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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부도, 연인도 아니랍니다

그저 우연히 만난 '친구'라던 두 사람에게서 시작된 소란

by ANNA

산티아고 순례길을 떠나기 전, 인천공항에서의 첫 미팅.
손님들이 한꺼번에 몰려와 눈 돌릴 틈도 없던 그 혼란 속에서 이름을 확인하고 체크하는데 누군가가 나에게 쑥스럽게 말을 건넨다.

“우리 공항에서 만났어요.”

그래서 뭐?

'이 와중에 굳이 할 필요 없는 쓸데없는 말을 왜 하지?'

이렇게 생각하며 그저 바쁜 와중에 흘려들었다.


경증의 안면인식장애가 있는 데다, 특히 공항은 늘 전쟁터 같아서 특별히 눈에 띄는 사람이 아니면 기억이 희미한 것이 사실이다.

나중에 그 남자가 사람들에게 둘의 사이를 변명하듯 떠벌렸던 말들을 유추해 보니 공항에서 그 말을 들은 것이 기억이 났고, 이것이 단순한 인사 이상의 의미였다는 것을 유추할 수 있었다.


인천공항에 도착했는데, 익숙한 얼굴의 여자가 앉아 있더란 것이었다. 알고 봤더니 지난번 함께 돌로미티를 갔을 때 만났던 멤버였고 또 그 여자가 우연히 (우연이라는 말이 몇 번 반복되면, 그건 더 이상 우연이 아니게 되는 경우가 많다) 산티아고 순례길을 가게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어 반가워하며 함께 미팅테이블로 와서 그 말을 했던 것이었다.

여러 이야기들이 뒤섞여 제 모습으로 드러나기 시작했고 퍼즐이 맞춰졌다.

그런들 저런들 내 서류상으로는 이 두 사람은 아무런 연결도 없는 완벽한 타인이었다.


그 남자가 그 말을 한건, 서류상으로는 타인이지만 그들은 한 팀이라는 것을 기억해 달라는 의미였지만 눈치 없는 난 그것을 간파하지 못한 데에서 모든 사건이 시작되었다.




산티아고 순례길에서는 대부분 알베르게라 불리는 도미토리 형태의 숙소를 이용한다.
공용 공간에서 잠을 청해야 하니 침대 배정은 단순히 ‘누가 어디서 잘 것인가’의 문제가 아니라 40여 일의 시간 중 가능한 한 많은 날을 편안하게 몸을 누이고 싶어 하는 모든 손님들의 바램을 적절히 배치해야 할 삶의 조각과도 같은 큰 이슈가 된다.


부부의 경우 짐을 함께 쓰기 때문에 자연스레 같은 침대를 배정한다.
그 외의 이들은 친구끼리 온 경우엔 둘을 붙여 배치하고, 혼자 온 사람들은 같은 성별끼리 짝을 지어 보통 2층 침대의 위·아래를 번갈아 사용하도록 안내하는 것이 모두가 아래층을 원하기 때문이다.


인솔자마다 나름의 방 배정 철학이 존재한다.

나는 가능한 한 남녀를 분리해 최대한 편안한 환경을 만들고 싶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이상적인 이야기일 뿐
단체에게 주어진 방의 구조를 고려해 남녀를 적절히 배치하고, 그 틈 사이에 부부를 자연스럽게 끼워 넣는 ‘현실적 선택’을 할 수밖에 없다.

결론적으로 말해, 산티아고 순례길 인솔에서 가장 고난도의 작업은 다름 아닌 방 배정이다.
매일 밤 쏟아지는 불만과 잡음, 예상치 못한 감정의 파도는 대부분 이 방 배정에서 출발한다.
한 침대, 한 공간이 사람의 진짜 성향과 관계의 본질을 가감 없이 드러내는 곳이기 때문이다.




스페인에 도착해 한 번의 호텔 숙박 후 산티아고 순례길 프랑스길의 출발점인 생장(생장피에드포르)에 도착하자마자 첫 알베르게 도미토리에 숙박하게 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방 배정표였다.

초반 잠시 도움을 주러 온 가이드와 방 구성도를 들여다보는데, 도무지 답이 나오지 않았다.
남녀 구성, 침대 구조, 짐의 위치, 팀 분위기까지 고려하면 정석대로 배치하는 것이 오히려 더 큰 불편을 만들 상황이었다.

결국 첫날은 원래 정해진 짝꿍들끼리만 그대로 한 침대를 사용하도록 하고, 부부든 남자든 여자든 전부 한데 섞어 넣는 쪽으로 결정했다.

그것이 그날의 최선이었다.


그리하여 내 서류상에서는 혼자 온 것으로 되어 있던 두 사람은 첫날부터 서로 다른 방에서 자게 된 것이었다.




방 배정을 마치고 잠시 쉬었다가, 모두 함께 생장의 마트로 향하던 길이었다.
가이드가 앞장서고 나는 뒤에서 일행을 챙기며 따라가고 있는데, 문제의 남자가 갑자기 걸음을 맞추며 시비를 걸어왔다.

“아니, 우리나라 최고급 여행사가 어떻게 이런 숙소를 줄 수가 있어? **여행사 진짜 정말 실망이야!”

그 말투는 불만을 넘어, 마치 따져야 할 빚이라도 있는 사람 같았다.
어이가 없어 나도 한 치도 물러서지 않았다.

“선생님, 알베르게가 어떤 곳인지 모르고 오신 건가요? 순례길에서 이런 숙소를 원치 않으셨다면 호텔팩을 선택하셨어야죠.”


목구멍 끝까지 올라오던 말을 가까스로 삼켰다.
‘선생님이 내고 오신 금액을 먼저 떠올려보세요.’

여인숙 값을 내고 호텔 서비스를 요구하는 격이었다.


그 말 한마디에 남자의 목소리는 점점 더 높아졌고, 옆에서 함께 걷던 (함께 붙어 다니기에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그녀를 당연히 남자의 아내라고 여겼다) 여성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모든 말에 맞장구를 치면서 어이없는 멘트에 힘을 실어 주고 있었다.

생장에서 가장 상태가 좋은 알베르게였음에도 그들은 집요하게 불만을 쏟아냈다.

그리고 나는 나중이 돼서야 깨달았다.
그날 그들의 불편함은 숙소 때문이 아니었다는 것을.

첫날 무작위 배치로 두 사람이 다른 방에 배정된 일이 그들의 감정 깊은 곳을 건드렸던 것이다.

겉으로는 알베르게 탓을 했지만, 실은 둘이 함께 자지 못한 밤이 그들의 진짜 불만의 핵심이었다.




둘째 날, 생장에서 피레네 산맥을 넘어 론세스바예스로 향하던 날이었다.
손님들과 미팅한 이후로 3일의 시간이 지났지만 아직 초반이라 손님들의 얼굴도 채 익숙지 않았고, 그저 남녀가 함께 다니면 자연스럽게 ‘부부겠지’ 하고 넘겼다.


알베르게에 도착해 도착한 순서대로 침대를 배정하는데, 문제의 그 커플이 입장했다.
나는 당연히 부부팀이라고 생각했고, 하나의 2층 침대를 배정해 주자, 둘은 너무도 자연스럽고 기쁜 얼굴을 하며 각자 아래칸·위칸을 정해 올라갔다.


문제는 그 뒤였다. 뒤이어 도착한 손님들을 배정하다 보니 어딘가 짝이 이상하게 맞지 않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서류상 아무 관계도 없는 남녀가 한 침대를 선점해 들어가 버렸으니 그들과 짝이 되어야 했던 남자분과 여자분이 졸지에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된 것이다.

이미 짝을 정해 주고 원칙을 정해줬기에, 자기들 짝이 있다고 거부해야 할판에, 남들 다 뒤섞여 자는 도미토리에 아래위로 한 침대 쓴 게 그리 좋았을까나?




셋째 날, 드디어 사건의 전말이 드러났다.
방 구조를 보며 머리를 굴려보니, 부부팀을 한 방에 모으고 남자팀과 여자팀을 분리하면 가장 깔끔하고 합리적인 배치가 나오겠다는 계산이 섰다.


도착 순서대로 방을 안내하던 중, 문제의 커플이 가장 마지막에 들어왔다.
이름을 확인하는 순간, 그동안 ‘부부 코스프레’를 하며 자연스럽게 행동하던 두 사람이 실제로는 아무 관계도 아니라는 사실이 드러났다.


여자분께 먼저 방을 안내하자 남자분이 아무렇지 않게 그녀를 따라붙었다.
그러자 가이드가 부드럽게 제지했다.

“선생님은 이쪽 방이십니다.”

그 순간이었다.
마치 알베르게 천장을 때릴 듯한 고함이 터졌다.

'야 이 18~~~~~~~~~~~~~~~! 니들이 뭔데 여기 가라 저기 가라 GR이야?'

벼락이 아니라 폭탄이 터진 듯한 소리에 순간 공간 전체가 얼어붙었다.




그리고 그날 밤 두 번째 폭탄이 터졌다.


남자는 로비에서 사람들을 하나둘 불러 모아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거의 두 시간 가까이 나에 대한 욕설을 늘어놓았다.
목소리가 너무 커서 듣지 않으려 해도 들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요지는 이랬다.
내가 “알베르게가 이런 곳인 줄 몰랐다면 호텔팩을 선택했어야죠”라고 말했다는 것과
그리고 “제멋대로 방 배정을 했다”는 불만.

그리고 부부팀을 한방에 배치한 것에 대한 불만

"도대체 부부가 뭔 특권이길래 부부를 묶어서 특혜를 줘?!"

부부팀에 끼고 싶었던 남자의 절규였다.


초반부터 터진 연이은 사건에 멘탈이 어느 정도 강해졌던 지라 이 세 가지 주제를 두 시간에 걸쳐서 늘려하는 재주를 가진 그 남자의 대단함에 감탄하고 있었는데, 도저히 참지 못할 발언이 튀어나왔다.

"그년은 쓰레기야!"


그 순간은 더는 넘길 수 없었다.
위층에서 듣고 있던 나는 내 존재를 드러내며 조용히 말했다.

“선생님, 그만하시죠. 다 듣고 있습니다.”

순간 맞은편에서 맞장구치던 다른 부부팀은 얼어붙어 내 눈치를 봤으나, 정작 문제의 남자는 멈추지 않았다.

“너, 이년. 두고 봐”

그러더니 계단을 한걸음에 달려 올라와 퍼붓기 시작했다.

‘손님은 무조건 왕’이라는 회사 방침 때문에 정면으로 대응할 수도 없었고, 나는 그저 눈앞에서 쏟아지는 욕설에 받으며 눈물을 참으며 버틸 수밖에 없었다.

“두 분이 같은 방에서 주무시는 것을 원하시면, 그렇게 해드리죠.”

그러자 그는 자기들은 그저 친구일 뿐 절대 그런 사이가 아니래

도무지 앞뒤가 맞지 않는 그들의 말과 행동에 아주 돌아버릴 지경이었다.




남자는 당장 다음 날이라도 항공편을 바꿔 귀국하겠다며 환불을 요구했고, 난 "원하시면 제가 떠나는 걸로 할게요"라고 마무리 지었다.

초반부터 이런 광풍이 몰아치니, 도저히 앞으로 남은 40여 일을 버틸 자신이 전혀 없었다.


이후 나는 방 배정 방식을 바꾸었다.

기존 짝꿍 그대로 침대는 유지하되, 방과 침대 선택은 선착순으로 정하는 것으로 원칙을 바꿨다.
남녀 분리 때문에 머리를 쥐어뜯을 일도 사라져 오히려 나에게는 조금 더 편한 구조가 되었다.


다음 날, 당장 떠난다며 소리를 지르던 남자는 결국 떠나지 않았고, 그 이후 40여 일을 함께 하며 기상천외한 스토리들을 만들어내며 최악의 진상손님으로 기록되었다.




다음 편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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