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연아 안티클럽

by 롸잇테리언



PART 1. 기획회의

① 김연아 안티클럽






2007년 크리스마스이브.

스무 살의 나는 메이커 없는

노트북 하나를 품에 안은 채로

여의도에 첫 발을 들였다.


비슷비슷한 차림새로 걸음을 재촉하는

사람들을 뚫고, 황량한 여의도 공원을 지나

방송국 건너편에 있는 낡은 빌딩으로 들어가니

<00 프로덕션>이라는 줄 간판이 보였다.


문 앞에서 서성이는 나를 봤는지,

전화기를 어깨에 낀 채로,

노트북에 연신 뭔가를 받아적던 여자가

손을 까딱했다.


얼굴과 상냥한 목소리가 영 어울리지 않는다, 고

생각하던 찰나

그는 전화를 끊고

자신의 옆자리에 짐을 풀라고 했다.


그리고 정확히 한 시간 뒤,

나는 그와 똑같이 전화기를 어깨에 낀 채로

노트북에 뭔가를 받아적는 사람이 되어있었다.




그 즈음엔 ‘88만 원 세대’라는 화두가

신문과 방송을 뒤덮었고,

‘아프니까 청춘이라는’ 자기 위로서가

서점을 휩쓸었다.


때가 어느 땐데 88만 원을 쥐여주냐고

분노하는 어른들 앞에서

나는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어야 했다.

나의 첫 월급은 80만 원,

그마저도 방송이 4번 모두 나가야

온전하게 찍히는 숫자였다.


회당 20만 원 짜리 막내가

‘88만 원 세대’의 아픔을 감히,

뭐라고 말할 수 있단 말인가.

나는 88만 원이라도 받고 싶었다.


현실이 팍팍할수록, 사람들은

고단한 현실을 잊게 해 줄

아름다운 드라마를 찾았다.

지금은 '피겨 여왕'이 된

김연아 선수가 고등학생이던 무렵,

내가 있었던 방송국에서는 그를

일찌감치 저점 매수하는 데 성공했다.

(당시에는 ‘피겨 요정’으로 불렸다.)


나도 그를 좋아했다.

나와 두 살 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데,

얼음 위를 우아하게 가르는 그는

다른 세계의 사람 같았다.

백 권이 넘는 테이프를 일일이 타이핑하며

밤새 프리뷰를 하다가도,

김연아 선수가 나오면

숨을 멈추고 화면을 응시했다.


하늘하늘한 소녀가 얼음을 발로 탁, 차고 올라

빙그르르 돌고 가뿐하게 착지하는 모습은

어쩐지 가슴 벅찬 감동이 있었다.


하지만, 그의 경기가 편성표에 올라오면

팀장과 선배들은 인상을 찌푸렸다.

이유인즉, 김연아 선수의 경기가 중계되는 날이면

우리 프로그램이 결방을 맞게 되었기 때문이다.

(유독 요일이 겹쳤다.)


이 경우 방송 작가들의 보수는 한 주만큼 차감됐다.

(실제로 매일 출근하고 40만 원, 60만 원을 받은 달도 있었다.)


그런 달이면, 대머리인 프로덕션 대표는

막내 작가들만 데리고

근사한 레스토랑에 가서

꼭 ‘봉골레 파스타’를 사주었다.


지금 같으면 그냥 돈으로 주세요, 라고 할 텐데.

그때는 그것이 우리를 위한

정성스러운 호의라고 생각했다.

대표 본인의 미안함을 덜기 위한 행위라는 것은

한참이 지난 후에 깨달았다.


그날도 그런 날 중 하나였다.

줄담배를 태우고 온 팀장이 말했다.


“얘들아, 우리 오늘 소주나 마시자. 결방 맞았다.”

경기 뒤에 붙여 새벽에라도 튼다더니,

결국 결방인 모양이었다.

결방 됐다는 표현 대신 '결방 맞았다'는

표현을 쓰는 것은

당시 우리만의 자조 밈이었는데

정말 한 대 맞은 듯한 삶을 살아야 했기 때문이다.


선배들은 당일 결방이 무슨 소리냐고

목청을 높이다가도,

넉살 좋은 PD가 팔을 잡아당기자,

못 이긴 척 따라나섰다.


파스타가 더 좋은 나이였지만,

삼겹살에 소주도 괜찮았다.

아니, 차라리 깎인 월급만큼

먹어버려야겠다고 생각했다.


거나하게 취한 선배들은

반쯤 꼬인 혀로 하소연을 시작했다.


“난 김연아 진짜 싫어. 그렇지 않니?

왜 꼭 그 시간에 경기를 하냐고.”


“나도. 나도 진짜 싫어.”


순식간에 김연아 ‘안티 클럽’이 결성됐다.

어떤 PD는 한술 더 떠 ‘아사다마오 파이팅’을 외쳐

박수갈채를 받았다.

(나도 열심히 비위를 맞추면서,

짧았던 김연아 선수 팬 생활을 접었다.)



짠돌이 팀장이 계산하려고 지갑을 꺼내자,

선배가 내 팔을 잡아당겼다.


“팀장, 우리 막내 택시비 좀 주지?”
그가 만 원을 꺼내자, 선배는 목소리를 높였다.


“얘 집이 어딘지나 알아?”

취하면 잔다르크가 되는 선배 덕에 오만 원을 받아 들고 여의도 공원을 건넜다.



새벽 1시.

아직 집 근처까지 가는 막차가 있을 시간이었다.

환승센터에 앉아 휴대폰을 확인했다.


[오늘 방송 안 나오네?]
아빠였다.


“88만 원 세대가 불쌍해? 웃기고 있네.

니들은 60만 원 주잖아!”


노조 지부장으로 활동했던 아빠는

내가 60만 원을 받아온 날,

방송국에 쫓아가서 뒤집어 버려야 한다고

눈을 부라렸다.

내가 기억하기론, 그 모든 때마다

나보다 더 속상해 한 유일한 사람이었다.


[오늘 김연아 때문에 결방.

막차 기다리고 있으니 먼저 주무셔.]


전송 버튼을 누르고 고개를 드니

멀리 5601번 버스가 보였다.

서둘러 버스에 올라 창문을 반쯤 열었다.


지잉-


[나는 김연아보다 우리 딸이 더 자랑스럽다]


아빠는 그 후 내가 자랑스러운 작가가 되기 전에, 서둘러 내 곁을 떠났다.

너무 오래 걸릴 거라고 생각했을까,

아니면 이미 날 자랑스러워했을까.

분명한 건 그날의 문자가 19년간 나를

차가운 방송국 바닥에서 버티게 했다는 것이다.



'피겨여왕' 김연아보다

나를 더 자랑스러워했던 사람이, 내게도 있었다.






(덧붙이는 말)

지금은 김연아 선수를 사랑합니다. 아주 많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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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 금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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