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이 찾아왔다. 곧 3월도 올 것이다.
잊고 살다가도
이 시기만 되면 몸에 힘이 들어가는 걸 보면,
나는 아직 다 잊지 못했나 보다.
애꿎은 목덜미만 온종일 주무르고 있다.
2012년, 나는 스물네 살이었다.
당시 최고의 인기를 자랑하던
프로그램의 일원이었고,
5년 차에 접어들며
한창 깡 좋고 감 좋은 시절이었다.
선배들은 입을 모아 내게 중요한 시기라고 말했다.
나 역시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방송계에는 3, 6, 9라는 말이 있는데
3년 차에 한 번, 6년 차에 한 번,
9년 차에 한 번 위기가 온다는 뜻이다.
3년 차에 위기가 오는 경우는
주로 ‘휴일’이나 ‘보수’에 대한 불만을 느껴
떠나는 이들이다. 셈이 빠르고
똑똑한 친구들이
가장 많이 이탈하는 구간이다.
6년 차의 경우는 조금 다르다.
본인이 책임져야 할 것들이 많아지면서,
‘내가 이 업무를 지속할 수 있을까’ 같은
불안감에 시달린다.
아이템의 채택 여부에 숨죽이던
조무래기 시절을 벗어나,
홀딱 벗은 심정으로 매주 시청률이라는
성적표를 받아들어야만 한다.
마지막으로 9년 차는 주어가
‘나’에서 ‘당신’으로 바뀐다.
‘당신이 나를 계속 고용해 줄 건가’에
방점이 찍히는 연차로,
타의에 의해 피라미드에서
내려와야 하는 일이 생긴다.
6년 차로 넘어가는 마의 5년 차 관문.
운 좋게 순항하는 배에 올랐으니,
이제부터는 온전히 내 몫이었다.
세상의 온갖 이야기를 실은
만물상 같던 그 프로그램은,
바람 한 점 없는 바다 위를
종횡무진 누비며
기세 좋게 세상을 유람했다.
바람은 엉뚱한 곳에서 불어왔다.
당시만 해도 메인작가의 힘이
절대적이던 시절이었다.
집에도 가지 않고, 밥도 먹지 않는
그를 따라 우리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함께 사무실에 박제되어 갔다.
불만이 많은 언니들과 달리,
나는 차라리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집에 가는 것이 두려웠다.
본인의 병이 ‘자식들의 간’을 이식받아야만
나을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뒤,
치료를 중단하고 자신을 방에 가둔
아빠를 마주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에.
그냥 안 들어가기 좀 그랬는데,
마침 일이 많으니 반갑기까지 했다.
구실이 좋으니, 피곤하다는 이유로
집 대신 동료들의 자취방에
신세를 지는 날이 늘어났다.
아빠의 시계가 몇 시를 가리키고 있는지,
힘없이 가는 초침이
마침내 어디에서 멈추게 되는 건지
궁금해 하지 않는 채로
오늘 같은 내일을 살고,
내일 같은 오늘을 살았다.
2월 2*일. 그날은 내 생일이었다.
중국으로 출장 간 남자 친구가 보낸
케이크가 사무실에 도착했다.
허전하던 마음이 케이크 하나에
사르르 녹았다.
일찍 사무실을 벗어나지 못한 것은
매한가지였지만
썩 나쁘지만은 않은 생일이었다.
저녁 시간이 가까워졌을 무렵,
휴대폰 진동이 울렸다. 아빠였다.
생일 축하한다는 말이라도 하려는 걸까.
고민하느라 진동음이 길어지자,
메인작가가 내 쪽을 신경질적으로 쳐다봤다.
복도로 걸어 나가면서
얼결에 전화를 받았다.
“아빠야....”
어, 짧게 대답하고 숨을 죽였다.
“이제 얼마 안 남은 것 같아....편하게 가고 싶어...”
“....”
아빠, 나 오늘 생일이야.
꼭 지금 그런 말을 해야겠어?
목구멍으로 튀어나오려는 말들을
가까스로 참았다.
“아빠 나 지금 일해. 나중에 통화해”
전화를 끊고 사무실이 아닌 거리로 나갔다.
외투도 걸치지 않은 채로,
칼바람 부는 여의도 공원에 걸터앉아
나는 무슨 생각을 했던가.
나를 세상에 태어나게 한 사람이,
자신이 만든 세상을 떠나려 하고 있다.
휑한 차림 그대로 막차를 타고 집으로 향했다.
고요한 불안으로 뒤덮인 집에서는
익숙한 냄새가 났다.
김치찌개와 엄마가 내다 팔 김말이와
지나치게 파우더리한
섬유유연제 향이 뒤섞인 냄새.
그건 내가 잊고 살았던,
가족의 냄새. 아니, 나의 냄새였다.
굳게 닫혀있는 안방 문을 열었다.
아빠는 침대에 누워 있었다.
눈을 감은 건지, 뜬 건지,
숨을 쉬는 건지, 마는 건지
알 수 없는 모습으로.
“나 왔어.”
우리는 그날 밤,
불도 켜지 않은 채로 긴 대화를 했다.
어둠을 가면처럼 뒤집어 쓴 모습으로.
서로를 볼 수 없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너 결혼하는 거 보고 싶었는데....”
평생 거칠고 무뚝뚝했던 아빠였다.
그런 아빠가 내게 자신이 할 수 있는
가장 부드러운 말로
마지막 인사를 전하고 있었다.
그건 미안하다는 말로도,
사랑한다는 말로도,
나에게 와줘서
고마웠다는 말로도 들렸다.
그래서 나는 이것이 결국
생일 축하한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로부터 한 달 뒤, 아빠는 떠났다.
휑한 빈소에 프로그램명이 적힌 화환이
먼저 도착하고,
팀원들이 서둘러 달려왔다.
내색한 적 없었으니,
그들에겐 갑작스러웠을 부고였다.
엉덩이를 들썩거리며
안절부절못하는 팀장에게 다가갔다.
“대본은 쓸게요.”
팀장은 놀라면서도 마땅한 대답을 찾지 못했다.
모레가 방송이었다.
예정대로라면 오늘 우리는
편집실에서 머리를 싸매고 있었을 것이고,
작가들은 내일 중으로
대본을 넘겨야 했다.
3주 넘게 취재와 촬영을 담당한 내가 아니면,
대본을 완성할 사람이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PD님도 고생했고,
촬영해 준 사장님들한테도 미안한 일이잖아요.”
팀장은 내가 ‘촬영에 협조해 준 사람들’에 대한
책임을 이야기하자,
부지런히 떨던 다리를 멈춰 세웠다.
그리고 내 어깨를 힘껏 감싸 쥐었다가, 놓았다.
다음날 밤, 어른들이 술에 취해 잠든 사이
나는 슬그머니 노트북을 꺼내 대본을 썼다.
시간은 어디에나 똑같이 흐르는 법이어서
금세 동이 텄다.
웅크려 자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꿈틀거리는 것을 보며,
서둘러 메일을 전송했다.
그리고 발인을 앞둔 아빠의 영정 앞에
향을 몇 개 피웠다.
아빠와 함께 쓴 대본은
그 해 최고 시청률을 기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