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시피 화양연화 #10 해물포차와 썸머롤
지난 2월 설 연휴, 떡국을 많이 먹고 서른 살이 된 나는 부모님을 모시고 근사한 레스토랑 고향연화로 갔다. 난 차가 없었으니, 정확히는 부모님이 나를 모시고 갔다. 우린 대기석 2번에 앉아있었다. 그때 또래로 보이는 미모의 여인과 멀끔한 그 애인이 식사를 마치고 나왔다. 하얀 하이힐을 신고 늘씬한 다리에 상아색 코트를 걸친 채 애인이 받쳐주는 우산 속으로 사라지는 그녀. 웨이터가 내 번호를 부를 때까지 그의 뒷모습을 황망히 바라보고 있었다.
4년 차 재무팀 김대리, 명절 연휴를 같이 보낼 이라고는 부모님이 전부인 나. 그 길로 뛰쳐나가 소낙비가 떨어지는 연화리 앞바다를 보고 소리쳤다. 나도 미인이 되겠어! 3개월 안으로, 근사한 애인을 데리고 돌아오는 거야!
하지만 빠르게 흐르는 게 시간의 특기였다. 몇 번의 세금신고를 마치고 나니 어느덧 여름이었다.
변신은 미약했고, 잔고는 바닥났으며, 데이트는 부진했고 애인은 전무한 채.
프로젝트는 이제 막바지에 다다랐다. 나는 강에게 근사한 레스토랑을 안다며, 같이 가보고 싶다는 뉘앙스로 운을 띄웠다. 회사에서 멀지도 않네, 금요일 회사 마치고 가보자며 강은 흔쾌히 날을 잡았다. 3월 초입에 산 뒤로 한 번도 신어보지 않았던 펌프스 힐을 꺼내 먼지를 닦아냈다.
금요일 저녁, 기장으로 통하는 도로 상황이 예사롭지 않았다. 고향연화의 마지막 주문은 7시 30분. 차가 생각보다 훨씬 막히면서 시곗바늘이 벌써 7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강은 놀러 간다는 생각에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더 밟으라고 멱살을 흔들고 싶은 충동이 들었지만, 차가 막히는 게 그의 잘못도 아니고 정체 도로를 달릴 수도 없는 노릇이니. 속만 바짝 타들어갔다.
도착했을 땐 이미 마지막 주문이 끝난 지 오래였다. 하이힐을 신고 절뚝거리며 황망히 가게 앞마당을 내다봤다. Cyber… 분에 못 이겨 발이 동동 구르고 눈물이 찔끔 나는데. 휘파람을 불며 연화리 앞바다를 감상하는 강의 뒤통수를 마구 때려주고도 싶었다(물론 그는 잘못이 없었다). 그렇다고 빈 손으로 올 수도 없지 않은가? 요기라도 할 요량으로 이미 캄캄해진 연화리 주변을 살폈다.
그때 바닷가 저 멀리서 무엇인가 형형히 빛나고 있었다. 그것은 내 광기… 아니, 성황리에 영업 중인 포차 「해물나라」였다.
멍게, 해삼, 전복이 차례로 소쿠리에 담겨 나왔다. 몸부림치는 산 낙지를 꼭꼭 씹어먹은 뒤 테라 한 모금, 다음은 관자, 다음은 키조개, 다음은. 밤바다마저 뜨거운 여름밤이었다. 선풍기 바람을 등진 채 해물왕국 여왕님처럼 모둠 해산물을 맛봤다. 입 안에 남은 비릿한 찌꺼기는 맥주가 씻어주었다. 실크 블라우스를 입고 하얀 하이힐을 신은채 땀을 흘리며. 테라가 한 명, 두병 줄을 섰다. 창문은 검은 밤바다로 가득 찼고, 밤공기는 뜨끈했으며 맥주잔은 손이 시렸고 해산물은 신선했다.
구두 뒤꿈치가 다 까져서 피가 흐르는 것도 잊은 채 얼큰하게 취한 채 귀가했다. 돌아오니 효진이 메시지를 남겨놓았다.
‘언니, 기가 막히는 레시피를 찾았어요. 언제 시간 돼요?’
‘뭔데?’ 침대에 몸을 던지며 짧게 답장했다.
‘라이스페이퍼로 만드는 써머 롤.’
… 그래, 잘됐네. 만들자 다 말아먹은 참에.
- 라이스페이퍼, 새우(中), 쌀국수, 파프리카, 파인애플(선택), 양배추
1. 새우는 데치고, 쌀국수는 물에 충분히 불리기. 야채는 먹기 좋은 크기로 채 썰 것.
2. 큰 볼에 따뜻한 물을 담고 라이스페이퍼를 담가 풀기
3. 부드러워진 라이스페이퍼에 손질한 야채를 깔고, 새우와 쌀국수 한 움큼 올리기
4. 롤을 가로로 말고 양 옆을 접으면 끝.
그리고 한 가지, 그 이후 강에게서는 연락이 없었다. 처음에는 그날 저녁만 피곤한 줄 알았지만 그 길로 완전히 두절되었다. 어떤 인사도 사연도 없이 깔끔하게 잠수. 나는 안심하면서도 내심 감탄을 감탄을 금치 못했다. 강은 우리 연애의 목적지가 세부와 알래스카만큼이나 다르다는 것을 알아챈 것이다. 나는 흠잡을 데 없는 여자 친구였는데, 어떻게 눈치챘지? 하긴 그도 사회생활을 한두해 한 게 아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