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처드 1세는 야파(현재의 텔아비브)에 머무르면서 예루살렘을 공략을 위한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정작 예루살렘이 아닌 자신의 근거지인 영국 왕국에서 터지고 있었다. 정확하게 말하면 프랑스 내 자신의 영지에서 마음속으로 의심을 떨쳐낼 수가 없었던 프랑스 왕 필립 2세가 드디어 문제를 일으키기 시작한 것이다. 리처드의 아크레 상륙한 이후 강력한 리더십으로 단 3일만에 아크레성을 함락시키자 필립 2세는 제3차 십자군에서의 역할이 미미할 것임을 직감했던지 아니면 리처드가 팔레스티나 지역에서 이슬람 세력과 전쟁에 집중하는 상황을 내심 반겨서인지 아크레성을 함락한 이후 며칠 만에 돌연 프랑스로 떠나버렸다. 프랑스에 도착 후 필립 2세는 프랑스에서 조용히 힘을 기르며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었고 리처드가 야파를 수복하고 예루살렘으로 공격을 준비하던 시기인 1191년에 드디어 프랑스 내 리처드 영지를 침공하기 시작하였다.
이미 전편에서 언급을 하였지만 3차 십자군을 결성하기 전 영국 리처드 1세와 프랑스 필립 2세는 프랑스에서 전쟁 중이었던 상황이었다. 다만 로마 교황의 입장에서는 제2차 십자군의 실패 후 3차 십자군 결성을 서두르고 있었고 유럽 각 지방 영주들이 주도한 1, 2차 십자군의 한계를 체감한 상황에서 유럽의 국왕들이 직접 3차 십자군을 결성하도록 독려하고 있었기에 영국과 프랑스 간의 전쟁을 잠시나마 중단시킬 필요성이 있었다. 이로 인해 교황이 직접 프랑스와 영국 왕 사이에서 중재 역할을 하며 십자군 원정 중에는 서로의 영토에 침범을 하지 않는 조건으로 제3차 십자군 원정이 시작되었는데 필립 2세는 이를 양국 간의 약속을 어기고 리처드가 이슬람 세력과 성전을 치르고 있는 와중에 프랑스 내 리처드 영지를 침공한 것이다.
당시 영국 왕인 리처드 1세는 아버지 헨리 2세와 어머니 알레오노르의 영지를 이어받아 지금의 영국의 대부분의 지역과 프랑스 땅의 50% 정도를 지배하고 있었다. 이때의 시기를 일명 앙주 혹은 플랜태저넷 제국(영국 Angevin Empire, 프랑스 Empire Plantagenêt / 앙주 제국이 '제국'인지에 대한 여부는 논쟁의 여지가 있음을 알린다.)이라 일컫는데 다른 제국들이 군사력이라는 강력한 무력을 사용하여 타 지역의 왕 또는 제후들을 복속시켜 하나의 제국으로 건설하였다면 이 앙주 제국은 유럽 귀족 가문 간의 결혼 동맹으로 인해서 각 가문에 속해 있던 유럽 내 각 영지들, 각 가문들과 쌍무적 주종관계를 이루며 무력을 제공한 각 지방 영주들 그리고 영주들의 사적 재산으로 여겨진 농노들이 하나의 가문(여기서는 앙주가, House of Angevin) 아래로 자연스럽게 합쳐지면서 기존 영국이라는 안정적 정치 기반 위에 프랑스 내 봉건 영지/영주/농노/앙주 가문의 가신 세력들이 편입되면서 일견 제국의 모습을 띄게 되었다. 이 제국의 영역은 영국은 물론이거니와 아버지인 헨리 2세로부터 물려받은 프랑스 내 노르망디(Duke of Normandy)와 앙주(Count of Anjou)를 시작으로 어머니인 알레오노르가 자신의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프랑스 남부 아키텐(지금의 보르도 지역) 지역까지 이르렀는데 단순히 물리적 개념의 영토의 대소 측면 외에도 경제적 측면에서도 농업 중심이 대부분 남부지역(예를 들어 아키텐 지방 내 보르도 지방)에 집중되었기에 북동부 지역 중심으로 직속령을 두고 통치하던 프랑스 왕가보다 경제력에서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을 정도였다.
앙주 제국의 영토
이런 정치/경제적 상황에서 프랑스의 왕인 필립 2세의 입장에서는 3차 십자군 원정 이전 리처드 1세와 십자군 전쟁 동안에는 양국의 영토를 침범하지 않겠다고 약속을 했음에도 프랑스 내 리처드의 영지를 탐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리처드 1세가 영국에 머무르고 있었다면 절대 프랑스 내 리처드 영지를 침공할 엄두도 내지 못하였을 것이나 레반트 지역에서 예루살렘 공략일 위해 발이 묶여 있는 리처드 1세의 상황을 최대한 활용하고 싶었던 필립 2세는 리처드 1세가 아르수프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고 야파를 수복한 해인 1191년 가을에 노르망디 지방을 먼저 침공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리처드의 동생 존이 프랑스 필립 2세와 손을 잡고 프랑스 내 자신의 영지를 침공하면서 오직 예루살렘을 수복하기 위해 무작정 전쟁을 지속할 수도 없는 상황이 되었다.
그러나 리처드는 영국의 왕이기도 하지만 3차 십자군을 이끌고 있는 총대장으로서 3차 십자군 전쟁을 마무리하지 않고서는 영국으로 떠날 수도 없음을 알고 있었다. 우선 전쟁을 어떻게든 끝내야 했고 강력한 무력을 사용하여 살라딘을 곤경에 빠뜨린 후 추후 있을 협상의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여 예루살렘 수복은 현실적으로 어려운 것이었고 적어도 3차 십자군의 총대장으로서 기독교 세력에게 아득이 되는 결과물글을 얻어내고 싶었다. 1191년 야파 공략에 뒤이어 이집트 국경과 맞닿아 있는 아스칼론(Ascalon), 가자(Gaza) 및 다룸(Darum)까지 십자군 지배 영역을 확장함으로써 이집트에서 예루살렘으로 이어지는 살라딘의 보급로를 차단함과 동시에 살라딘의 경제적 기반인 이집트 지역을 언제든지 공격할 수도 있다는 메시지를 살라딘에게 던졌다. 지금의 레바논, 아스라엘 그리고 이집트 국경에 이르는 방대한 해안 항구도시를 차례로 정복함으로써 후방의 보급로 확보, 이집트 및 해안으로부터 예루살렘으로 이어지는 이슬람군의 보급로 차단이라는 목표를 이룸과 동시에 안정화된 후방을 바탕으로 예루살렘을 향해 3차 십자군을 천천히 이동시켰다. 이동을 하되 이동 간에 파괴된 성채를 보수하면서 군대를 이동시켰는데 이는 혹시 모를 후방의 공격으로부터 또는 전방에서의 패퇴시 십자군의 퇴로를 확보하고자 함이었다.
드디어 1992년 어느 여름 리처드의 3차 십자군은 예루살렘으로부터 15km 지점인 베이트누바(Beit Nuba)지역에 진을 치며 예루살렘을 공격하기 위한 마지막 진열을 정비하였다. 군대를 이동시키되 한편으로는 살라딘과 전쟁 종식을 위한 강화 협상 또한 진행해 나갔다.
베이트 누바(Beit Nuba) 위치
살라딘은 십자군이 예루살렘에 도착하기 전 이미 주변의 모든 우물에 독을 풀어 식수로 사용하지 못하게 하는 한편 수만의 이슬람 대군을 예루살렘 성에 집결시켜 수성을 위한 대비를 만반히 한 상태였으나 가능하면 리처드와의 전면전은 피하고 싶었기에 리처드와 강화협상을 계속해나갔다. 물론 살라딘은 전면에 나서서 강화협상을 하지는 않았고 살라딘의 동생인 알 아딜이 전권대사로서 리처드와 막후 협상을 진행하였다. 리처드는 베이트 누바까지 진격을 한 이후 예루살렘 공격 결정을 쉽게 내릴 수 없었다. 만약 예루살렘 공략이 단기간 내에 끝난다면 문제가 없을 것이나 예루살렘 성에서 조금이라도 시간을 지체한다면 해안으로부터 내륙으로 많이 진입한 상황에서 후방으로부터의 보급로가 이슬람군의 후방 교란으로 끊길 가능성도 있을 뿐만 아니라 무더위로 인한 식수 부족으로 인해 자칫 살라딘의 이슬람군에게 대패할 수 있는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었다.
비록 예루살렘 탈환이라는 대의를 위해 3차 십자군 결성 및 이슬람과의 성전을 주도하였으나 자신의 잘못된 결정으로 팔레스티나 지역에서 어렵게 이어온 기독교 세력의 명맥이 끊기는 것을 우려한 리처드는 결국 예루살렘 성을 뒤로 회군을 결정하였다. 그리고 야파에 머물며 살라딘과의 전쟁 종식을 위한 강화 협상에 집중하였고 결국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강화 조약을 체결하였다.
첫째, 예루살렘은 이슬람 측에 속한다는 것을 양쪽이 모두 인정한다.
둘째, 베이루트(지금의 레바논 수도)를 시작으로 야파까지의 해안 지역은 십자군령에 속한다. 또한 해안지방에서 다소 떨어진 육지 쪽에서 세워진 종교 기사단들의 성채도 유지하는 것을 인정한다.
셋째, 십자군령으로 인정된 해안지역에서든 이슬람령인 지역에서든 경제 교류에 한해서 자유롭게 상행위가 가능하다는 것과 기독교 순례자들의 자유로운 성지 예루살렘 방문을 허락한다.
3차 십자군 결과로 탄생한 예루살렘왕국의 영토
참고로 양측이 체결한 상기 강화 조약의 유효기간은 3년 8개월이었으나 3년 8개월 이후 26년간 예루살렘 왕국을 기반으로 한 기독교 세력들과 이슬람 세력들은 전쟁을 하지 않았다.
분명 리처드의 3차 십자군은 예루살렘 수복이라는 최대의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기 때문에 실패한 원정이었다고 볼 수도 있다. 다만 살라딘의 등장 이후 이슬람 세력의 공세로 예루살렘 왕국 및 기타 기독교 공국/백작령 대부분이 이슬람 세력의 수중에 떨어졌으나 리처드의 강력한 리더십으로 잃었던 대부분의 옛 기독교 세력의 영토를 회복함과 동시에 레반트 지역 내 기독교 세력의 명맥을 유지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준 것 또한 사실이다.
만약 필립 2세가 프랑스에서 전쟁을 일으키지 않고 리처드가 예루살렘을 탈환하는데 집중하도록 해주었다면 역사는 어떻게 되었을까? 강화 조약 체결 후 이내 살라딘의 사망으로 당시 예루살렘을 통치하던 이슬람의 통일 왕조인 아이유브 왕조가 혼란기를 겪었기에 예루살렘을 이슬람 세력으로부터 재 탈환할 수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예루살렘 지역에서 자체의 강력한 무력을 가진 군대를 보유하고 있지 않는 이상 그리고 예루살렘을 둘러싸고 있는 이슬람 세력들이 분열되어 있지 않는 이상 이 지역에 강력한 이슬람 제국이 탄생한다면 십자군만으로 예루살렘을 지켜내기는 어려웠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