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생이 멈춘 그 자리에서
억수같이 흐르는 빗물 속에 유족들을 남겨놓고 나 홀로 귀국했다.
호텔방에 혼자 남게 된 그날
호텔 침대에 누워 그저 생각이 흘러가도록 내버려 두는 중 사망에 이르기까지의 일련의 과정들이 파노라마 쳐 럼 펼쳐졌다.
아무리 되짚어 생각해 봐도 이해 안 되는 참으로 미스터리 한 일이 벌어진 것이다.
멀쩡하게 지내다 불과 사망 이틀 전에 힘들다고 호소
친구들의 증언에 의하면 전날 햇반을 끓인 죽도 한술 뜨고 아침에 샤워도 했으며 말도 했다고 한다.
다만 짐을 싸는 과정에서 짐을 마무리할 힘이 달려 캐리어를 닫는 마지막 단계를 룸메가 대신해줬다고 한다.
'힘들면 그냥 호텔에 좀 더 머무를까?'
'가이드가 늦지 말라고 했잖아. 그러니 가야지'
'가야지'
간다고 했으나 그리도 성급히 갈지 몰랐던 이 한마디는 고인의 마지막 유언이 되었다.
최대한 멀쩡하게 행동하여 단체생활에 피해를 주지 않으려고 한 고인의 어처구니없는 배려는
친구들조차도 사망 당일 친구가 기력이 없다며 영양주사를 맞혀야 한다고 했을 정도로 판단력을 흐리게 만들었다.
그랬기에 모두가 참담해했다.
갑자기 누군가 사망했다?
그런데 이게 심장마비가 아냐
심지어 아침에 말도 하고 밥도 먹고 걷기도 했대
과연 무슨 연유로 사망에 이르게 되었을까?
아팠던 증상이 있긴 했지만 어찌 이리 사람이 황망하게 죽음에 이를 수가 있나?
이 의문은 나를 항상 따라다녔다.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뒤늦게 비엔나 가이드를 통해 알아낸 병명은 바로 '혈액암'이었다.
나중에 의사에게 자문해 본 급성 혈액암은, 감기 증상으로 시작해 급격하게 사망에 이르게 할 수도 있다는 말을 듣고서야 상황이 정리되기 시작했다.
사망한 그날
절차가 마무리된 후 어느 정도 진정된 고인의 친구들을 가이드와 함께 찾아 그간의 자초지종을 들을 수 있었다.
내가 이틀 전까지는 멀쩡했다고 진술했던 내용은 멀쩡했던 게 아니라 멀쩡한 척했었던 고인의 모습이었다.
출국 전 감기 증상을 있었다던 고인은 감기가 떨어지지 않는다고 호소했고, 친구들은 그 몸으로 여행을 가기에는 무리라며 여행을 가지 말자며 말렸으나
'내가 안 가면 너네들 다 안 갈 거잖아
이런 말을 하며 한사코 여행을 가기를 고집했던 것이었다.
오랫동안 설레며 준비하고 여행지를 고르며 행복해했을 일행의 행복을 깨뜨리려 하지 않으려 했던 고인
버스에 남겠다고 했던 이유도 단지 민폐를 끼치기 싫다였던 고인은 죽을듯한 아픔을 참으면서까지 친구들과의 여행을 망치지 않으려 노력했고, 투어에 지장이 없도록 이 악물고 견뎠던 것이다.
나에게 보고된 상황은 새발의 피였을 뿐
그들은 이미 사태의 심각성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비행 편을 변경해서라도 고인을 중도하차시키려 했고, 상황이 여의치 않자 본래의 일정으로 귀국을 하되 병원 예약과 구급차 대기까지 마무리했던 것이다.
사인이 혈액암이었다면 투어 중 병원을 갔었어도 혹시 비행 편을 바꿔서 귀국했더라도 사망했을 운명이었지만,
그래도 그래도 미안함과 후회가 끊임없이 밀려왔다.
상태가 심각해 보였음에도 단지 '인솔자의 업무'라는 이유로 투어에 나서길 설득했다는 점, 죽을 듯한 고통을 참고 있는데도 그 사실을 모르고 업무 외의 일이 계속 늘어나자 은근히 귀찮아했던 점
나의 목적은 오로지 투어를 잘 마무리시키고 별 탈 없이 무사히 한국까지 데려다주는 것밖에 없었다.
유독 아침에 말도 하고 전날 밥도 먹었다고 '다소 멀쩡했다는' 고인의 상태를 진술한 친구들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고인이 병원에 가기라도 하면 본인들의 관광 스케줄도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었기에 그저 증세가 더 악화되지 않기만을 빌며 고인을 병원으로 데려가는 일만큼은 없길 바랐을 것이다.
막상 사망에 이르자, 병원으로 끌고 갔었어야 되는 상황을 만들지 못한 본인들에게 면죄부를 주느라 유독 멀쩡했다는 것을 강조했을 것이다.
고인이 친구들이 아니라 가족과 함께 여행을 왔더라면 (가족이라면 애초에 이 여행을 깼겠지..) 억지로 투어 따라다니는 일 없이 좀 더 편안한 곳에서 죽음을 맞이할 수 있지 않았을까?
그녀들도 나도 어찌 보면 버스에서 고인을 사망에 이르게 한 공범이다.
경직상태로 본 고인은 버스에 오르자마자 숨을 거둔 것으로 추정된다고 했다.
그야말로 죽을듯한 아픔을 견뎌야 했을 텐데.. 얼마나 아팠을까?
조금이라도 살뜰히 챙겨주고 보살펴 줄걸
후회는 끝도 없이 밀려왔다.
강원도 초등학교 자모회로 만나서 여행을 떠났던 설레던 감정은 돌이킬 수 없는 비극으로 돌아왔다.
지금도 4월이 오면 나와 새털만 한 인연을 맺고 비엔나에서 생을 마감한 고인이 많이 생각난다.
가지런히 모은 두 손, 그 핏기 없던 손에서 유난히 반짝이던 젤네일이 여행의 설렘이 비극으로 바뀐 장면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듯해 그 곱던 손이 자꾸 오버랩된다.
이역만리에서 비명횡사했던 그녀의 유해는 다행히 무사히 한국으로 옮겨져 뿌려졌다고 전해진다.
그로부터 2년 반의 세월을 건너왔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