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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재 Jul 03. 2021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레시피 화양연화 #9 양심에서 구하소서

1. 스페어


 자랑은 아니지만(이 말을 하는 순간부터 이미 그렇다는 건 알고 있다) 나의 소개팅 승률은 나쁘지 않은 편이다. 볼링으로 치자면 100점 안팎의 성적으로, 항상 스트라이크를 칠 수는 없지만 웬만하면 스페어로 남은 핀을 쓰러뜨리는 편이다. 첫 만남에 상대를 사로잡는 재주는 없지만 (‘이 사람이다’, ‘문이 열리네요’), 두세 번이면 좋은 신호를 받는다는 말이다. 뭐 일단은 젊고, 예쁘고, 직장 생활도 제법 했으니…라고 해도 역시 이유는 상대방만이 알 테지.


 선영이 주선해 강을 소개받았을 때, 나는 평소처럼 큰 기대 없이 만남에 응했다. ‘이번에는 하드웨어만 보겠다고 했지? 그럼 일단 한번 만나봐.’ 선영이 손바닥을 얼굴을 향해 흔들었다. 도대체 행실이 어떻기에 하드웨어‘는’ 볼만하다는 평가를 받는단 말이냐? 그렇다고 해도 이번 달까지는 반드시 멋진 남자와 근사한 레스토랑에 가야 했다. 첫 투에서 핀 열개를 한 번에 쓰러뜨릴 필요는 없다. 아 물론, 성적인 의미는 전혀 아니다.


 강은 선영이 예고(혹은 경고)했던 바와 같이 준수한 용모에 단정한 슈트 차림이었다. 얼굴값 한다고 보기에는 말투가 구수한 점이 인상적이었다. 오랫동안 나이가 지긋한 사람들과 같이 일한 모양이었다. 퇴근 후 우리 집 근처에서 만났는데, 어영부영 시간이 꽤 늦어졌고 강은 택시를 타고 집에 가겠다고 했다. ‘뭐 하려고요? 제 차로 바래다 드릴게요.’ 강은 잠시 고민하더니 차에 탔고, 바래다주는 길에도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집에 돌아와 보니 카카오톡 메시지가 도착해있었다. 요지는 커피를 마실 때 얘기했던 유명한 해운대 정식 집에 다음번 같이 가보자는 바.


 해운대에서 30분이면 레스토랑 ‘고향연화’가 있었다. 스페어를 준비하는 심정으로, 신중을 기해 답장을 조준했다.






2. 하이힐


 지난 2월, 레스토랑 ‘고향연화’에서 그림 같은 연인들 사이 초라한 자신의 모습에 진절머리가 났다. 이를 계기로 미인으로 거듭나 근사한 애인과 그 식당에 다시 돌아가기로 결심했고. 그 사이사이 체중도 줄이고, 퍼스널 트레이닝을 받거나 피부과에 정기 검진을 다니며 바디 프로필도 찍어보았다. ‘예쁜 여자는 자기가 최고로 예쁜 줄 안다’는 선배의 조언에 따라 스스로 최고점을 찍었다고 믿을 때까지. 마음가짐도 달라져야지, 영화 속 주인공 같은 고아한 태도와 세련미 넘치는 행동으로 모두(누구를?) 사로잡겠어. 출근길에 하이힐을 신거나 블러셔를 칠하고 다니기 시작했다.


 물론 하이힐과 블러셔의 요정이 오래 머무르지는 않았다.



‘김대리님, 철거자재가 업체랑 계약한 내용보다 많이 나왔는데요. 어떻게 처리할까요?’


 도로관리팀 정대리 이 놈은 글자를 읽을 줄 모르는 놈으로, 일만 터지면 재무팀에 즉각 전화를 걸었다. 흡사 여기가 콜센터인 줄 아는 모양이군.


‘제가 현장에 없으니 얼마나 초과했는지 감이 안 잡히네요. 계약 업체하고 협의하셔야겠습니다.’

‘네? 현장을 모른다 하지 마시고 와서 한번 보시죠. 계약은 대리님 담당이지 않습니까.’



블러셔를 바를 필요는 없었겠네. 이미 속에서 천불이 나고 있었으니까.



‘정대리님, 근무하시는 팀이 어디시죠?’

‘도로정비팀인데요.’

‘철거자재는 어쩌다 발생했지요? 도로 정비하다 나온 거지요?’

‘그렇죠.’


‘그렇다면 정비공사로 철거자재가 많이 나왔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정대리님 쪽에서 계약을 변경할지, 다음에 버릴지, 아니면 재활용 업체에 가져다 팔지 정해주셔야겠죠.

사무실에서 전표 치는 제가 가서 고철이니 스테인리스를 보고 오면 답이 나올까요?’



수화기 너머로 긴 침묵이 이어졌다.


‘대리님이 결정하면 제가 배정된 예산과 기간 내에서 적법한 업체와 계약을 하겠죠. 그게 제 담당입니다.’



 글자는 몰라도 말귀는 알아듣는 모양으로, 정대리는 생각해 보겠다며 전화를 끊었다. 그러나 이미 하이힐과 블러셔의 요정은 꽁무니를 빼고 달아난 지 오래였다. 옆자리 후임이 슬금슬금 사라지더니 냉커피를 가져왔다. ‘건설폐기물 처리지침이라도 보내 놓을까요?’ 아니, 그런 게 있는지도 모를 거예요. 그루프로 애써 말아둔 앞머리를 쥐어뜯었다. 회사를 다니면서 영화 속 주인공으로 거듭난다는 게 가능은 할까? 출근한 지 두 시간도 안돼 블러셔가 번진 뺨을 보고는, 퍼프로 마구 두들겨 고쳤다.






3. 하드웨어


‘오빠는 △△전자 강 과장이 아니라면 뭐가 되고 싶어요?’


 세 번째 만남에서 강은 이제 슈트가 아닌 아이보리색 티셔츠에 무릎 기장의 면바지를 입고 나왔다. 반바지 아래로 장딴지가 길고 튼튼해 자꾸 눈길이 갔다. 지난 주말 한라산을 등반하고 왔다더니 종아리며 팔뚝이 구릿빛이었다. 더 즐겁고 깊은 이야기를 나눌 때가 되었다. 강은 계란초밥에 간장을 너무 많이 찍지 않으려고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었다.


‘음… △△그룹(모기업) 강 이사?’

‘아하.’

‘진급이야말로 모든 직장인의 보람 아니겠어요?’


아하.

초밥 속 고추냉이가 너무 많이 들어간 걸까? 콧 속이 시큰했다.


‘아! 아니면…’

‘?’

‘○○이 아빠. 삼촌 말고요.’ 그가 씩 웃었다.


 오호통재라….  ○○이는 그의 조카로, 쌍둥이 동생이 낳은  살짜리 딸이었다. 강은 앞서 일찍 장가든 쌍둥이 동생이 있으며, 평일 저녁엔 회식을 하거나 근처 사는 조카를 돌보고, 주말이면 사내 산악동호회 동료들과 등반을 한다고 했다. 동생 부부는 딸이 조금 크자 캠핑을 다니기 시작했고, 그도 따라가 조카를 돌본다고 했다. ‘예비 아빠 교육  셈이죠.’ 어머어머 재밌겠다, 박수를 치며 이번 가을쯤 그의 동생 부부와 캠핑장에 나란히 앉아있는 모습이 떠올랐다. 어머어머 귀여워,   박수를 치며 뛰어노는  살짜리를 쫓아다니겠지. (그런데 3살이 뛰어다닐 수는 있던가?) 강과 대화를 하다 정신을 차려보면  이런 식이었다.


‘차 좋네요. 운전 잘하나 봐요?’

‘네. 산지 얼마 안 돼서 그런가? 운전이 재밌어요.’

‘그래요? (그는 싼타페를 몰았다) 저는 한참 됐는데… 나중에 애 생기면 바꾸려고요. 카니발 같은 차로.’



 오호통재라…. 그 카니발 속을 누가 다 채워주게 될는지 진심으로 궁금해졌다. 비로소 선영이 한 말의 의미를 이해했다. 하드웨어만 볼 거라면 이 남자 만나보라던. 그의 행실이 단정하지 못해서가 아니었다. 오히려 ROTC를 제대하고 장교 전형으로 대기업 영업직에 입사한 이 남자, 퇴근 후 동료와 소주 한잔을 걸친 뒤 조카의 선물을 사 가고, 휴일이면 사내 산악회 사람들과 한라산을 등반하는 이 성실한 예비 가장을, 감당할 수 있을 테면 해보라는 말이었다. 강은 계란초밥을 먹다 말고 스타리아(스타렉스 신형) 카탈로그를 검색하고 있었다.


오 갓, 제발 고향 연화에 갈 때까지만 양심에 털이 나게 하소서.

그다음부터는 어떤 성실한 남자도 건드리지 않고 얌전히 혼자 살게요. 그러니 제발…



어머어머 예쁘다, 나는 그가 보여준 자동차 카탈로그 스크롤을 내리며 맞장구를 쳤다.


편안한 위치와 분위기의 쟈니스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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