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도위반 그런 거 아니야?’
2013년, 스물다섯의 나이로 유부녀가 됐다.
사람들은 여섯 살 많은 남자와
서둘러 결혼식을 올리는 나를 두고
여러 말들을 옮겼다.
보란 듯이 허리를 졸라매고 버진로드에 서고,
지구 반대편으로 신혼여행을 가버린 덕에, 숱
한 의혹들은 금방 힘을 잃고 말았다.
방송국 사람들은 연애는 해도
결혼에는 회의적이었다.
제멋에 사는 사람이 많은 것도 있지만,
매일 남녀
(우리는 서로를 돌 또는 원수 보듯 하나,
밖에서 알 리가 없을 테니.)가 붙어
밤샘 회의를 하고,
데이트 중간에도 일이 터지면
급하게 모여야 하는
업무 특성을 이해해 줄
배우자감을 찾는 것도 녹록지 않았다.
작가 언니들은 매일 일 끝나면
나를 붙잡아놓고 맥주를 부어주며
신세 한탄을 했다.
“이 일, 언제까지 할 수 있을까?”
“고향 가서 엄마 식당이나 물려받을까.”
매일 똑같은 레퍼토리였다.
이십대 초반, 막내 중에서도 제일 막내였던 나는
‘방송일을 오래 하면 친구가 없어지는구나.’
속으로 생각하며 공짜 술을 열심히도 마셨다.
그런데!
그런 새파랗게 어린 후배가
시집을 간다고 청첩장을 돌리다니.
언니들 처지에선 정말
‘술 깨는 소리’나 다름 없었을 것이다.
어쨌든 수많은 관심 덕분에
1월, 역사적인 한파 속에서도
하객이 미어터지는 결혼식을 하게 됐다.
결혼식을 올렸다고
크게 달라지는 건 없었다.
예물로 받은
작은 명품가방이 하나 생겼고,
남자친구를 매일 볼 수 있다는 것만 빼면.
아! 남자 PD들이 묘하게 나를 대하는
태도가 조금 더 정중해지긴 했다.
언니들도 금방 적응해서
이제는 소개팅을 주선해보라고
옆구리를 찔렀다.
‘결혼 별거 아니네.’
철 없던 어린 신부를 각성시킨 건,
다름 아닌 결혼식 후 처음 맞는 명절이었다.
남편은 종갓집 종손이었다.
핵가족으로만 자란 나는
수 많은 어른 틈에 둘러싸여
열심히 절을 하고,
세뱃돈을 수금하며 신나있었다.
친척들의 덕담을 듣기 전까진.
“그래, 우리 집 식구 됐으니
예쁘게 살아래이. 아는 언제 낳을끼고.”
‘아이...?’
분명 아이라고 했다.
고작 스물다섯.
나도 ‘아’인데, ‘아’를 낳으라고요?
뭐가 잘못돼도 단단히 잘못됐다.
스드메가 뭔지,
웨촬 도시락이 뭔지를 검색할 때가 아니었는데....
결혼하면 아기를 낳아야 되는 거였어?
머릿속이 일순간 암전 상태로 바뀌었다.
나는 사실 살면서 아기를 낳겠다는
결심을 한 적이 없었다.
그 말이 세련된 용어로 ‘딩크족’ 이라는 것은,
나중에서야 알았다.
종갓집 맏며느리가 딩크족이라니.
시작부터 제대로 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