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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티아고 순례길, 그 남자와 그 여자

우연과 집착으로 감정 쓰레기통이 된 나의 기록

by ANNA

도저히 '쓰레기 같은 여자와는 산티아고 순례길을 함께 못 걷겠다' 며 다음 날 즉시 떠나겠다고 난리를 치던 그 남자는 결국 떠나지 않았고, 그 대가를 나에게 톡톡히 치르게 했다.

나는 더 이상 팀 전체가 들썩이는 소란을 만들고 싶지 않았기에, 마음 같아선 도망치고 싶었지만 어쩔 수 없이 그 둘이 '합방'할 수 있도록 최대한 눈치를 보며 배려해줘야만 했다.


하지만 그 남자의 요구 사항에 따라 방 배정을 선착순 방식으로 바꾼 그 순간부터 문제는 또 다른 양상으로 터지기 시작했다.

그들의 바라던 바는 인솔자가 정해주는 방이 아니라, 자기들이 직접 선택하는 구조에서 자연스럽게 합방하기였으나 현실은 정반대로 흘러갔다.


그 커플은 이상할 정도로 매일 꼴찌로 도착했다.
게다가 그들의 원래 짝들조차 그 커플 바로 앞전에 도착할 정도로 느렸기에 둘이 같은 방을 쓰지 못하는 날이 훨씬 많았던 데다 설상가상으로 그들이 원하던 안쪽 프라이버시 침대가 아닌 문 바로 옆 침대를 배정받는 경우가 자꾸 생기자, 그 남자는 또다시 폭발했다.

그리고 예상대로..
그는 나에게 욕설을 섞어가며 삿대질을 하며 고함을 질렀다.

또 한 번의 소동이 시작되었다.


단지 같은 방을 쓰기 위해, 내가 배정해 주는 방식 대신 ‘선착순 원칙’을 강하게 주장했기에, 일찍 도착하는 의지를 보여줄지 알았더니 대체 꼴찌가 뭐냐?

그것도 매일 꼴찌였다.

그가 바꾼 원칙 때문에 도와 줄래도 도와줄 수도 없는 상황

와.. 내가 아주 미친다.


“그러면 느린 사람들은 맨날 문간방에 자리 잡아야 해!?!?!?”

기막혀 말문이 막힐 지경이었다.


이번엔 그 소란을 나보다 더 견디기 힘들었던 손님들이 나섰다.

“원칙대로 좋은 침대를 쓰고 싶으면 빨리 오면 되잖습니까. 이제 제발 좀 그만하시죠.”

나에게는 거침없이 욕설을 퍼붓던 그가 손님의 단호한 한마디 앞에서는 순식간에 순한 양처럼 조용해져서 또다시 알베르게를 폭풍처럼 뒤 흔들던 이 사건은 일단락되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로는, 그 남자는 순례길을 걸으며 배낭에 소주를 잔뜩 넣고 다니며 수시로 마시는 데다 술이 들어가면 어김없이 주사가 터지는 타입이었다고.

하.. 이 모든 소란이 주사로 벌어진 일이었다니..




그들보다 조금 빠른 짝꿍들이 자리 잡는 대로 침대를 배정받아야 했고, 짝꿍들보다 앞서서 들어와서 좋은 자리를 배정받을 의지가 눈꼽만큼도 없는 그들은 어느 정도 포기한 듯했으나 사건은 다시 터졌다.


그 숙소는 참 독특했다.

일층 침대가 2개, 4개, 5개, 6개 이렇게 묘하게 나뉘어 있는 어디서도 보기 힘든 ‘알베르게 퍼즐 구조’였다.

어쨌거나 원칙은 원칙!
먼저 도착하는 사람이 원하는 방을 선점하는 것으로 못을 박았다.


그러자 아늑하게 2인실을 쓰고 싶은 사람들이 평소보다 두 배는 빠른 속도로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는 진풍경이 펼쳐졌다.


하자만 그보다 더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그동안 줄곧 꼴찌였던 문제의 그 커플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꼴찌를 면한 것이다.

아마도 '오늘만큼은 우리 둘만의 2인실을 쓰고 말겠다'는 결의를 다지고 평소보다 훨씬 부지런히 걸었을 것이다.


그들이 아무리 날아서 왔다 해도 늘 더 빨리 오는 사람들이 있었고 그 사이 또 방이 갈려버리고 말았다.

그들의 기대는 산티아고의 바람과 함께 날아가고 말았다.




예상했던 대로 그 남자는 나를 따로 보자고 했다.

단둘이 있는 자리라면 분명 또다시 욕설과 삿대질이 이어질 게 뻔했다.

그래서 순례길 중반을 함께하며 어느 정도 친해진 남자 두 명을 은근슬쩍 ‘증인 겸 방탄요원’으로 불러 세워 두었다.


그 남자는 내가 사람들을 불러둔 걸 눈치챘는지 불편한 기색으로 “다른 데서 얘기하자”라고 했지만 나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냥 여기서 하시죠"

결국 그는 주변의 시선 때문인지 그동안 보여주던 폭발적인 기세를 풀지 못하고 말끝을 흐리며 어정쩡하게 대화를 마무리했다.

그리고는 다시 한번,
“내일 당장 떠나겠다”라고 선언했다.
나는 담담하게 말했다.
“네, 그러세요. 제발 떠나 주세요

이제 여행은 중반을 훌쩍 넘었고 더 이상 무서울 것도 없었다.


물론 그는 이번에도 떠나지 않았다.




그 커플은 같은 여행사의 돌로미티 투어에서 처음 만났다고 했다.

그때 혼자 온 남자 둘, 여자 둘이 어울려 재미있게 지냈고, 그 이후 인천공항에서 또 우연히 마주쳤다고 했다.

그리고 기적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그 둘은 같은 날짜, 같은 코스의 산티아고 순례길 팀에 합류하게 됐다는 것이다.
모세의 기적을 능가하는 ‘우연의 연속’이었다.


그들은 겉보기에는 완벽한 부부였다.
주방에서 여자가 남자를 위해 밥을 짓고, 식사가 끝나면 나란히 서서 설거지를 했다.
식사도 같이, 이동도 같이, 어딜 가든 그림자처럼 붙어 다녔다.

누가 봐도 부부였다.

손님들 사이에서도 '둘이 불륜이네, 아니네' 말이 참 많았지만, 결국 진실은 하나님만 아시겠지


중요한 건 따로 있었다.
여자 쪽에서 같은 여행사의 '산티아고 순례길을 이미 한 번 걸어봤다'고 했다는 점이었다.
그 당시의 침대 배정 방식은 남녀 짝꿍이고 뭐고 없이 철저한 선착순이었고 그녀는 그 경험을 근거로 남자에게 말했을 것이다.

도미토리라도 우리가 같은 방을 쓸 수 있어요.

아마 그것이 그들에게는 큰 의미였나 보다.
나로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지만, 여럿이 함께 쓰는 도미토리에서 같은 방을 사용하는 것이 그리도 절박했는지..

단지 그 때문에 나를 쓰레기 취급하며 악을 쓰던 그 심리가 아직도 이해 안 된다.


하지만 그들의 열정(?)만큼은 순례길 800km보다 더 뜨거워 보였다는 건 확실하다.




도대체 얌전하게 생긴 저 여자는 왜 저딴 남자를 만나는 걸까?

저딴 남자’라는 표현은 어디까지나 인솔자인 내 입장에서의 평가였고,
연인이라는 자리에서 보면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보일 수도 있다는 걸 이성적으로는 알고 있었다.


그 남자는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마초적 기질이 선명한 사람이었다.
여자 앞에서는 놀랄 만큼 고분고분하면서도, 자기 여자를 지킨다며 불도저처럼 나서서 센 척하는 모습이 누군가에게는 ‘남자다움’으로 비칠 수도 있었겠지.

문제는 그 마초적인 기세와 과잉보호욕 같은 감정들이 전부 나를 향할 때만 날카로운 분노와 공격성으로 뒤바뀌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어느 순간 그의 감정 쓰레기통이 되어 있었다.

그가 쏟아내고, 투사하고, 분출하는 온갖 감정의 찌꺼기들이 전부 내 몫으로 떨어졌다.




어느 햇살 좋은 날 알베르게 로비에서 그 커플의 여자가 손녀에게 영상통화를 하는 장면이 눈에 들어왔다.

“오늘 할머니가 뭐 봤게? 예쁜 꽃도 보고, 구름도 봤어. 나중에 우리 **이랑 꼭 같이 걷고 싶다.”

그 목소리는 세상 다정하고 따뜻했다.

산티아고의 바람보다도 부드럽고 지친 하루를 토닥여주는 사람처럼 포근했다.


그 순간 문득 이런 생각이 스쳤다.

이렇게 예쁘게 말하는 할머니 옆에 성격은 막 나가고, 감정 조절은 안 되고, 술만 들어가면 사람을 난타하는

알콜 중독 할배가 앉아 있다는 것을 저 작은 손녀는 알고 있을까?




산티아고 순례길은 사람을 겸손하게 만들고, 때로는 사람의 민낯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길이기도 하다.


나는 그 길에서 모세의 기적 같은 우연으로 이어진 한 커플을 보았다.
그들이 서로에게 어떤 의미였고 어떤 사연을 안고 있었는지는 사실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다.

다만 확실한 건 그들로 인해 평생 잊지 못할 ‘인간관찰 보고서’를 산티아고에서 제대로 한 권 써버린 셈이다.




저겨..

다음에 여행 갈 때는 꼭 부부로 등록하세요.

인솔자가 공식적으로 싱글로 온 남녀를 같은 방에 배정할 수는 없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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