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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나현 May 22. 2020

내 편

  사춘기를 맞은 열여섯 살 중학생 아이와 수업 시간에 높은 언성이 오갔다. 수업태도에 대한 지적이 그 아이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는지 입에 담기 힘든 쌍욕을 하고는 가방을 싸서 나가버렸다. 많은 학생들이 이 모습을 지켜봤다. 몸이 부들부들 떨리고 가슴이 쿵쾅거렸다. 그래도 내색할 수 없기에 계속 수업을 진행했다.


  수업이 모두 끝난 후에 무거운 마음으로 학생의 어머니께 전화를 드렸다. 이미 어머니께서는 학생의 전화를 받은 상태였다. 격한 감정의 학생은 어머니께 철저하게 자신의 입장에서 말을 전했다. 그 상황을 알고 있는 나는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마음이 상하셨을 어머니께도 위로의 말을 건넸다. 오히려 어머니께서는 당신의 아들 때문에 나를 불편하게 한 것 같아 죄송스럽다는 말로 나를 다독이셨다. 그러면서도 아들 앞에서는 아들의 편을 들어주겠다고 말씀하셨다. 적어도 나만큼은 우리 아이가 기댈 곳이 있어야 되지 않겠냐고 하셨다. 학생에게 들은 욕으로 인해 울렁이던 가슴은 어느새 울먹이던 목소리로 변해버렸다. 그 아이가 몹시도 부러웠다. 이 세상 사람들 모두가 등을 돌려도 내 편이 되어줄 단 한 사람이 있는 그 아이가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나도 퇴근길에 오늘 이런 속상한 일이 있었다고 전화 통화할 내 편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바라고 또 바랐다. 걸 곳 없는 전화기만 만지작거리다가 지금과 비슷한 기분을 느끼던 십 여 년 전의 날이 떠올랐다.



   초등학교 4학년 때 내 짝은 연두색 뿔테 안경을 낀 작은 남자아이였다. 그 때만 해도 1월과 2월생 아이들은 본래 나이보다 한 학년 먼저 초등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다. 그 아이가 유난히 키가 작았던 이유도 아마 일 년 빨리 입학했기 때문인 것 같았다. 그 아이가 빠른 생일이라는 것을 알고 난 후에 나는 장난으로 나에게 누나라고 부르라고 했다. 하지만 맹세코 말하건대 나는 그 아이를 때리거나 못살게 괴롭힐 정도로 심성이 못된 아이는 아니었다. 그저 흘리는 말로 몇 번 이야기했을 뿐이었다. 물론 그 아이도 나에게 누나라고 부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어느 날 그 아이가 같은 반 여자아이와 나를 집으로 초대했다. 엄마께서 맛있는 음식을 해 주고 싶다고 친구를 초대하라고 하셨다는 말과 함께. 생일도 아닌데 초대를 한다고 해서 의아했지만 먹고 싶은 음식을 이야기해 달라기에 김밥과 떡볶이를 먹고 싶다고 말했다. 토요일 날 학교가 끝난 후에 같은 반 여자아이와 셋이 짝의 집으로 가던 발걸음은 참 가벼웠다.

  금테 안경을 꼈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짝과 똑 닮은 엄마는 내가 먹고 싶다고 했던 음식들을 손수 차려 놓고 기다리셨다. 맛있게 음식들을 먹고 있는데 짝의 엄마께서 나에게 말씀하셨다.

 “XX이 짝! 너 XX이한테 누나라고 부르라고 한다며? 앞으로 다시는 그러지 마라!”

단호하고 쌀쌀한 말투로 말씀하시던 어머니의 눈빛 너머로 짝의 자랑스러운 미소가 함께 보였다.


  그 순간 다섯 살 때 부모님께서 이혼하신 후 초등학교 입학 전까지 나를 괴롭히던 거식증의 느낌이 되살아나는 것 같았다. 큰 대접에 국과 밥을 말아 두 그릇을 먹고는 숟가락을 놓는 순간 그 대접에 그대로 뜨거운 토사물을 뱉어내고 다시 허기를 느끼기를 반복했던 어린 시절의 내 모습을 떠올리고 조용히 젓가락을 놓았다. 더 이상 먹으면 안 될 것 같았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던 나를 같이 갔던 여자애가 변호해줬다. 그리 친하지 않았던 여자애였는데도 내 편을 들어주고 싶을 정도로 내가 가여워 보였는지도 모른다. 둘이 친해서 장난으로 그런 거라고, 앞으로는 안 그러겠다고 나대신 다짐도 해주던 그 아이가 정말 고마웠다.


   그때 나는 일종의 충격을 받았던 것 같다. 다른 사람들은 이렇게 내가 받은 놀림을 이야기할 수 있는 내 편이 있구나. 그리고 든든한 내 편은 이렇게 세련되고 고상한 방법으로 악당을 물리칠 수 있구나. 그날 나는 철저하게 악당이었다. 집에 돌아오는 길에 같이 갔던 여자애의 손에는 김밥이며 떡볶이를 담은 봉지가 들려져 있었고 나는 빈손이었으니까 말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때 그 짝의 엄마는 정말 훌륭한 어머니셨다. 당신의 아들을 괴롭히던 사악한 악당인 나에게 음식을 대접해주시고, 고상한 태도로 가벼운 경고를 하셨으니 말이다. 하지만 거의 이십여 년이 되어 가는 지금까지도 나에게는 아물지 않는 상처로 남아있는 순간이다. 내가 가질 수 없는 것을 나만 빼고 주변 사람들은 모두 가졌구나 하는 배신감과 그로 인한 상실감을 생생하게 체감한 순간이었다. 그리고 그 느낌을 감당하기에 나는 너무 어리고 약했다.


  돌아가신 엄마를 그리워하는 어떤 시의 내용처럼, 엄마를 다시 만나서 세상사의 일 중에서 딱 한 가지 서러운 일을 일러바칠 수 있다면 나는 이 일을 말하고 싶다. 그때 그 아이의 엄마처럼 김밥이나 떡볶이를 만들어주지 않아도 되니까, 그냥 내가 그때 너무 서러웠다고 말하고 싶다. 아니, 그냥 그런 일이 있었다는 걸 알아주기만 해도 참 좋겠다고 꼭 말하고 싶다.

걸 곳 없는 전화기 대신 펜을 잡고 얼룩진 종이 위에 이렇게 꾹꾹 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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