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누굴 구한 걸까.

by 롸잇테리언

PART 1. 기획회의

③ 누가 누굴 구한 걸까.






솔루션 프로그램.

말 그대로 뭔가 해결해야 할 일이 있는 사람이

나오는 방송이라는 뜻이다.


그것이 돈이든, 자녀 교육이든, 부부 문제든,

병이든. 공개적으로 꺼내기 어려운 이야기를

세상에 드러내려는 이들은

각기 다른 이유로 간절했다.

그리고 나는 그 간절함의 무게를 재고,

재단하는 일을 맡고 있었다.






전화 제보가 꽤 많던 시절이었다.

(20년 가까이 지난 이야기라는 것이 실감 난다.)


프로그램 말미에 나가는 제보 전화를 보고,

달력이나 배달 음식 전단 뒷면에 받아적었을

02- 전화번호는 누군가에게는

말 그대로 생명의 전화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우리는 매주 기적을 그렸고,

함께 희망을 찾아드리겠다고 외쳤으니까.


그날, 내가 받은 전화 역시

누군가의 희망이 될 수도 있었다.


“여보세요? 방송국 맞습니까?”


할머니 목소리였다. 절로 힘이 빠졌다.

경험적으로 할머니나 할아버지의 제보 전화는

아이템과는 거리가 멀었다.

(생각보다 방송국 전화번호를

114처럼 쓰시는 경우가 많다)


긴장했던 어깨를 내리고

상냥하지만 다소 늘어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 말씀하세요.”


“방송 보니 우리 손녀 같은 애도

나오는 것 같길래...”


할머니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나도 모르게 자세를 고쳐 앉았다.



[6살, 작년부터 다리에 힘 풀리기 시작,

어릴 때부터 할머니 혼자 양육,

부모 소식 모름, 대학병원 가본 적 없음.

천안 거주]



선배는 아무런 진단도 받지 않은

아이라는 점에 주목했고,

PD는 아이 사진을 좀 보내 달라고

해보라고 했다.


잠시 후, 휴대폰으로 사진 한 장이 전송됐고,

나는 보자마자 ‘방송되겠다’라는

약은 마음을 품었다.


아이의 얼굴이 누가 봐도

예쁘장했기 때문이다.


PD는 사전 미팅을 잡아달라며

사파리 점퍼를 주섬주섬 입더니,

작은 캠과 테이프 몇 개를 챙겨 나갔다.

여차하면 오늘부터라도 찍을 테세였다.


프로그램에서 아이템을 잡는다는 건,

작가의 업무 중에 못해도

70%쯤은 완료한 것이므로

선배와 나는 해방감을 느꼈다.


우리는 모처럼 대낮에 테이크아웃 커피를

한 잔씩 들고

벚꽃이 몽글몽글 맺히기 시작한

여의도 공원을 하염없이 걸었다.


하지만, 자유는 오래가지 않았다.

PD에게 걸려 온 전화를 받은

선배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집이 40평대라고?

아... 본인 집은 아니고? 어...”


선배 옆에서 머릿속으로

아무리 계산기를 두드려봐도,

40평 대 아파트에 사는 가족이

우리 프로그램에 출연한 적은 없었다.


걷지도, 어딘가에 앉지도 못한 채로

오래오래 통화를 하던 선배는

휴대폰을 한 손으로 구기면서 말했다.


“촬영 접는대. 집이 40평이 넘는다잖아.

그림 안 나오지.”


“할머니 집 아니라는 거 같던데요?”


“어. 잘난 자식이 하나 있나 봐.

그 자식이 살라고 집 하나 비워줬다는데

애랑 거기서 둘이 산대.”


“할머니 돈도 아니고,

애는 지방이라 대학병원도 못 가봤다는데....”


“우리는 사람들이 천원 이천 원씩

기부하게 만드는 방송이야.

40평 대 사는 사람들을 보고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겠니?”


순간 머리에 할머니의 목소리와

아이템 파일에서 봤던 몇 가지 병명이 스쳤다.

하지만,


“앵벌이가 따로 없네.”


다 녹은 아이스 커피를 들고

자조하는 선배를 보며,

나는 더 이상의 변호를 그만두었다.


선배 말이 맞았다.

도움받는 사람들은 불쌍해야 했다.

큰 집에 살지 않고,

부모 중 적어도 한 명이 부재하고,

아이들은 어두운 면과 의젓한 면이

동시에 있는 편이 좋았다.


외모가 예쁘면 금상첨화였다.

아름다운 것은

비극을 더 비극적으로 만드니까.


사람들은 드라마에서나 볼 법한 사람들이

실제로 등장해야만,

눈물샘과 지갑을 동시에 열어주니까.


눈물 젖은 지폐가 많이 모일수록,

더 많은 것들을 바꿀 수 있다는

선배의 말은 반박할 수 없는 진실이었다.


사무실로 돌아와 할머니께 전화로

회사의 사정을 에둘러 설명했다.


그러면서도, 서울대에 있는 모 교수님을

예약해서 꼭 찾아가 보시라고

오지랖을 부렸다.


대학병원에는 사회사업팀이라는 것도 있으니,

찾아가서 문의 해보시라고 덧붙이며.


최하위 포식자가 할 수 있는 솔루션이란,

고작 그런 거였다.


그 뒤로 나는 그야말로

‘앵벌이’ 같은 생활을 했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 중 카메라 앵글에

들어올 사람을 갈라내는 일은

늘 어렵고, 지나치게 쉬웠다.


제1 조건은 언제나 ‘불쌍할 것’.


간혹, 소신껏 아이템을 채택하고

밀어붙이는 이들이 있긴 했다.


팀장은 그들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나는 몰래 흠모했다.


그리고, 내가 그 아이를 만난 것 역시

그런 PD 덕분이었다.


이상하게 수 개월간

지우지 못했으면서도

방송용 아이템은 아니라고 생각했던

얇은 취재 파일을

그는 덥석 받아쥐었다.


“내가 갈게.”


귀를 의심했다.

첫 줄에 떡하니

[15살. 못 걸음]을 적어놨었기에.


더 이상 귀엽단 말이 나오지 않는

중학생 남자아이. 걷지 못하니

촬영 장소도 제한적일 수 밖에.


‘프로 앵벌이’의 눈으로 봤을 때,

대중의 마음을 움직이기 어려운 사례자였다.


“PD님, 근데 못 걷는 아이거든요....”


그는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힘들겠네.”


그렇지. 가도 힘드실 거예요.

대꾸하고 싶은 것을 꾹 참았다.


“애가 얼마나 힘들 거야 지금.”


얼굴에 열감이 느껴졌다.

동시에 목구멍에 걸려있던 말이

쑥 들어갔다.


경남의 한 소도시에서 진행된 촬영은

2주를 훌쩍 넘겨 한라산에서 끝났다.


그 보름 동안, 걷지 못하는 아이의 동생은

형과 같은 병이라는 진단을 받아

어른들을 충격에 빠뜨렸고,

걷지 못하는 아이는 제작진과 가족,

민간 산악회의 도움을 받아

상상 속에만 그렸던 풍경들을 마주했다.


그리고 마지막 촬영 날,

이 등에서 저 등으로 이리저리 업혀 오른

한라산에서 아이는 갑자기 벅차오른 듯,

아무도 주문하지 않은 노래를 시작했다.



난 난 꿈이 있었죠

버려지고 찢겨 남루하여도

내 가슴 깊숙이 보물과 같이 간직했던 꿈



아이는 촬영 내내 단 한 번도 불쌍하지 않았다.

대신 우리에게 알려주었다.


가난하거나 몸이 아픈 사람도

행복할 수 있다고.

생각보다 웃는 날도 많다고.

당신들이 그렇듯이,

때론 나도 아주 큰 꿈을 꾼다고.

설사 그게 이뤄질 수 없는 꿈이라 해도.


D군은 그렇게 두 다리 없이도

사람들의 마음속으로 씩씩하게 걸어 들어갔다.


나는 그 후로 꽤 오랫동안,

이런저런 말들에 흔들릴 때마다

빛바랜 영상을 찾아내

그 아이의 노래를 듣곤 했다.



이쯤 되면 궁금해진다.

그때 널 구한 것이 내가 맞을까.

대체 누가 누굴 구한 걸까.



기적이 있다면,

서른이 훌쩍 넘었을

D군의 안부를 묻고 싶은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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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 금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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