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이 내 방송 사례자가 됐다

by 롸잇테리언

PART 2. 녹화와 방송 사이

하이라이트 ③ 남편이 내 방송 사례자가 됐다






<돌연사의 주범! 혈관을 지켜라>


<중년 건강, 뇌졸중의 습격>



가을, 겨울만 되면 숱하게 팔아치운 제목들.


한때, 지상파 의학 토크쇼를 제작하며

반 무당처럼 전조증상, 명의 리스트,

좋다는 영양제를 줄줄 외우던 나였다.


심장마비를 ‘극복’하고(?)

보디빌더가 된 할아버지부터,

돼지감자 물을 달여 먹고

뇌졸중을 고친 ‘자연인’까지

혹하는 사연을 가진 사례자들도

많이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내가, 아니 내 남편이,

그 ‘사례자’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사례자 찾기 힘들다고 징징거린 건 맞는데,

누가 몸 바쳐 해 달랬냐고…. 이건 아니잖아.


천운.


구급대원들은 망연자실한 나를 위로하기 위해

‘천운’이라는 말을 썼다.


마침, 휴가철 직전이었고,

오전 7시 반쯤 쓰러져 바로 CPR을 시행했고,

8시 전에 응급실에 도착했으며,

때마침 순환기내과 의사가 출근해

바로 뛰어 내려왔기 때문에!

빠른 조치가 가능했다는 이야기였다.


그들의 말은 맞았다.

허나, 경황 없는 내게 큰 위로가 되지는 못했다.


‘뭐가 천운이야, 이런 일이 없었어야 천운이지’


말을 꾹꾹 삼키며 잠옷 차림으로

원무과 수속을 꾸역꾸역 밟았다.

집 근처에 새로 생긴 대학병원은

쾌적하고 으리으리했다.


곳곳에 드라마 ‘슬기로운 의사생활’

촬영지라는 배너가 붙어있었다.


원무과에서 동의하란 대로

착실히 사인을 하고 나니,

응급실 앞 보호자 대기실로 갈 수 있게 되었다.

<처치 중>이라는

세 글자가 뭘 의미하는지 알 수 없는 채로,

전광판을 보고 있자니

꿈인지, 드라마 속에 들어와 있는 건지

현실감각이 무뎌졌다.


‘슬의생’보다 잠들어서 꿈을 독하게 꾸나보다.

그랬으면 좋겠다.


간절한 상상을 깬 것은

손에 쥔 휴대폰의 요란스러운 진동이었다.


경상북도의 소도시에 살고 계신 시부모님은

소식을 듣자마자 출발해

고속도로에 차를 올렸다는 연락을 해왔다.


너무 놀라실까 봐

차마 심정지라고는 말씀드리지 못했지만.


그래도 자식과 부모 사이에는

어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연결고리 같은 게 있는 것일까.


어머니의 목소리가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긴 침묵 끝에 어머니는 물었다.


“교통사고가...? 많이 다쳤나....”


저도 몰라요. 미칠 것 같아요. 무서워요.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 대답했다.


“어머니, 그런 거 아니에요.

지금 의사가 처치하고 있어요....

조심해서 올라오세요.”


새 병원이라고 힘을 줘서 그런가,

아침부터 파워 모드로 돌아가는

에어컨 바람을 맞으며

나는 몸도 마음도 차갑게 얼어붙어 갔다.


한여름에 찾아온,

내 생에 가장 기록적인 한파였다.

“000 씨 보호자분!”


몸서리가 쳐지는 냉골 복도를 지나

심혈관조영술이라고 적힌 방으로 들어가니,

축 늘어진 남편이 보였다.


어젯밤까지만 해도 나와 매운 닭발을 먹으며,

함께 드라마를 시청하던, 나의 남편.

나의 보호자.

이제는 내가 그의 ‘보호자’가 되어야 했다.


의사는 ‘심장에 큰 문제가 보이지 않는다,

막힌 혈관이 없다.’라면서도


이 ‘병명’을 찾는 일이 생각보다

긴 싸움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주지시켰다.


코로나19가 기승을 부리던 시절이라,

죽었다 살아난 사람에게도 PCR검사를 했다.


이런 걸 드라마에서 다 고증한다면

지루해서 채널을 돌리겠구나.


의사는 물었다.


“남편이 코로나에 걸린 적 있나요?”


“아뇨....의식은 없는 거죠?”


“네. 지켜봐야 해요.”


“심정지 상태로 있었으니

뇌손상도 있을 수 있나요?”


내 입을 막고 싶었다.

어쭙잖은 지식은

나를 빠르게 불안하게 했고,

그 마음은 자꾸 입으로 새어 나왔다.


“그렇죠. 지켜봅시다.”


남편을 내려다보았다.


아무것도 모르는 듯한 표정으로

누워있는 남편.


‘우린, 이제 어떻게 되는 거야?’

중환자실로 향하는 남편을 향해 물었다.

대답 없는 물음.


남편.

남편으로 말할 것 같으면

워낙 말이 없는 사람이었다.


취향이 없진 않았지만,

식당에 가서 메뉴를 고를 때도


“네가 먹고 싶은 걸로 두 개 시켜.

난 다 괜찮아.”

할 정도로 무던한 성격이었다.


매사가 불편한 나는 그놈의

‘무던한 성격’이 부러웠다.


하지만, 내가 간과한 것은

늘 괜찮은 사람이 존재할 수가 없다는 사실.


결혼했어도, 나의 생활은 바뀐 게 없었다.

늘 정신없이 바빴고,

낮과 밤이 뒤바뀌어있었고,

프로그램 사이에 기간이 생기면

작가들과 훌쩍 해외여행을 떠났다.


회사원인 남편과도 시간을 맞춰

여가를 보내곤 했지만,

그 여가의 종류를 정하는 건

언제나 나였다.


내가 좋아하는 영화,

내가 좋아하는 공연,

내가 좋아하는 나라,

내가 좋아하는 카페.


여전히 내 어깨에 업혀있는

친정 식구들까지.


나의 세계에 남편이 들어올 틈은

거의 없었다.


우리는 꽤 친한 동반자였지만,

어쩌면 ‘가족’은 아니었을지도 몰라.


남편이 깨어나면 묻고 싶은 게

참 많았다.

뭐가 먹고 싶냐고,

어디를 가고 싶냐고,

어떤 색 옷을 좋아하냐고,

이토록 부족한 나를 왜 사랑하냐고,



그리고....

8년 전,

당신은 나와 어떤 미래를 꿈꿨느냐고.


남편이 이 모든 질문에 답해주는 날이 올까.

내가 아는 그 모습으로 돌아올 수 있을까.


내 인생을 뒤바꾼 그날은 예고없이,

아주 잔인한 방식으로 찾아왔다.


화, 금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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