한마디 한마디가 공포로 다가왔다.


요약해 보자면

유족들이 너한테 뭔 짓을 하든 넌 죄인의 심정으로 모든 비난과 굴욕을 감수해 내야 한다는 것이었다.

악플만 달려도 심장이 벌렁거리는 쿠크다스 멘탈이 감내해 내기엔 그 시간을 통째로 견디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긴긴 비행시간을 황망한 눈물바람으로 왔을 유족들은 애써 슬픔을 삭이는 모습이 의외로 덤덤했다.

많은 사람들이 우려했던 험한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았고, 호텔로 오는 택시에서는 긴 침묵만이 이어졌다.


유족들과 같은 호텔의 룸에 있었지만 쉬는 게 쉬는 것이 아니었다.

급작스럽게 입을 옷만 챙겨 왔을 유족들을 뭘 어떻게 먹여야 할지도 모를 상황일지라 점심으로는 내가 가지고 있던 라면을 끓여서 배달해 드리고, 저녁은 인근 몰에서 중국음식으로 식사를 함께 하기로 했다.


저녁 식사 자리에서, 조금은 안정된 듯 보이는 그들의 모습에 나도 모르게 안도의 숨이 새어 나왔다.

분위기를 부드럽게 풀어볼 요량으로 몇 마디 말을 건네자, 대화 속에서 그들의 순박함이 오롯이 느껴졌다.


이유야 어찌 됐든, 나를 향한 원망이 조금쯤은 있을 법도 한데 그 감정을 애써 숨기려는 모습이 역력했다.

그 마음이 고맙고도 안타까워, 식사를 마칠 때까지 마음 한편이 먹먹했다.




유족들을 유럽의 한중간으로 이끈 고인의 눈물인 듯 장례절차를 진행하는 내내 비가 많이 내렸다.


도착한 다음날부터 이틀 후 대사관 방문, 그리고 그다음 날은 경찰서와 장례업체 방문이 연달아 잡혔다.

멀쩡했던 고인이 갑자기 사망한 과정에서 타살의 의혹이 있다고 하여 세 명의 용의자가 지목되었고, 그중 하나인 내가 경찰의 조사를 받게 되었던 것이다.

직접 목격하진 못했지만 친구들의 부축을 받고 병원으로 걸어가던 고인이 걸음을 걷지 못하자, 고인을 업고 가 자리에 앉혀준 남자분

그리고 옆에서 고인의 손을 주물러주던 친구, 그리고 나였다.

두 명은 이미 출국을 했으니, 내가 대표 용의자로 검찰의 조사를 받게 되었던 것이고, 유족들과 통역사 그리고 대사관 직원이 참관했다.


사망 당일, 스웨덴 플라자에서 나는 수없이 반복했던 말들을 또다시 읊조렸다.

감정이 빠진 목소리로, 마치 지나가는 행인이 본 일을 보고하듯.


딸은 옆에서 시종일관 훌쩍였고, 아들은 때때로 참지 못하고 오열했다.

아버님의 공허한 눈빛을 허공에 날렸고, 고인의 사망 과정을 통역하던 가이드조차 이따금 목이 메었다.


기억하기조차 싫은 순간을 다시 꺼내는 일은 내게도 버거웠다.

하지만 그때는 누군가는 정신을 붙잡아야 했기에, 최대한 감정을 배제하고, 냉정할 만큼 침착하게 진술을 이어갔고, 그렇게 나는 경찰 조사를 마쳤다.

마음 한구석은 여전히 얼어붙은 채로.


유족들은 시종일관 부검 없이 화장하길 원한다는 뜻을 밝혔지만, 타살의 의혹이 있기에 사건은 검찰로 넘어갔고 검찰로 넘어간 이상 반드시 부검을 해야 했기에 일정은 계속 늘어지게 되었다.


이제 남은 절차는 하나뿐이었다.

신속히 부검 일정을 잡고, 화장을 마무리하는 일. 그것이 유족이 해야 할 마지막 여정이었다.


그와 동시에, 현지 음식이 입에 맞지 않아 제대로 먹지도 못하던 유족들을 한인 민박집으로 옮기기로 했고, 내 임무는 그들을 그곳까지 무사히 모셔드리는 것으로 끝이 났다.




그날도 비가 억수같이 쏟아졌다.

하늘이 대신 울어주는 듯했다.


유족들을 한인 민박집 앞까지 데려다주고, 그동안 정들어버린 그들과 마지막 인사를 나눴다.

짧았지만 깊었던 시간이었다.


참아왔던 눈물이 그제야 터졌다.

울면 안 된다고, 끝까지 버텨야 한다고 다짐했는데 그 순간만큼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비와 눈물이 뒤섞여 얼굴을 타고 흘렀다.


유럽은 처음이라는 그들.

합스부르크 가문의 영광이 빛나고, 모차르트를 비롯한 예술가들이 사랑했고, 아름다운 씨씨 황후의 흔적이 남아 있는 도시.

클림트의 '키스'가 황금빛으로 빛나는 그곳, 비엔나.

그들에게는 이제 아름다움이 아닌, 비극으로 기억될 도시가 되어버렸다.


아름다웠던 비엔나는 그날 이후, 우리 모두에게 슬픔의 배경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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