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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재 Jun 05. 2021

그 팀 김대리는 안녕하신지

레시피 화양연화 #7 먹을 것 없다

1. 부처의 뜻


 그렇게 말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3개월 간 뼈를 깎는 노력 끝에 곧고 날씬한 몸매를 되찾았노라고. 피부과를 제 집 드나들듯 오간 바 얼굴에 은은한 광채가 돌았노라고. 영 앤 리치, 톨 앤 핸섬, 꿈에 그리던 상대를 찾아 「고향연화」로 돌아갔노라고. 그 길은 큐피드가 말린 장미 꽃잎을 뿌리고, 꾀꼬리가 노래를 불렀노라고. 물론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더 안 좋은 일이 일어났다. 데드리프트를 하는데 아랫배가 오그라들듯 아팠다. 낯선 고통에 곧장 비뇨기과를 방문했다. 의사는 모니터에서 고개를 돌리지도 않고 물었다.


“최근 2주간 성관계하신 적 있나요?”

“그게… 제가 아는 한 없었어요.”

“스트레스받는 일이 있었나요?”

“거의 항상요.”


의사는 마우스를 여러 차례 딸깍딸깍 누르더니(뭘 알아냈다고?) 상황을 정리했다.


“과민성 방광염으로 보이네요. 검사를 해야 정확히 나오겠지만 일시적 현상일 수 있어요.”


빌어먹을! 신경성 식도염도, 위염도, 장염도 아니고 왜 방광염이냐고. 생각해보면 일이 없던 시절, 그러니까 백수일 적에도 스트레스로 인한 모낭염을 진단받지 않았나. 이 정도면 살아 숨 쉬는 것 자체가 고통이고 병이로구나. 부처님, 인생이 고(苦)라던 말씀을 이제야 이해하겠어요. 물론 부처는 그 길로 출가를 하셨지만 나는 곧장 사무실로 복귀했다. 병원에 다녀오니 잠깐 사이에 문서가 또 쌓여있었고, 다른 사업소에서 온 우편물까지 있다. 제기랄, 이 참에 병가를 내볼까. 재무팀 김대리가 방광염이라는 소문은 과연 얼마나 멀리 또 빨리 퍼질 것인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내 소중이를 떠올릴 것인가!)


마지막 우편물에서 잘그락 쇳소리가 났다. 뭐지? 물품이 우편으로 배달될 일은 없는데. 보낸 사람은 황주임이었다. 이 짜식, 몇 번 갈궜더니 앙심 품고 폭발물 넣어둔 거 아니야? 화학공학 전공이라 했는데.


“오 대리님, 저도 하나만.”


봉투에서 나온 것은 스타벅스에서 판매하는 자일리톨 캔 케이스 두 개였다. 레몬향, 민트향. 아… 그는 그날 있었던 일을 마음에 두고 있는 듯하다.






 지난 토요일 카페거리에 자주 찾는 호프집에서 신나게 맥주를 들이켜다가 오랜만에 담배를 한 개비를 물고 있었다. 옆에 새로 맥주집이 생겼네. 다음엔 저기로 가볼까, 하는데 그 가게 앞에서 담배에 막 불을 붙인 남자가 눈에 띄었다. 산만한 몸집에 남색 랄프로렌 피케 셔츠, 못 알아볼 수 없는 황주임이었다. 모르는 척할지, 말을 걸어야 할지 망설이는데 황도 나를 발견하고 화들짝 놀란 눈치였다. 쭈뼛거리며 옆으로 와서는 몇 마디 주고받은 뒤 (‘이 셔츠 집에 몇 벌 있어요?’, ‘다섯 벌쯤…’) 남은 담배를 태웠다.


“대리님, 다른 분들께는 비밀로 할게요.”

“네?”

“회사에서는 모르는 게 좋겠죠… 흡연하시는 거.”


아니 그게 상관없는 그것 말고도 책잡힐 일은 많은걸요? 그러나 황의 표정은 결연했다(‘저만 믿으세요’). 하는 수없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헤어진  자일리톨 캔디가 도착한 것이다. 레몬향, 민트향. 이것은 협박인가 친근함의 표시인가. 그렇게나 갈궜는데 그는 정녕 마조히스트란 말인가? 두통을 느꼈지만 인생은 원래 (혹은 go?) 임을 떠올리며 다시 작성하던 보고서로 주의를 돌렸다.




2. 재무팀 김대리


 그것 말고도 골칫거리는 많았다. 그동안 박주임과 가까워지기 위해 동기 윤이에게 커피니 삼겹살이니 부지런히 사다 날랐지 않나. 성큼 6월이 다가왔고 망설일 시간이 없었기에 회심의 문자를 날렸다. “윤아~ 박주임 여자 친구 있니?” 귀여운 내 동기, 누나가 그동안 그만큼 시간과 정성을 쏟았으니 눈치껏 밥 한번 같이 먹자는 말은 했어야 하는 거 아니니,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윤은 다음과 같은 말로 나를 혼란에 빠뜨렸다.


“만나는 사람 있는 거 같기도 하고… 왜요?!”


왜긴 왜겠니. 내가 너한테 밥만 실컷 사 먹이고 눈칫밥을 안 먹였구나.


“확실히 말해, 있어 없어?”

“여자 친구 있어.”


Cyber. 마음이 착잡한데 윤은 연달아 “왜?!”, “무슨 일이야, 궁금하게” 따위 물음으로서 내가 헛다리를 짚었을 뿐 아니라 아무짝에 쓸모없는 큐피드에게 뇌물을 갖다 바쳤음을 깨닫게 했다. 문득 지난번 결혼식장에서 동료들에게 둘러싸여 웃고 떠들던 박주임의 미소가 떠올랐다. 바디 프로필 촬영 때문에 식단을 관리하느라 가둬뒀던 꿀꿀이가 음험한 표정을 지은채 우리 문을 열고 나왔다. ‘거봐, 넌 안돼.’ 난 그저… 예뻐져서 멀끔한 남자와 근사한 레스토랑에서 점심 한 끼 하는 게 소원인데. 주택 청약에 당첨되거나 시험에 합격하게 해 달라는 말도 아니고.



재무팀 김대리는 행복해질 수 없다니, 농담이지?





3. 부케


“농담하는 거 아닌데? 부탁하는 거야. 네가 부케 받아줬으면 해.”


제조사 개발팀 대리인 경이라면 알아주겠지,  멈추지 않는 슬픔의 레퍼런스를. 그를 동네  카페 「사이먼커피」로 불러냈다. 그러나 오랜만에 얼굴을 내민 경이는 결혼 준비로 나의 알량한 신세한탄에 신경  겨를이 없어 보였다. 약간 혼이 빠진 듯한 얼굴로 커피를 주문하고는 기상천외한 부탁을 날렸다. 부케라니? “잠시만, 부케 받고 6개월 안에 결혼 못하면….”


“3년은 시집 못 가지. 너 서른넷에 결혼하고 싶어 했잖아.”

“그건 맞지.”

“좋네! 9월 둘째 주 토요일이야.”


“그래, 고마워. 나야 영광이지…”


회사 생활하면서 사귄 친구가 결혼식에서 부케를 받아달라고 하다니. 이거야 말로 영광이지(그런데 그냥 주변에 받아줄 친구가 없었던 건 아닐까?). 흑백 웨딩사진 속 블랙 드레스를 입고 깔끔한 올림머리에 긴 속눈썹을 아래로 떨어뜨린 경이는 아름다웠다. 작업복에 장화를 신고 공장을 누비는 박 대리가 아니라, 신랑의 환한 미소를 이해할만한 눈부신 예비신부였다. 그 신부는 내가 부케를 받겠다는 답을 마치기도 전에 ‘기뻐라!’ 하는 예의 눈부신 미소를 발산하며 손뼉을 쳤다. 새 집 인테리어부터 쩔쩔맨 상견례 이야기까지 경이는 잠깐 지나가는 에피소드처럼 능숙하게 요약했다.


“(남자 친구가) 언니는 만나봤지만, 철이는 이번이 처음이었어. 둘 다 말 없는 편이라 어색해서 혼났다니까.”

“네 남자 친구도 동생도 둘 다 누나가 있어서 그런가 봐. 특히 철이는 보통 아닌 누나가 둘이잖아…. ”


이런 말을 들으려고 나오라고 한건 아닌데. 라떼에 떠있는 거품을 걷어내면서 같은 카페에서 몇 번 만났던 얼굴이 생각났다. 경이 동생 철이. 얼떨결에 누나들 손에 끌려 나와 커피를 마시는… 경이와 다르게 키는 크고 말은 별로 없었던. 몇 살이더라? 거품을 걷어내자 뽀얀 우유가 드러났다. 경이처럼 얼굴이 하얬지. 그러자 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좀체 없을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야, 너네 동생 다음 주 주말에 뭐한다니?”


아무 때나 찾기 좋은 시청역  「사이먼커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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