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시피 화양연화 #6 참치 샌드위치
1. 청산별곡
성포 앞바다가 훤히 보이는 한적한 카페. 나른한 오후 공기를 가르고 파란 스파크 한대가 가게 입구로 들어섰다. 문이 열리자 알이 큰 선글라스를 낀 묘령의 여인이 카운터 앞에 섰다. 선글라스를 벗자 희고 고운 얼굴이 드러나…, 지는 않았고 땀을 뻘뻘 흘리던 나는 메뉴를 볼 것도 없이 아이스커피를 시켰다. 닷새간의 연휴 셋째 날, 거제도로 자동차 여행을 떠난 지 1시간 30분 만의 도착이었다.
월요일 오후 카페 루프탑은 아무도 없어 테이블이 모두 내 것이었다. 준비해 온 휴가철 필독서는 카미오 요코의 「꽃보다 남자」(서울문화사). 모름지기 소녀라면 모두 이 책을 읽어야 할 것이다. 온 우주가 나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자기애적 감수성은 모든 소녀가 지녀야 할 소양이다. 나 역시 진흙탕 같은 현실 속에서 신기루 오아시스라도 목을 축이고자 이 책을 챙겼고. 흰 티에 청바지를 걸친 듯 청명한 하늘과 수평선, 기름 빵빵 채운 스파크와 아직 한 권 더 남은 만화책이 있는 장면. 그 속에 있자니 조상의 오랜 호연지기가 떠올랐다.
살어리 살어리랏다 바다에 살어리랏다
굴이며 조개랑 먹고 바다에 살어리랏다
얄리얄리 얄라셩. 꿀 같은 휴가가 이틀 남아있었고, 돌아갈 직장이 있었고, 약간의 저축과 한 뼘짜리 부동산이 있었다. 장승포를 지나는 길에 텃밭을 일구던 부부 어르신께 커피를 한 잔 얻어마셨다. 해안 저 멀리 두 명의 윈드서퍼가 보였다. ‘휴가 때 만화책을 읽는단 말이냐?’ 아버지는 여행가방에 잔뜩 실은 만화책을 힐끔 보더니 방으로 들어가셨다. 네, 아버지가 방에 들어가시던 가방에 들어가시던 난 만화책을 읽겠어요. 자동차 여행을 떠나고, 과속을 하거나 술에 취하겠어요. 원하면 윈드서핑을 배우겠어요. 허락이 필요하다면 성숙하고 분별력 있는 어른인 내가 하겠어요. 토익과 이력서와 학위라면 사양하겠어요. 얄라리 얄라.
얄라리 얄라, 전화벨이 울렸다.
고등학교 동창 문이었다.
- 은재야. 잘 지내고 있나? 나 변시(변호사시험) 합격했다. 우리 얼굴 한번 봐야지.
2. 연극부
내가 다니는 고등학교는 동아리 활동이 활발했는데, 그중 몇몇은 말이 동아리지 행실이 다소 약간 많이 단정하지 못한 학우들이 모인 서클이었다. 신입부원 모집 포스터를 붙이는 여타 동아리와 달리 연극부는 언니들이 직접 교실을 찾아다니며 가입을 권유(우리는 ‘찍었다’고 표현)했다. 이름에 걸맞게 용모가 곱고 끼가 많은 학우를 엄선했으며, 이름과 전혀 상관없는 입부 시험을 치러야 했다. 하긴, 술을 양껏 마신 뒤 노래방에서 댄스 신고식을 선보여야 했으니 아주 무관한 시험은 아니었네.
문은 같은 중학교에서 올라와 금세 친해졌는데, 단발머리에 펑퍼짐한 교복 치마를 줄이지 않고 다녔다. 불량 서클이라면 중학교에서도 시달렸기 때문에, 화장도 하지 않았고 쉬는 시간이면 책에 얼굴을 파묻고 자는 척을 했다. 그러나 할당량이 있었던 모양인지 언니들은 단정한 용모의 주인공을 이 잡듯 찾아다녔고, 교과서 사이에 숨겨져 있던 문의 희고 고운 얼굴이 들통나는 일은 시간문제였다.
나는 바로 옆자리에 있었다. 고개도 당당히 들고 다녔으며 연극부원을 복도에서 마주칠까 화장실을 참지도 않았다. 그리고 예쁜 얼굴에는 순위가 있으며 내가 그 첫 번째나 두 번째가 아니라는 사실, 어쩌면 서너 번째도 아닐 수 있다는 점은 그때 처음 알았다.
‘우리’ 동창이란 문을 포함해 연극부 언니들이 점찍었던 네 명이었다. 무리에 끼어서 어깨가 으쓱하기도 했지만, 내가 어울리지 않는다는 점은 언제나 알고 있었다. 문과 나는 그렇게 붙어다니다 다른 지역의 대학교에 입학하면서 멀어졌다. 다들 신입사원이었을 적 한번 본 기억이 마지막이었다. 교사가 하나, 간호사가 하나, 발전소가 하나, 공무원이 하나. 3년 만의 재회 소식에 걱정이 앞섰다. 마침내 자유와 충동에 이끌리는 삶을 살기로 멘털 디톡스를 해냈는데, 질투심에 눈이 다시 멀면 어쩌나? 예의 그 알량한 자기 연민에 사로잡히면 어떻게 하려나?
3. 물혹
만나는 시간을 줄이기 위해, 양해를 구한 뒤 약속 시간보다 40분 늦게 도착했다. 열일곱을 거쳐 스물일곱, 서른이 된 친구들이 고급 중화요리 식당 룸에 모여있었다. 열일곱 얼굴과 크게 다를 바 없는 깨끗한 웃음 사이로 진한 바이레도 향기가 섞여 들었다. 이야기는 또 다른 친구 정이의 사내 연애로 한창 무르익은 참이었다. ‘캠퍼스 커플만 몇 번째냐?’ 누군가 놀리자 문이 뚱한 얼굴로 팔등에 턱을 굈다. ‘그럼 작정하고 꼬시는데 어떻게 안 넘어가.’
턱을 괴고 멀리 응시하는, 예의 ‘나 사연 있는 여자야’ 하는 시선을 던졌다. 부러워마지 않았던 가느다란 손목에 애인이 사줬다는 얇은 팔찌가 빛나고 있었다. 그 아래 반지만 한 크기의 동그란 혹이 있었고. …어? 혹?
- 아 이거? 물혹이래. 손목 많이 쓰면 생긴다는데 아프지는 않아서 뒀어. 민원 전화만 하루에 1 백통은 받거든. 이건 별 것도 아냐. 작년엔 일하다 허리 인대가 늘어나서 응급실도 갔다고.
정은 무시무시한 말을 내뱉으며 탕수육을 집어먹었다. 발전소 합격했다고 동창 모임에서 명함도 돌렸잖아… 좋은 회사에서 손목이 부러지고 허리가 끊기도록 일하는 거야? 목젖까지 올라온 질문을 칼칼한 짬뽕 국물과 함께 삼킬 뿐이었다. 둘러보니 공무원인 경이도, 변호사가 된 문이도, (아마 나도) 눈 밑이 까맸다. 내가 룸에 들어와서 맡았던 건 바이레도 향수가 아니라 진한 슬픔이었는지 모른다. 문득 회사에서, 피로를 숨긴 채 민원 전화를 받는 친구의 모습이 떠올랐다. 직업엔 귀천이 없다. 오로지 슬픔이 있을 뿐.
‘다음에 보자. 좋은 소식(청첩장) 있으면 꼭 말하고.’
코스요리를 남기고, 비싼 커피를 마신 뒤 비 오는 거리로 우리는 뿔뿔이 흩어졌다. 방향이 같은 문이를 내 차로 데려다주는데 그가 갑자기 옛날 일을 떠올렸다.
- 나 변호사 된 거, 어쩌면 너 덕분일지 모르겠네.
- 어? 왜?
- 야 우리 1학년 반 배정됐을 때, 선생님이 네가 1등이니까 임시 반장 하라고 했잖아. 그때 네가 질색하고 안 한다 그래서, 담임이 나 시켰던 일 기억나?
기억하고 말고. 문이는 그 이후 3년 내리 반장을 도맡았다. 그 귀찮은 일을 나 때문에 시작했다며 얼마나 오래 자책했던가?
- 그때 얼떨결에 반장을 처음 맡아봤는데. 내가 생각보다 야망이 있었나 봐. 그때 이후로 항상 앞에 나서는 일, 큰 일 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어.
- ….
서른 살이 되는 일은 대단한 행운이다. 어린 날 경쟁자가, 별 다를 바 없이 전화를 받고 외근을 다닌다는 점을 알기에, 또 우리가 적이 아니라 친구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므로. 모든 일에는 기쁨과 슬픔이 있으며 기쁨이 올 때 힘껏 감사하게 되므로. 우산을 펼친 문에게 인사를 건넨 뒤 페달을 밟았다. 다음에는 소풍을 가자고 해야지. 중화요리니 프라이빗 룸이니 할 것 없이 돗자리 한 장 펼치고 통통한 참치 피클 샌드위치를 대접하겠어.
- 살코기 참치 1통, 오이피클 6조각, 양파 1/2개, 마요네즈 2스푼, 식빵 6장, 홀그레인 머스터드(선택)
1. 프라이팬에 버터를 둘러 식빵을 바삭하게 굽기
2. 양파를 잘게 썬 뒤 물에 담가놓고, 피클을 다진 뒤 꾹 짜서 물기 제거하기
3. 살코기 참치의 기름을 제거한 뒤 양파, 피클, 마요네즈를 버무린 뒤 후추와 소금 간하기
4. 테이블에 종이 포일을 깐 뒤, 한 면에 홀그레인 머스터드를 바른 식빵을 한 장 얹기
5. 참치 속을 식빵에 높이 쌓고 나머지 식빵을 덮은 뒤 포일로 단단하게 포장하면 완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