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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재 Apr 02. 2021

꿀꿀이를 달래는 구운채소 샌드위치

레시피 ‘화양연화’ #2

1. 바나나

 창고에서 비품을 뒤적이느라 바지 여기저기 태가 탔다. 옆에서 거들던 박주임이 먼저 사무실로 올라가더니 커피를 내왔다. 또래 남자답지 않은 싹싹함과 훈훈한 미소에 아이스커피 마저 따뜻해졌다. 입사 당시부터 빛나는 용모로 이름을 알렸던 그의 프로필 사진을 선임들은 이미 성지 순례하듯 다녀갔다.  실물 앞에 서니 바나나 앞에  파리처럼 몸이 베베 꼬이고 안절부절이었다. ‘자산관리요? 듣기만 해도 머리 아프네요지점  돌아다니려면 고생이겠어요

 

 아니요. 사실은 짤순이나 오함마 따위를 장부 수량대로 헤아리는 일인걸요… 하는 말이 목 끝까지 차올랐으나 커피 한 모금 삼키며 어색한 미소로 답할 수밖에 없었다. 짤순이나 오함마도 엄연히 자산이었다. 박주임은 초보 운전인 내가 사업소 문 밖을 나설 때까지 차 뒤를 봐주고는 사무실로 돌아갔다. 그 상냥함과 돌아가는 길에 만개한 벚꽃 향기에 운전대가 휘청거렸다. 박주임은 어떤 사람하고 데이트를 할까? 바나나의 주인을 파리로서는 알 길이 없었다.


지난주 소개팅에서 패배하고 돌아온 뒤 빡빡한 외근 일정이 차라리 반가웠다. 상대와 세 번째 만남에서 와인을 한 병 들이켜고는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나를 좋아하지 않아’라던가 ‘왜 나는 행복해질 수가 없어’ 따위를 외치며 귀가한 지 일주일째였다. 은은한 박주임의 광채에 아직 포장도 뜯지 않은 코랄색 레깅스가 떠올랐다. 물론 코랄색 레깅스를 입고 그를 어떻게 해보겠다는 건 아니고… ‘고향연화’에서 밥 한 끼 정도는 할 수 있을지 모르잖아? 서둘러 제니와 미뤘던 수업 일정을 잡았다.




2. 꿀꿀이

돼지 한 마리를 키우고 있다. 이름은 꿀꿀이. 낮에는 주로 잠을 자다가 오후 8시 깨어나 11시까지 왕성하게 활동한다. 녀석의 주식은 과자. 퇴근 후 지친 마음을 달래려 유튜브를 보거나 책을 읽다 잠시 주의를 놓친 틈을 타 녀석은 울타리를 뛰쳐나와 간식 선반으로 향한다. 천성이 게을러서 없는 과자를 사러 나가지는 않지만, 뭐든 한 가지 찾아내면 바닥을 보고야 마는 놈이다. 물론 진짜 돼지는 아니고 내 식습관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 놈은 내가 기분이 좋을 때는 얌전하다가 조금만 지치거나 외로우면 우리를 탈출한다. 목표는 고기도, 밥도 아닌 오직 과자. 바스락거리는 비닐봉지 안에 든 스낵류를 먹고 산다. 어떨 땐 헛구역질이 나올 때까지 치토스를 먹는 녀석이다. 녀석도 한 때는 누구나 갖고 있는 작은 버릇이었고 시의적절한 위로와 생기를 불어넣으며 나를 기쁘게 하기도 했다. 그러나 대리로 진급한 뒤 꿀꿀이는 부쩍 힘이 세졌고 이제 말도 걸어온다.


-요리를 왜 해? 지친 데다 해 먹일 사람도 없는데. 오늘 저녁은 홈런볼로 때우자! (부스럭)




꿀꿀이를 달래는 구운 채소 샌드위치(램블 부부 레시피)

: 이 레시피는 야채를 바싹 구워 나는 단맛과 부드러운 계란 식감이 어울려 꿀꿀이도 좋아하는 레시피다.

1. 가지, 애호박, 당근을 얇게 썰어 기름 약간만 둘러 강불에 바싹 굽기

2. 계란은 완숙으로 프라이 만들기

3. 구운 식빵에 홀그레인 머스터드, 슬라이스 치즈, 구운 채소, 계란 프라이, 양상추 순으로 쌓기

4. 비닐 랩으로 단단히 싸서 5분 뒤 갈라 먹기.



3. 친구

 동기 윤을 픽업한 뒤 전포 「버거샵」에 점심을 하러 갔다. 황사가 비로소 걷히고 벚꽃이 만개한 3월의 마지막 날이었다. 친구를 태워 손꼽히는 수제버거를 먹으러 가는 길에 초보운전의 어깨가 으쓱해졌다. 두툼한 패티와 신선한 치즈, 채소를 감싼 쫄깃한 번을 한 번에 물었다. 빵빵한 볼 사이로 달콤한 콜라가 빨대를 타고 흘렀다.


 맞은편에서 마찬가지로 엉망진창으로 흘린 채소를 주워 먹는 윤이는 몇 안 되는 내 입사동기였다. 하얀 피부와 말끔한 옷차림이 엊그제 같은데 얼굴은 흙빛이고 회사 점퍼를 한 몸인양 걸치고 다녔다. 너도 고생 많겠지 많이 먹어라, 콜라를 건넸다.


 

소문난 전포동 수제버거



 요즈음 꿀꿀이는 낮에도 활동을 왕성하게 하고 있어서 커피를 마시러 가는 길에 건너편에 파는 수제쿠키 생각이 간절했다. 지금은 점심시간이라 줄 안 서고 사 먹을 수 있을 텐데… 사무실 간식도 거덜 냈고 하나 사갈까? 윤이 맞은편에서 씩씩대며 회사 욕을 했지만 따뜻하고 말랑한 쿠키 생각에 날뛰는 꿀꿀이를 잡으러 다니느라 바빴다.


-‘그래도 옆에 박주임이 있으니까 살만하죠.’

잉?

-‘박주임하고 찐친이에요. 고등학교 같은 반이었잖아. 다음에 같이 나와야겠네.’


말차 초콜릿 쿠키를 외치던 꿀꿀이가 그 말에 멈칫했다. 이내 조용히 우리로 돌아갔다. 옷장에 묵혀둔 코랄색 레깅스를 꺼낼 때였다. 6천 원짜리 라떼를 사주자 윤이 고마워했다. 아니 내가 더 고마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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