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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그녀는 단지 잠시 쉬고 싶다고 했다

감기인 줄 알았던 숨이 이틀 뒤 마지막 숨결이 되기까지

by AN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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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코 브루노에서 출발해 간단한 투어를 마치고 헝가리 부다페스트로 향한 투어는 막바지를 달리고 있었고 모든 것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던 평범한 날이었다.

부다페스트로 향하는 중 간간히 둔탁한 기침 소리가 버스를 울렸지만, 유럽 여행에서 면역력이 약해진 손님들이 흔히 걸리는 감기려니 생각했었다.


느지막이 도착한 부다페스트에서 점심을 먹고 부다왕궁에서의 첫 투어를 진행했다.

가이드가 앞장서고 난 후미를 지키기 위해 손님들 뒤를 따라 다소 가파른 부다왕궁으로 가는 계단을 오르고 있는데 내 앞에 선 일행이 계단을 오르는 모습이 평소와 다름을 감지했다.


강원도에서 온 여섯 명의 여자팀이었는데, 그 중 한 명을 친구들이 양 옆에서 부축해 가며 힘들게 걷고 있었는 중 들리는 숨을 내쉬는 모양새가 심상찮았다.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폐 속 어딘가가 찢어지는 듯한 소리를 내는 숨소리는 깊은 곳에서부터 무언가를 끌어올리듯, 거칠고 무거웠다.


걸음은 한도 끝도 없이 느려졌고, 제법 먼 길을 걸어야 했던 부다왕궁에서 그들은 결국 일행을 따라잡지 못해서 내가 따로 챙겨야 하는 상황이 슬슬 귀찮음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부다왕궁 투어 후 겔레르트 언덕을 올라야 하는 투어에서 망설이던 그녀가 말을 건넸다.

'저.. 몸이 좋지 않아 그러는데, 버스에서 쉬어도 될까요?'

'기사님이 허락해야 가능합니다만, 어디가 많이 불편하세요?'

'감기 증상이 있어서요'

'지금 상태를 봐서는 병원을 가셔야 할 듯한데요'

'한국에서 약을 넉넉히 가져와서 약 먹고 좀 쉬면 될듯해요'


강원도에 위치한 작은 동네 초등학교 학부형으로 만나 오랜 시간 인연을 이어왔다는 60대 초반의 6명의 여자들은 소풍 나온 여고생들 마냥 깔깔거리며 시종일관 투어의 분위기를 업시켜 주었다.

항상 내 뒤편 자리를 고집했던 고인은, 학구열에 불타 내가 버스에서 멘트 하는 내용을 녹음까지 해서 공부하고 싶다는 의지로 나에게 폰 녹음 기능을 물어오기도 했다.

이전 일정에서 씩씩하게 잘 따라다녔고, 밝은 모습을 보여줬던 그녀의 갑작스럽게 급변한 상태가 이해되지 않았다.


그리고 다음 투어에서도, 또 그다음 투어에서도 버스에서 쉬기를 요쳥했지만, 인솔자로서의 사명을 다하고자 여기 언제 오겠냐며, 좀 힘들어도 투어에 참가하는 게 좋지 않겠냐는 설득에 들어갔다.

하지만 그녀가 버스에서 쉬고자 하는 이유는 본인이 힘들다는 사실보다 걸음이 느려 다른 일행들에게 민폐 된다는 염려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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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식 식당에서 만난 그녀에게 좀 어떠시냐고 안부를 묻는 말에 그녀는 여전히 좋지 않다고 하면서, 그날도 투어를 하지 않고 버스에서 쉴 수 있게 해 달라는 요청 했다.

한두 번은 버스에서 쉬게 해 줄 수 있지만 우리가 투어 하는 중 기사도 편하게 휴식을 취하길 원하기 때문에 기사의 눈치를 보며 허락을 받아야 한다는 이유, 그리고 투어를 참석 안 했을 경우 클레임을 걸 수 있기 때문에 이 투어를 참석하지 않아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는 내용의 서명을 받아야 하는 여러 귀찮은 문제로 '여기 언제 오시겠냐?'는 뻔한 스토리로 설득 작전에 들어갔지만 '민폐'끼지치 싫다는 그녀의 입장은 완고했다.


그리고 부다페스트에서 비엔나로 넘어갔다.

처음 입국했던 비엔나에 다시 도착했다는 건, 어느새 여행이 한 바퀴를 돌아 끝을 향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함께 온 친구들이 밥은 먹어야 한다고 설득을 했는지 힘들게 식당으로 온 그녀는 여전히 한술도 뜨지 못하는 상황에 친구들이 할 말이 있다며 불러냈다.

친구 상태가 많이 좋지 않기에 오늘이라도 비행 편을 변경할 수 있으면 친구가 귀국하고 싶다는 의사를 표시했으나 그날 변경할 수 있는 비행 편은 없었다.

'그럼 하루만 더 참으라고 하지 뭐'라고 말하며 돌아서는 그들을 따라가 그녀의 상태를 보니, 힘 없이 늘어져 있었다.


'감기약을 먹고 있는데 점점 상태가 나빠지는 걸 보니 단순 감기가 아닌 듯해요. 병원 가보셔야 하지 않을까요?'

'괜찮아요. 내일 귀국하는데요 뭘' (외국에서 병원을 갈라치면 돈도 돈이지만 절차가 상당히 복잡해진다)

'그럼 식당 아래에 약국이 있는데, 약을 바꿔보는 건 어떨까요?'

그 부분은 동의를 해서 약국에서 증상을 얘기하는데, 입이 계속 마르고 가슴에 통증이 있다고 했다.


새로운 약을 받아 들고, 그날도 그녀는 옵션 투어를 비롯한 모든 투어를 포기하고 버스에 머물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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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국하는 날이다.

비엔나 슈테판플라츠에서 자유시간을 가지고 귀국하는 날이라 투어가 무사히 진행되었다면 느긋한 여유를 부리며 꿀 빠는 날인 것이다.


호텔 체크아웃 진행하느라 분주한 가운데, 손님들이 우려 섞인 목소리로 아프신 분 상태가 많이 안 좋은 듯하다며 한 마디씩 건넨다.

호텔 밖 의자에 앉아 친구 어깨에 기대어 있는 모습은, ‘앉아 있다’기보다, 중력의 힘으로 바닥에 흘러내릴 듯 보였다.


병원 가기를 거부하던 그녀를 대신해 이제는 친구들이 요구사항을 말하기 시작했다.

친구가 기력이 하나도 없기 때문에 자유 시간 중 병원에 들러 영양주사라도 맞혀야 한다.

걷는 것조차 힘들어하니 공항에서 휠체어 서비스를 요청한다는 등의 내용이었다.


출발시간이 임박해 발생한 급작스러운 요구 상황에 바빠지기 시작했다.

일단 회사에 상황을 보고 한 후 이 분의 병원에서의 절차를 도와줄 가이드를 섭외하기 위해 전날 함께 했던 가이드님께 연락을 했지만 성수기인 데다 당장 가능한 가이드 구하기는 불가능했던지라, 이동하면서 해결하기로 하고 일단 버스를 출발시켰다.


버스에 올라 확인해 본 그녀는 마스크를 낀 채 눈을 감고 기대 있었다.


30여분의 짧은 거리를 가는 동안 가이드 섭외와 회사로 업무 보고 등을 위해 바쁜 중 내 뒤편에 앉아 고인의 손을 마사지해주던 친구가 이상 상황을 감지했는지 다급하게 요청했다.

'저기요.. 119 불러야 할거 같아요'


스웨덴플라츠에 도착했다.

손님들을 슈테판플라츠까지 안내한 후 자유시간을 드려야 하나, 그럴 경황이 없어서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미팅 시간과 장소를 급하게 공지한 후 곧이어 도착한 응급구조대원들과 함께 버스에 올랐다.

곧바로 마스크가 벗겨진 고인의 맨얼굴은 입에 거품을 물고 있는 모습이었다.

정신이 아득해졌다.


설마..

아닐 거야, 아닐 거야..

'She die?'

'Yes'


하늘이 무너져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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