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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순례는 종이에 남지 않는다

증명서 없는 여행을 꿈꾸며

by ANNA

"산티아고 순례길의 의미는 스페인 갈리시아의 성 야고보의 무덤인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대성당으로 향하는 성지순례로 시작하였고, 세계 문화유산이 된 지금 현대에는 자기 성찰·힐링·문화 체험을 위한 도보 여행으로 확장된 것이다. 종교적 목적뿐 아니라 자기 성찰, 지속가능한 관광, 세계 각국의 순례자들과의 만남을 통해 내적 평화를 찾는 여정으로 인식된다.

모든 길의 목적지는 산티아고 데 꼼뽀스텔라이며, 북쪽 길, 은의 길, 포르투갈 길 등 여러 갈래에서 시작하는 여정이 있지만 가장 대표적인 산티아고 순례길인 프랑스 길은 생장 피에드포르에서 시작해 약 800km를 걷는 대표 경로로, 하루에 약 25km씩 한 달을 꼬박 걷는 일정으로 진행된다. "


출처 : 나무위키



필자는 지금까지 세 번 산티아고 순례길 풀코스 가이드로서 한국인 단체팀을 이끌며 그 먼 길을 함께 걸었다.


때는 언제였냐?

2019년에 방영된 '스페인 하숙'이라는 예능이 대히트를 치면서 낯선 여행지였던 산티아고 순례길에 대해 모르는 한국인이 없게 되었고, 너도나도 산티아고 순례길을 한 번쯤 걸어보고 싶다는 로망을 품게 되면서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는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꿈은 2020년 초 코로나 사태가 터지며 그대로 멈춰 섰다.

모든 항공편이 끊기고 세계가 동시에 닫혀버린 그 시기

산티아고 순례길에 대한 열망은 조용히 미뤄졌고, 사람들 마음속에서 잠시 얼어붙어 있었다.


내가 산티아고 순례길 가이드로 처음 배정된 시기는 2022년이었다.

전 세계를 공포로 몰아넣었던 코로나가 서서히 약해지던 시기라 중단됐던 항공편이 하나둘씩 살아나고, 해외여행 규제가 완화되기 시작한 때였다.
하지만 여전히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두려움이 남아 있었다.

'버스라는 좁은 공간에 오래 함께 있어도 괜찮을까?'

'귀국 전 코로나 검사에서 양성이 나오면, 혹시 오도 가도 못 하고 해외에 갇히는 거 아닌가?'


이런 걱정들 때문에 일반 패키지여행 수요는 크게 회복되지 못했지만, 놀랍게도 해외 트레킹은 폭발적인 관심을 받기 시작했다.

몸이 근질거릴 만치 참을 만큼 참았고, 왠지 야외에서 트레킹을 하는 트레킹은 전염의 위험이 좀 적지 않을까란 그 작은 기대감이 불안 위를 슬며시 덮었고, 그렇게 해외트레킹은 예상치 못한 반등을 맞았다.


그렇게 도착한 산티아고 순례길에는 이미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걷고 있었다.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순례자들은 당연히 스페인인을 비롯한 유럽인들이었고, 그다음으로 두드러지게 자리한 이들은 뜻밖에도 한국인이었다.

동양인을 마주치면 열에 아홉, 아니 거의 백에 가까운 확률로 한국인이었기에, 다른 순례자들은 국적을 판단하는 수고 없이 자연스럽게 “안녕하세요”라고 인사하곤 했다.

마치 그 말이 순례길의 또 하나의 공용어가 된 것처럼..


‘코로나 의무 검사’가 풀린 이후에는 오히려 기다렸다는 듯 더 많은 한국인들의 발걸음이 이 길 위로 모여들었다.




문제는 패키지투어에 익숙한 한국사람들은 해외트레킹조차 단체투어로 진행한다는 것이었다.

물론 중국인들과 일본인들도 단체투어로 많이 진행하지만, 중국인들은 인종 특성상 걷는 것을 극혐해 해외 트레킹에서 중국인들은 단 한 명도 찾아볼 수 없는 정도이고, 일본은 이미 해외여행 붐이 지나간 데다 장기불황까지 겹쳐 해외여행지에서 거의 볼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으니 유독 한국인 단체만 눈에 띌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한국인 단체 관광객이 폭발적으로 늘기 시작하면서 가장 먼저 나타난 문제는 숙소였다.

특히 2022년 가을부터 이 현상이 두드러졌는데, 귀국 전 ‘코로나 의무 검사’ 제도가 완전히 폐지되자 숨겨진 날개를 편 듯 많은 한국인이 산티아고 순례길로 몰려들었다.


하루에 한 팀 이상 한국인 단체투어 팀을 마주치는 건 흔한 일이 되었고, 문제는 이 단체팀들이 대부분 미리 숙소를 예약해 선점해 버린다는 점이었다.

알베르게는 이미 그들의 이름으로 차곡차곡 채워져 있었고, 개인 여행자들은 빈 방을 찾아 헤매기 일쑤였다.


이해를 돕기 위해 조금 설명을 덧붙이자면,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는 동안 대부분의 순례자들은 도미토리 형태의 ‘알베르게’라는 곳에 머문다.
전통적인 알베르게 이용 방식은 단순하다.

순례자들은 계획하지 않는다.
걷다가 더 이상 힘이 닿지 않을 때, 발길이 머무는 곳에서 숙소를 구해 하룻밤을 보내거나, 미리 눈여겨본 저렴한 공립 알베르게에 도착해 선착순으로 체크인하는 식이다.
즉, ‘오늘 얼마나 걷느냐’가 ‘오늘 어디에서 자느냐’를 결정하는, 순례길 특유의 룰이 있는 셈이다.

그런데 이 룰을 한국인 단체 관광객들이 완전히 깨버렸다.


도착하는 알베르게마다 한국인 단체의 이름으로 빈자리가 모두 채워져 있었다.
개인 순례자들은 한국인 단체가 없는 사설 알베르게의 선점이나 공립 알베르게를 잡기 위해 알베르게의 문이 열리는 시간에 맞춰 ‘오픈런’을 하는 것이 일상이 되어버렸다.


새벽 5시, 4시.
아직 해도 뜨지 않은 시간에 배낭을 메고 길에 나서야 했고, 그래도 자리를 얻지 못한 순례자들은 소방서나 학교, 체육관 같은 임시 숙소에서 몸을 누였다.

그럼에도 순례길은 늘 손을 내밀어 주었다.
이 길 위에서는 누구도 노숙자로 남겨지지 않았다.
마을 사람들의 인심이 순례자들을 위한 최소한의 온기가 되어줄 뿐이었다.


이쯤 되자 외국인 순례자들은 나에게 원망이 섞인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질문은 충분히 예상 가능한 것이었다.

한국인들은 대체 무슨 이유로 산티아고 순례길을 점령하고 있는 거야?

대부분 가톨릭 신자라 종교적인 목적으로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는 유럽인들로써는 이해가 안 되는 광경이 펼쳐지고 있는 것이었다.


워낙에 많이 들은 질문이라 준비된 답변을 해 주자면

'일단 한국은 지금 해외여행 붐이 일어나 전 세계적으로 한국인 관광객들이 많은 편이다'

'세계 어디든 갈 곳을 찾아 헤매는 한국인들은 티비 프로그램을 많이 참조하는데, 마침 코로나 직전에 방송된 '스페인 하숙'이라는 예능이 여기에 불을 당겼다'

'한국은 트레킹 문화가 발달되어 있어 전 국민들이 트레킹을 즐긴다'

'여행은 즐기지만 한국인들은 영어공포증이 심해 단체패키지 투어를 선호해'

'한국인들은 성취감과 도전감이 넘치기 때문에 무슨 운동이나 도전을 하든 인증을 꼭 해야 한다'

대충 이 정도로 설명해 줘도 잘 이해 못 하는 눈치다.




산티아고 순례길은 대부분이 평지에 가까운 길이라, 전문 산악인보다는 한국에서 둘레길을 주로 걸어온 사람들이 많이 도전하는 곳이다.
물론 종교적인 목적으로 순례를 오는 이들의 비중도 크지만, 이들 역시 둘레길에서 일종의 예행연습을 하곤 한다.
특히 많은 이들이 제주 올레길을 선호하며, 실제로 올레길을 완주한 경험이 산티아고 순례길 도전에 큰 밑거름이 되기도 한다.


두 번째 팀에서부터 손님들이 제주 올레길 완주 인증서를 가져와서 묻기 시작했다.

제주 올레길과 산티아고 순례길이 협약을 맺어 둘 다 인증하면 메달을 준다는 것이었다.

행정절차가 빠른 한국은 절차가 완료되어 있지만, 여긴 유럽. 그중에서도 느리기로 소문한 스페인이다.

여기저기 물어봐도 준비 중이라는 답변밖에 들을 수밖에 없었다.

세 번째 팀에서도 역시나 똑같은 질문을 받았고, 그때 함께 했던 현지 가이드조차 알아봤는데 아직 진행 중이라는 답변을 내놓을 수밖에 없었다.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 도착한, 그야말로 영광스러운 순간이었다.
나 역시 손님들과 함께 800킬로미터를 완주했기에, 그 감격을 온전히 나누고 있던 참이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요란스럽게 감동의 순간을 즐기고 있던 중 손님 하나가 갑자기 눈을 부라리며 따지기 시작했다.

“아니, 우리보다 먼저 출발한 팀은 메달 받았다는데요? 왜 자꾸 안 된다고만 해요? 당장 다시 알아봐 주세요.”

그 말에 나는 순간 얼어붙고 말았다.

세 번째 팀의 도착이었지만, 나 역시 방금 전까지는 완주의 전율에 빠져 있던 찰나였다.
그런데 그 감격의 순간을 가로지르듯, 폭풍 같은 원망이 들이닥친 것이다.


내 손에는 손님들의 단체 완주 인증서가 빼곡히 들려 있었다.


제주도에서도 메달을 받을 수 있지만, 꼭 스페인에서 받아야겠다고 우기는 손님들 때문에, 난 다시 제주 올레길 인증서와 산티아고 순례길 완주 인증서를 들고 감격의 순간도 미뤄둔 채 산티아고 인근을 돌면서 사실 여부를 확인해야만 했다.

여기 가라, 저기 가라, 여기도 아니다. 저기도 아니다.

결국 자그만 사무실에서 메달을 받을 수 있었다.

본인이 직접 와야 준다지만, 그간의 사정을 얘기하며 싹싹 빌어서 메달을 받고 당사자들에게 건네주는 심정은 참으로 씁쓸했다.




외국인들이 산티아고 순례길에 왜 이리 한국인이 많냐고 하는 질문에 꼭 답변하는 문구가 있다.

'한국인들은 성취감과 도전감이 넘치기 때문에 무슨 운동이나 도전을 하든 인증을 꼭 해야 한다'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으면 총두 개의 인증서가 발급되는데 그중 하나는 사리아에서 산티아고 까지 약 100킬로의 여정을 걸었을 때 받을 수 있는 노멀 인증서 그리고 그전부터 걸었을 때 발급되는 거리가 표시된 거리 인증서가 그것이다.

인증은 '크레덴시알'이라는 순례길 여권에 숙소, 바, 성당 등에서 찍는 도장 '세요'를 통해 확인한다.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던 중 일행들과 알베르게 침대 문제로 불화가 생겨 도중에 마드리드로 여행을 하고 오겠다는 손님 하나가 마음 놓고 떠날 수 있었던 것은 크레덴시알에 세요를 찍어주겠다는 일행이 있어서 그는 중간의 일탈에도 불구하고 완주 증명서를 받을 수 있었다.

걷는 도중 크레덴시알을 분실했다고 울상인 손님에게는 내 크레덴시알을 대신 건네줘서 결국 그분은 완주 인증서를 받을 수 있었다.




내가 인증을 받아 본 경험은 생애 단 한 번, ‘대한민국 백대명산’에 도전했을 때였다.

그때의 나는 인증에 집착하느라, 막판에는 완주 증명서를 받기 위해 온갖 꼼수를 동원하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이쯤 되니 내가 좋아서 시작했던 산행은 사라지고, 산은 어느새 인증을 위한 도구로 전락하고 말았다.
산행의 즐거움은 안드로메다로 사라졌고, 산행은 그저 하나의 과제, 인증을 위한 체크리스트가 됐다.

도대체 내가 산을 타는 것인지, 아니면 산이 나를 시험에 들게 하는 것인지, 누구를 위한 인증인지 회의감이 깊어졌다.


그래서 백대명산 종주를 마친 뒤, 나는 다시는 어떤 인증도 하지 않겠다고 마음먹었다.
그 결정 덕분인지 완주증명서라는 종이 쪼가리를 받지 못한 것도 전혀 아쉬움으로 남지 않았다.




‘완주 증명서’, ‘인증 메달’ 같은 것보다, 내가 무엇을 보았고, 내 마음속에 무엇을 품고 돌아왔는지가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수많은 손님들과 각양각색의 상황을 겪다 보니, 오히려 내가 산티아고 순례길의 현자가 되었다.


산티아고 순례길은 각기 다른 사람들이 각기 다른 이유로 걷는 길이다.
그렇지만, 처음 그 길을 소개할 때 가장 많이 인용되는 문장을 다시 한번 떠올려 보자.


'세계 문화유산이 된 지금 현대에는 자기 성찰·힐링·문화 체험을 위한 도보 여행으로 확장된 것이다.

종교적 목적뿐 아니라 자기 성찰, 지속가능한 관광, 세계 각국의 순례자들과의 만남을 통해 내적 평화를 찾는 여정으로 인식된다'


만약 누군가 이 길을 완주했다는 사실을
'넥아 마리야, 산티아고 순례길을 완주 했잖어!'

이럼써 평생 술자리에서 플렉스 할 ‘이력’ 정도로만 간직하려 한다면, 그 사람에게 이 길은 너무 과분하다.


진짜 순례자를 위한 공간조차 부족한 현실을 생각해서라도, 그 목적이라면 오지 않는 것이 더 나은 선택일지 모른다.

그것이 진심을 담아 길을 걷고자 하는 한국 순례자들을 덜 욕먹이게 하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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