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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재 Oct 01. 2021

돌아와 머슴밥을 먹었습니다.

레시피 화양연화 #11 도로 돌아와 뽀모도로

 3월부터 8월까지 치열한 운동과 꾸준한 관리 끝에 얻은 결과는 이렇다. 체중이 1킬로그램도, 3킬로그램도, 5킬로그램도 아닌 0킬로그램이 빠졌다. 피부과 시술 횟수를 다 채웠고, 다시 거뭇하고 푸석한 안색을 되찾았다. 퍼스널 트레이닝 계약이 끝나 통장은 다시 풍요로워졌고 식단은 너그럽고 시간은 여유가 넘쳤다. 소개팅을 더 이상 받지 않았기 때문에 주말 저녁이면 만화책을 읽었다. 물론, 카페거리나 바닷가 근처는 얼씬도 하지 않았고.


 김대리는 근사한 레스토랑 ‘고향연화’ 마당도 밟아보지 못한 채, 돌아와 다시 머슴밥을 먹었습니다. 이상.




 1.  


 - 이상하지 않아요? 7300만 원의 10퍼센트가 어떻게 710만 원이에요. 완전히 계산이 잘못됐잖아. 오늘까지 신고해야 하는데 어떻게 할 거예요?


 신입 후배 나연의 볼이 빨갰다. 땀으로 앞머리가 이마에 여기저기 달라붙어 얼이 빠진 모양새였다. 잘못 발행된 세금계산서가 하필 신고 당일 발견된 것이다. 거래처 회계 담당자도 만만치 않았는데, 다짜고짜 반말에 전화로 들어도 삿대질을 하는 게 보일 만큼 신경질을 부렸다. 신고 당일이면 십원, 이십 원어치 계산서 모으는 일도 짜증이 치미는데 마침 상대가 실수를 했으니 마음껏 히스테리를 부리려는 셈이다. 필요한 말만 해도 될 텐데, 해결책도 없으면서 그 태도가 도를 지나치고 있었다.


 - 눈이 있어요, 없어요? 산수 못해요?


 나연은 필사적으로 검색창에서 해결책을 찾고 있었다. ‘어, 어…’. 목소리가 새끼 양처럼 떨리고 있었다. 이 스물아홉 늦깎이 신입직원은 한번 알려주면 다시 묻는 일도 거의 없고, 센스도 있어서 무조건 묻기보다 법령이니 판결문이니 답을 금방 찾아내고는 했다. 하지만 속사포 같은 민원인의 히스테리에 길 잃은 어린양처럼 발만 동동 구를 수밖에. 나도 이런 화풀이성 민원이라면 질색이다. 질색이고 말고…


칸막이를 톡, 톡 쳐서 나연에게 전화를 나에게 돌리라고 손짓했다.


나연이 뻣뻣한 동작으로 전화를 연결하는 사이, 나는 한숨을 한번 쉬고, 가슴을 활짝 편 뒤 할 수 있는 가장 밝은 미소를 지은 채 수화기를 들었다.


 ‘네 선생님, 계산서 발행이 잘못되어서 불편하시다고요?’  

- 댁이 사수예요? 여기 직원 교육 똑바로 안 시켜요?


‘네 선생님, 해당 계산서는 저희가 수정할 테니, 이번 분기는 신고하지 마세요. 바로 잡은 계산서는 예정신고 누락분으로, 내년 1월에 신고하실 때 포함시키면 됩니다.’

 - 어떻게 그래요? 세금 신고 잘못되면 가산세 나올 수도 있는데.


‘네 선생님, 매입세금계산서는 지연 신고해도 가산세가 없습니다. 공제받으시는 게 늦어질 뿐이지요. 해당 건은 부가가치세 법 예규에도 나와있습니다.’

 - … 그래도 찝찝한데. 이번 분기 환급액이 없는 셈이잖아요.


지끈지끈한 이마를 눌렀다. 영세 거래처는 이렇게 우격다짐으로 나올 때가 많다. 미소 지은 입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선생님, 부가가치세 법 제60조를 보시면 세금계산서를 잘못 발행한 경우 준 사람뿐 아니라 받는 사람도 가산세 0.5퍼센트를 내야 합니다. 그 말은 받는 사람도 내용을 잘 확인해야 한다는 말이지요. 이번에 잘못 발행한 금액이 7300만 원이니, 0.5 퍼센트면 선생님도 36만 원 가까이 가산세를 내셔야 합니다.’

- …

‘선생님 말대로 잘못된 계산서로 신고해도 됩니다. 대표님하고 가산세 36만 원 내실 지 상의해 보시겠어요?’


- 됐어요. 아침부터 정신없게.

물론 전화는 인사도 없이 끊겼다.


‘나연 씨?’

‘넵’. 나연은 옆에 앉아 수화기에 바짝 귀 기울이던 참이었다.


‘가서 머리 정리하고 와요’. ‘네?’

‘땀 나서 엉망이잖아. 어떤 상황에서도 절대 미모는 잃으면 안 돼.’


후배는 그제야 씩 웃더니, 냉큼 화장실로 뛰어갔다.

물론 이건 거짓말이다. 재무팀에 일하면서 미모 같은걸 챙길 수 있을 리가.



2.


‘김대리, 요즘도 일 끝나면 운동하러 가요?’


 곤란한 점은 또 있었다. 새로 온 팀장이 자꾸 일은 어떻게 돌아가는지, 방광염은 좀 나아졌는지(전혀!), 새로 온 후배하고 사이는 어떤지를 물었다. 바로 옆에 있는데, 보면 모르시나? 사실 새 팀장은 상식적이고 예의를 지키며 무엇보다 이야기를 잘 듣는 사람이었다. 반대로 말하면 별로 말이 없는 사람이기도 하고. 나는 그가 차장일 때부터 알고 있었기 때문에, 괜스레 말을 거는 모습이 어딘지 불편했다. 이런저런 대화를 거는데, 정작 중요한 한마디를 아껴두는(혹은 못하는) 느낌이랄까?


머리는 갸웃거리면서도, 역시나 손은 자동으로 엑셀 수식을 입력하고 있었다.

그때, 모니터 오른쪽 하단에 메신저 알림이 떴다.


 - 누나, 대박 뉴스. 자리 돌아오면 바로 답장 요망.

 - 자리에 있어. 전화가 많이 와서 자리비움 설정해 둔 거야. 무슨 일인데?

 - 아, 난 또…. 다른 게 아니고, 우리 신규 시스템 구축 특별팀(TFT) 만든데요.

 - IT팀에서 특별팀 만든다는 이야기는 작년부터 있었잖아.


 - 그 팀에 전산 담당자만 있는 게 아니래. 각 팀마다 한 명씩 차출할 거래요.

 - 뭐? 왜?

 - 사장님 특별 지시. 우리 사장이 통신회사 출신이잖아. 시스템 구축할 때 각 팀 전문가가 설계 과정에 참여해야 한다나 뭐라나. 일단 영업팀 황 과장, 자재팀 신대리는 확정.

- 뭐 신대리? 자재팀 일은 신대리 혼자 다하는데, 신대리가 TFT 가면 소는 누가 키운데?


 그때 칸막이 너머로 나를 곁눈질하는, 팀장의 고뇌 섞인 눈빛이 보였다. 무언가 내 인지를 관통했다.


- 야. 재무팀 얘기는 나왔어?

- 모르겠어. 나도 안전팀 얘기 나오나 계속 주시하고 있는데. 이번에 뽑히면 연차 불문 특진이라는데….


 스스로 아닐 거라고 되뇌어봐도, 신규 시스템을 만드는데 회계 모듈이 없을 리가 있나. 만약 재무팀에서 누군가 차출되어야 한다면, 누가 될까? 아니다, 내가 될 리 없다. 재무팀에는 사람이 다섯 명이나 있다. 물론 지난달 입사한 나연 씨는 제외되겠지만. 회계보다는 기금운용에 가까운 박주임도 제외. 계약 담당자 하주임도 제외. 그렇다면… 남은 사람은 나와 맞은편 김 과장뿐이다. 당연히 만년 진급 대상자인 김 과장이겠지? 하지만 올해 마흔다섯 살인 그는 V-lookup도 피벗테이블도 쓸 줄 모르는데. 전산의 지읒도 모르는 그가 시스템 구축을 맡는다면….


 잘못 맞물린 톱니가 돌아가듯, 고개가 삐걱 돌아갔다. 천천히 칸막이 너머 팀장과 눈이 마주쳤다. 팀장은 절망적인, 그리고 익숙한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쟤가 가면, 소는 누가 키우지?’




3.


 특별팀에 뽑힌 다음 일은 불을 보듯 뻔했다. 일상 업무는 주중에 하고, 특별팀 일은 주말 출근을 불사해야겠지. 아니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다고. 먼저 못하겠다고 팀장에게 선포하자. 나는 이미 김 과장이 쳐내지 못하는 일까지 떠맡고 있었다. 내게는 방광염 진단서가 있었다. 김 과장도 뭔가 퍼포먼스를 보여야 한다. 올해 진급하지 못하면 그는 평생 과장이거나, 그마저도 운이 나쁘면 집으로 가게 될 테다. 나도 알고, 팀장도 알고, 본부장도 아는 이야기다. 가서 말하자. 나는 못 한다고.


‘대리님, 고맙습니다. 앞으로 금액은 한번 더 확인하겠습니다….’


 땀을 닦고 말끔해져서 자리로 돌아온 나연 씨를 보았다. 벌써 턱으로 여드름이 솟아나고, 어깨가 살짝 굽은 데다, 질끈 묶은 생머리에 네일아트는 언감생심이겠지. 회사를 다니면서 미인이 될 수 있을 리 없잖아. 미인이 된다고 한들, 근사한 레스토랑에 같이 갈 준수한 애인을 구할 수도 없고. 대체 왜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 거지?


 나연은 자리에 앉아, 삐져나온 셔츠를 스커트 안으로 얼른 집어넣어 정리하고는, 웃으면서 내 자리로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맞은편 창으로 들어온 햇살이 비친 눈은 맑고 컸다. 만성 피로나 방광염을 아직 모르는 눈이었다. 왜 이렇게 까지 해야 하는 거지? 아니, 이렇게까지 할 수밖에 없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이유는 모르겠으나, 이 빌어먹을 직장 생활을 피할 수가 없다면.


 특별팀에 들어가면 특진이, 성과급이, 인사고과가 기다리고 있었다. 회계관리 시스템이 내 손안에 들어올 테고. 대체 불가까지는 아니더라도 핵심인력으로, 개인사업자처럼 업무 권한이 자유로워질 수도 있다. 물론 여태껏 한 번도 그런 여자 선배는 본 적이 없었다. 독자적으로 판단을 내리고 해결책을 제시하는 선배 말이다.


 나는 곁눈질로 나연의 집중하는 옆모습을 보았다. 닭장 같은 칸막이 안에서, 오늘도 엉망진창 고군분투하는 동지를 둘러보았다. 이 닭장에 있는 한, 우리는 결코 로맨틱 코미디 속 주인공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다.

 

 다시 고개를 돌렸다. 잘못 맞물린 기계 돌아가는 소리가 났다. 팀장과 이번에는 정면으로 눈이 마주쳤다. 나는 슬픈 결말을 알면서도, 또다시 잘못된 선택을 하기 위해 눈을 반짝였다.





산처럼 쌓아두고 떠먹는 뽀모도로 파스타

- 홀토마토(혹은 시판 토마토소스) 1/2캔, 양파, 마늘, 바질, 파슬리


1. 물을 끓인 뒤 소금 1스푼, 식용유 1스푼을 넣고 팔팔 끓인 뒤, 링귀니 면을 7분간 삶는다.
2. 마늘은 편 썰고, 양파는 채 썬 뒤 올리브유를 두른 뒤 강불에 양파가 투명해질 때까지 볶는다.
3. 홀토마토 2 국자를 넣고 잘 으깨어 준 뒤, 오레가노, 소금, 후추로 밑간 한다.
4. 완성된 토마토소스에 삶은 링귀니를 넣고, 바질을 뿌린 뒤 농도가 되직해질 때까지 섞는다.
5. 접시에 파스타를 담은 뒤 파마산 치즈, 루꼴라 잎 등을 얹어 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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