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트레이너가 감자만 먹으래서 만든 ‘뇨끼’
0. 레스토랑 ‘고향연화’
지난 2월 성수동 수제화 숍에서 하얀 펌프스 한 켤레를 샀다. 몇 번의 검색 끝에 그 여자가 신었던 디자인과 꼭 같은 구두를 찾아냈다. 이름도 성도 모르는 그녀는 바로 그 구두를 신고 상아색 코트를 걸쳤으며 훤칠한 애인이 펼쳐 든 우산 아래로 도도하게 사라졌다. 나는 최근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한 레스토랑 ‘고향연화’에서 2번째 대기석에 앉아있었고. 설 연휴 마지막 날 엄마, 아빠와 함께였다. 소박한 교외에 위치한 바와 달리 식당 근처에는 이름을 알거나 모르는 외제차가 늘어서 있었다.
나는 부모님의 QM3를 얻어 타고 다니는 서른 살이었고 마지막 연휴의 아쉬움을 달랠 사람은 엄마, 아빠가 전부였다. 그토록 가까운 거리에서 그보다 매력적인 또래 여자는 본 적이 없었다. 웨이터가 내 대기번호를 부를 때까지 두 사람, 정확히는 한 사람이 멀어져 가는 모습을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낭만적인 커플이라면 응당 저래야 한다고 떠올릴 법한 모습이었다. 이 아름다운 식당은 그런 연인을 위한 곳이었다. 쉬는 날 부모님과 시간을 보내야 한다는 애매한 효심에 머리는 대충 말리고 다리지 못한 셔츠를 입은 내가 아니라. 심지어 내 부모님도 밖에서는 아름다운 중년 커플이 아니던가!
그런데 말입니다. 나는 공부도 열심이었고 교우관계도 앞장섰으며 내부평가도 준수한 4년 차 재무팀 대리였다.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한 결과는 야근으로 미용실도 제대로 못 가고 네일아트는 언감생심이며, 폭발하는 여드름과 모니터로 쏟아질 듯 굽은 자세였다. 유리창 너머로 부스스한 내 모습이 비쳤고 그 옆 테이블에서 그림 같은 연인이 브런치를 즐기고 있었다. 모범 시민인 나라고 해도 이건 공평하지 않았다. 나는 욕조에서 뛰쳐나오는 아르키메데스처럼 식사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 나도 미녀가 될래! 레스토랑 이름의 유래처럼 ‘화양연화花樣年華’, 삶에서 가장 아름다운 때를 찾겠어!
아름다움이나 연애는 내 특기가 아니지만 셈은 확실히 내가 남보다 잘하는 일이었다. 우선 계속되는 야근과 스트레스로 망가진 뼈와 살을 추슬러 곧고 날씬한 몸매를 찾을 것이다(퍼스널 트레이닝 1백만). 촌스러운 옷가지도 싹 바꾸고(의류비 1백만), 부스스한 모발도 윤기 나도록 관리받을 것이다(미용시술 0.5백만). 할 일을 장부에 정리하는데 듣고 있던 은이 언니가 갸우뚱했다. ‘같이 갈 애인은 어떻게 만드려고?’ 확실히 이 점은 어떤 예산으로 얼마나 지출해야 할지 미지수였다. 지금이 2월이니까 한 주씩 할 일을 해치워도 10주는 필요하다. 더 늦어지면 여름이 다가올 테고 무더운 날 데이트라면 끔찍하기에 서둘러야 한다. 우선은, 하얀 펌프스 한 켤레를 샀다.
1.
스피닝 강사인 친한 동생의 소개로 서면 중심가 V피트니스 센터를 찾았다. 친절하지만 호락호락하지 않은 인상의 트레이너가 나를 맡았다. 제니라고 자신을 소개한 트레이너는 먼저 식단을 점검하겠다며 오늘 저녁에 먹은 것부터 읊어보라고 했다.
-… 과자요.
-무슨 과자요?
-그냥 사무실에 남아도는…
-그러니까 무슨 과자요?
-… 크라운산도 1봉, 빠다코코넛 1봉, 버터링 1조각, ABC초콜릿 한 줌이요.
-…
-…
서른 살의 식사라기엔 세련미를 찾아볼 수 없는 식단(차라리 빈츠였다면 나았을까?)을 듣고는 제니는 잠시 흔들렸지만 곧 결연한 말투로 종이에 끄적였다. 회원님 식단은 제가 그냥 정해드릴게요. 감자, 고구마, 단호박, 견과류, 계란, 요구르트를 아침·저녁으로 드시는 거예요. … 세종대왕도 아닌데 이렇게 뿌리 깊은 채소만 먹어야 하나요? 말을 마치기도 전에 신용카드는 이미 던져졌고 예산을 약간 초과하는 비용이 일시불로 빠져나갔다. 빌어먹을. 내게도 기회는 있었다. 트레이너는 무엇을 먹으랬지 어떻게 먹을지는 정해주지 않았으니까.
-감자 2개, 베이컨 2줄, 양파 1/2개, 체다치즈, 달걀 1개, 밀가루 1컵, 소금, 후추, 파마산 치즈 1 숟갈, 생크림 1/2컵, 우유 1/2컵, 올리브유,
1. 감자는 충분히 삶은 뒤 남은 덩어리가 없어질 때까지 으깨기
2. 으깬 감자에 밀가루, 파마산 치즈, 소금, 후추를 섞은 뒤 감자가 충분히 식으면 달걀 넣어 반죽하기
3. 반죽은 작고 동글 납작하게 만든 뒤, 끓는 물에 넣고 떠오를 때까지 2-3분 삶기
4. 팬에 식용유를 약간 두르고 뇨끼를 노릇하게 구운 뒤, 올리브유를 두르고 베이컨과 다진 양파 볶기
5. 우유와 생크림을 넣은 뒤 체다치즈를 넣어 점도와 간을 맞추면 끝.
‘회원님 다시요, 가슴을 더 끌어올리세요!’
이거 최대로 끌어올린 건데…. 위기는 등근육을 단련하는 랫 풀다운 동작을 배울 때 닥쳤다. 한 번도 의식하고 써본 적 없는 광배근을 자극해야 하는데 도무지 어느 부위로 힘을 써야 할지 감을 못 잡는 거다. 추락 직전 간신히 벼랑 끝에 매달린 액션 영화의 주인공처럼 대롱대롱 진땀만 흘렸다. 제니는 생각보다 어깨가 안으로 더 굽어있어 그렇다며 나를 달랬다. 살 빼려고 시작한 운동인데, ‘다이어트 워’에서 본 스쿼트나 런지는 안 하고 자세 교정만 몇 시간째야!
맞은편 회원은 능숙하게 롱풀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2주간 관찰한 바 이 센터 회원은 두 부류가 있다. 자기 운동복을 가지고 다니는 사람, 공용 체육복(찜질방 옷)을 입는 사람. 능력의 향상을 원한다면 걸맞은 장비를 먼저 갖춰야 한다. 「고향연화」의 그녀라면 고무가 늘어난 찜질방 체육복은 입지 않을 것이다. 트레이너가 추천해준 온라인숍에서 레깅스를 곧장 두 벌 샀다. 입문자용 네이비색과 자신감이 붙으면 도전할 코랄 색상이었다. 이런 모양새라면 코랄을 입을 날이 오기는 할까, 싶은데 메신저 알람이 울렸다. 9월의 신랑 영이 오빠였다.
-야 너 소개팅할 생각 있니? ㅎㅎㅎ
메시지의 ‘ㅎ’이 끝나기 전에 두통이 왔다. 왜 기회는 늘 준비되지 않은 순간 들이닥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