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람 세계에서 과연 십자군 전쟁을 어떻게 보고 있을까? 나는 무척이나 궁금했다. 우리가 흔히 읽고 있는 대부분의 십자군 관련 책들은 서구인들의 역사관을 중심으로 쓰인 책들이 대부분이고 국내에 통역되어 소개된 책들 또한 대부분이 서구 중심 역사관이 반영된 책들이 소개되고 있는 것 같다. 내가 '같다'라고 표현하는 것은 십자군 관련 조사를 위해 관련 서적들을 찾아보았으나 대부분 비아랍인 출신이 쓴 책이 대부분이었고 아랍인이 쓴 책은 많이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이며 지극히 개인적인 기준해서 판단했기 때문임을 먼저 밝힌다.
조사를 해보니 당시 이슬람 세계에서는 서구에서 등장한 십자군(crusaders)이라는 표현은 존재하지 않았고 단순히 '프랑크인의 침략'정도로만 표현되고 있었다. 즉 이슬람인의 관점에서는 1차 십자군의 침략 자체가 1차 십자군이 전쟁의 명분으로 내세운 '성지 회복'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단순히 프랑크인(*서로마 멸망 후 프랑스 지역에 게르만족 계열이 건설한 프랑크왕국의 사람들을 지칭함)들이 자신들의 영토에 침입을 하여 전쟁을 일으킨 정도로밖에 생각하지 않았다. 즉 이슬람인들은 자신들의 제국인 셀주크 투르크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비잔틴 제국이 아닌 저 멀리 서유럽의 프랑크인들이 왜 전쟁을 일으켰는지에 대한 이유를 1차 십자군이 침입할 당시에는 전혀 몰랐다는 점이며 이로 인해 십자군이 성지 예루살렘을 탈환하기 위해 거쳐갔던 지금의 레바논, 시리아 지역을 좀 더 공세적으로 방어하지 않았다. 그 결과는 이미 2편에서도 설명했듯이 지리멸렬한 1차 십자군이 역시나 지리멸렬한 투르크 지방 제후들을 몰아내고 레반트 해안가를 중심으로 십자군 왕국을 건설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각 왕국 및 공국에 정착한 십자군 진영은 사라센과 비잔틴/유럽을 잇는 지중해 무역 및 육상 교통로의 요지를 차지함으로써 막대한 부를 쌓게 되고 당초 1차 십자군의 명분인 '성지 회복' 따위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첫 출정 시기에는 분명 그들도 종교적인 관념에서 성지 회복과 원죄로부터 해방되기 위해 이스라엘로 떠났을 것이나 레반트 지역에서의 경제적 이익을 목도한 이후로는 그저 현실적인 목표인 경제적 이익에만 몰두하였다.
아래 그림들은 1차 십자군의 예루살렘 탈환과 탈환 후 1차 십자군이 예루살렘 성에서 저지른 대량 학살을 묘사하였다. 1차 십자군의 만행은 살라딘이 다시 예루살렘을 탈환했을 때 가톨릭교도를 살려둔 것과는 상당히 대조적인데 바로 이런 점 때문에 살라딘이 이슬람 세계에서 영웅으로 추앙받고 있는 이유이다. 또한 살라딘이 본격적으로 연구된 시기는 제1차, 2차 세계대전 이후로 당시 유일한 이슬람 제국이었던 오스만 투르크 제국이 서구 열강에 의해 사분오열되면서 이슬람 세계의 각성과 성찰이 요구되었고 12세기 서구 열강인 프랑크족을 몰아내고 이슬람의 통일을 이룬 살라딘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게 일어나게 되면서부터 이슬람인들에게 있어서 살라딘은 우리의 이순신 장군 같은 존재로 우뚝 서게 되었다.
15c Jean Colombe作 "First Crusader's attack on Antioch"
Rivers of Blood: An Analysis of One Aspect of the Crusader Conquest of Jerusalem in 1099
1차 십자군의 결과 위에서도 잠깐 설명을 했지만 하기와 같이 십자군이 지배하는 예루살렘 공화국, 트리폴리 백작령, 안티오크 공국, 에데사 백작령이 수립되었고 그 과정에서 점령지 내 이슬람인들에 대한 대학살을 자행하면서 반 십자군 투쟁 의식이 서서히 생겨나기 시작했고 '지하드(성전)'를 명분으로 이슬람 세계를 통합하고자 했던 걸 세출의 영웅들이 등장하면서 대 십자군 항쟁이 본격화되기 시작하였다. 그 중심에는 셀주크 투르크의 모술 총독으로 장기 왕조(Zangid)를 세운 아마드 앗 딘 장기(재위 1127~1146)와 그의 아들 누르 앗 딘(재위 1118~1174) 있었다.
1차 십자군 전쟁의 결과물로 탄생한 십자군 왕국, 백작령, 공국들
아마드 앗 딘 장기는 에데사 공국이 다른 십자군 왕국보다 공략이 쉽다는 것을 간파하고는 동북방 투르크족과 싸우는 것을 가장하여 출정하는 척하였는데 이 미끼를 문 에데사 공국의 조슬랑 2세가 방심하여 사냥을 떠난 뒤 말머리를 돌려 에데사로 전격적으로 진격하였다. 공성전이 시작된 후 3주 만에 에데사 성은 함락되었고 이는 이슬람 세계는 물론이 가톨릭 세계에도 큰 반향을 일으켜 2차 십자군 전쟁의 도화선이 된다. 하지만 1146년 반란군을 진압하는 와중에 자신의 막사에서 잠을 자는 중에 어이없게도 자신의 환관에게 칼로 살해되는 운명을 맞이하고 만다.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장기왕조가 큰 수렁으로 빠질 수도 있는 상황이었으나 장기의 둘째 아들이었던 누르앗 딘(*신앙의 빛이라는 뜻임, 본명 마흐무드)에 의해 빠르게 수습되었고 조슬랑 2세가 장기가 죽은 틈을 타 에데사 성을 되찾았는데 다시 조슬랑 2세를 쫓아내고 에데사 성을 재탈환함으로써 누르 앗 딘 또한 아버지인 아마드 앗 딘 장기만큼이나 이슬람 세계에서 큰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아래 지도는 누르 앗 딘의 통치 시기 장기 왕조의 전성기를 이룬 시기로써 지금의 시리아와 이라크 북부 지역이 장기 왕조의 옛 영토였으며 수도 알레포(Aleppo)를 중심으로 동쪽의 모술(Mosul), 남쪽으로는 아라비아반도 북쪽까지 뻗어있었음을 보여준다. 장기 왕조가 이렇게 단기간 내에 영토를 확장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2차 십자군의 오판이 결정적이었는데 누르 앗 딘이 즉위할 당시 장기 왕조는 다마스쿠스의 실력자 우나르와는 적대적인 관계였으며 오히려 십자군 왕국인 예루살렘 왕국과 협력관계를 맺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슬람 장기 왕조에 의해 무너진 가톨릭 십자 군령 에데사 공국을 구원하기 위해 조직된 2차 십자군은 에데사를 먼저 공격하든 아니면 예루살렘 왕국을 근거지로 삼아 장기 왕조의 심장인 알레포를 공격했어야 했다. 그러나 2차 십자군을 이끌었던 프랑스 카페 왕조의 루이 7세와 신성로마제국 콘라트 3세는 엉뚱하게도 알레포를 공격하지 않고 앞서에서도 언급했지만 예루살렘 왕국과 협력관계를 맺고 있던 다마스쿠스 성을 공격하는 어이없는 군사행동을 실행한다. 이는 당시 2차 십자군을 조직한 이유인 십자군 왕국 지원이라는 목표에서 벗어나 새로운 십자군 왕국을 건설하려는 야심에서 비롯된 것이리라 판단되는데 다마스쿠스는 예로부터 페르시아와 비잔틴 제국/유럽 지역 그리고 아라비아 반도를 잇는 중계 무역지로 상업이 번성하여 상당한 부를 쌓고 있던 지역이었기 때문에 다마스쿠스를 점령함으로써 얻게 되는 경제적 이익이 알레포를 공격함으로써 얻게 되는 종교적 이익보다 높다고 판단을 하였기때문일 것이다.
장기 왕조 영토(빨간색으로 표기)
결국 이러한 오판은 장기 왕조의 누르앗 딘이 다마스쿠스를 지원하게 됨으로써 오히려 레반트 지역의 이슬람 세계를 단결하게 만들었고 1149년 안티오크 공국의 이 나브 전투의 승리를 시작으로 안티오크 성을 함락하여 안티오크 공국을 멸망시켰으며 이로 인해 누르 앗 딘은 이슬람 세계에서 바그다드의 명목상 종교적 권위자인 칼리프와 버금가는 이슬람의 영웅으로 추앙을 받게 되었고 셀주크 장기 왕조의 2대 술탄으로서의 입지도 강화되었다. 또한 1154년 다마스쿠스의 우나리가 사망하자 마땅한 후계자가 없었던 상황에서 다마스쿠스 시민의 열열한 지지를 받으며 누르 앗 딘이 무혈입성하면서 다마스쿠스도 자신의 영토로 편입하였다.
누르 앗 딘의 이나브전투
에데사와 안티오크를 차례로 점령한 누르 앗 딘은 지하드를 명분으로 이슬람 세계의 통합을 추구하였고 그 선두에는 자신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였으며 통합된 이슬람 세계를 기반으로 십자군 왕국을 레반트 지역에서 쫓아내어 진정한 이슬람 제국의 술탄으로 등극하고 싶어 했다.
그리고 이 즈음에 이집트에서는 살라딘이 세상 밖으로 나오게 되는 정치적 변곡점이 일어나게 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