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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나현 Aug 27. 2020

맥주 한 숟가락을 먹여 주던 엄마

언니와 나는 어렸을 때 아주 순했다고 들었다.

그렇게 순했던 우리가 가끔 잠을 잘 안 자고 보채는 날, 엄마는 숟가락에 맥주를 떠서 우리에게 먹였다고 했다. 꿀꺽꿀꺽 몇 숟가락씩 잘도 받아먹고 이내 잠들어 버린 후에 다음 날 늦게까지 숙면을 취해서 엄마를 편하게 해 줬다는 이야기. 엄마가 해 준 이 이야기를 나는 참 좋아한다. 숟가락 맥주 맛을 기억할 수는 없었지만 그 이야기를 할 때 멋쩍은 듯 웃는 엄마의 표정이 오랫동안 기억에 남아 있다.



영화 <아가씨>에서 보영당 식구들이 돌보던 갓난아기가 보채면 사케를 한 숟가락씩 먹여서 재우는 장면이 나온다. 그 영화를 같이 본 친구에게 우리 엄마도 어렸을 때 저렇게 했었다는 이야기를 아주 가벼운 마음으로 했다. 그 친구는 적잖이 충격을 받은 표정으로 내 손을 잡고는 아주 잘 자랐구나 라는 식의 위로 아닌 위로를 해 줬다. 그 뒤로 다른 친구들에게 이야기를 해 줘도 별반 차이 없는 비슷한 반응이었다. 내가 참 좋아하는 엄마와 나의 이야기인데 다른 사람들 눈에는 아동학대 수준의 느낌으로 다가갔을 수도 있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받아 마신 맥주가 내 몸 어딘가에 안 좋은 영향을 줬을 수도 있지만 그 대가로 엄마가 달콤한 휴식을 누렸다면 기꺼이 또 받아 마실 수 있다.



조기교육(?)의 영향인지 몰라도 나는 맥주를 좋아한다. 잘 마시지는 못하지만 다른 사람들과 술자리를 가져야 할 때면 내가 선택하는 주종은 무조건 맥주다. 엄마도 맥주를 좋아했다. 갈색 유리병에 들어 있는 맥주, 허전해 보이는 땅콩 몇 알 혹은 김 몇 장과 엄마의 모습이 종종 떠오른다. 아빠가 들어오지 않는 밤에 초라한 안주에 맥주를 마시던 엄마는 왠지 쓸쓸해 보였다.

더운 여름밤, 샤워를 하고 나와 시원한 캔맥주를 마시며 오징어를 질겅거리거나 왁자한 호프집에서 사람들과 환담을 나누며 마시는 생맥주가 내가 경험한 전부다. 그런데 엄마의 맥주는 어딘지 모르게 늘 슬퍼 보였다. 슬프게 맥주를 마시던 엄마는 서른도 넘지 않았을 텐데 어린 눈으로 보기에도 삶의 고단함이 묻어 나오곤 했다. 엄마의 고단함을 어렴풋이 짐작은 할 수 있을 것 같지만 자세한 속사정을 나는 알지 못한다. 친구들과 맥주잔을 기울이며 나눈 대화들보다 더 기울어진 삶의 무게가 느껴지더라도 기꺼이 그 무게를 나눠지고 싶다.



엄마가 나에게 숟가락으로 맥주를 먹여준 것처럼 나도 엄마의 맥주잔에 맥주를 따라 줄 날을 소망한다.

초라한 땅콩 몇 알 대신 푸짐한 안주를 앞에 두고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며 지나온 나날들을 빠짐없이 들어주고 싶다. 내가 숟가락으로 받아 마신 맥주가 엄마의 고단함을 덜어 줬듯이 내가 따라주는 맥주로 지난 삶의 슬픔들을 씻겨줄 수 있으면 좋겠다. 떨어져 있던 시간만큼 쌓인 어색함은 부드러운 맥주 거품처럼 다 사라져 버리고 구수한 뒷맛만 남아 있을 날을 기다리고 또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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