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로는 휴식이 필요합니다
새벽 4시. 회사 업무와 여행 준비로 인해 새벽 2시에 잠든 뒤, 겨우 2시간 남짓의 시간이 지난 시점. 주섬 주섬 옷을 챙겨입고 모자를 푸욱 눌러쓴 채 집을 나섰다. 공항까지 운전해서 가는 길에 다행히 졸음이 몰려오지는 않았지만 이 때까지도 여행을 떠나는게 실감이 나지 않았다. 이번 여행은, 일상으로부터 벗어나는게 필요했기에 정말 급하게 떠난 느낌이다. 그렇지 않으면 뒤틀리고 복잡해진 머리 속 실타래가, 영영 풀리지 않고 나를 더 옥죄어 올 것만 같았다.
과거 내가 여행을 떠난 시점을 떠올려보면 대체로 비슷한 이유였다. 힘들 때면 위로 받기 위해, 생각이 많아지면 정리하기 위해, 일상이 지루해질때면 활기를 불어 넣기 위해 여행을 떠났다. 이번 여행 또한 그랬다. 머리 속이 복잡해지고 일상에 지쳐있는 나에게 휴식과 생각 정리가 필요했다. 여행은, 이런 나에게는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행위였다.
지난 여행들을 돌이켜보면 대게는 혼자 여행을 갔던 때가 인생의 변곡점을 맞이한 시기였다. 수능을 거하게 말아먹고 기대했던 입시가 생각대로 잘 풀리지 않은 시점에, 부모님 없이 친구들과 함께 떠났던 갓 스무살의 일본 자유여행. 11일 간의 여행 기간 중 이틀은 혼자 교토에서 이곳 저곳을 돌아다녔다. 몇십 년만에 폭설이 내린 교토에서, 앞으로의 인생에 대해 고민에 빠졌었다. 소복이 쌓여가는 눈 사이로 한걸음 한걸음 발을 내딛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게 남아있다. 한 층 한 층 교토에 눈이 쌓여갈 때마다 내 머리 속 생각의 층들은 한겹씩 벗겨지고 정리되었다. “수능은 끝났고 앞으로 어떻게 하지? 내가 하고싶어하고 좋아하는 일은 무엇일까? 원치않는 대학에 입학하게 될 경우, 나는 무엇을 해야할까?” 등 여러 의문들이 내 머리 속을 지나가며 그 의문들에 조금씩 답을 내려갔다.
물론 그 때 당시에 모든 의문이 완벽하게 해결됐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어느정도의 갈피는 잡을 수 있었고 시간이 지나면서 정리한 방향들을 토대로, 정제되지 않은 생각의 원석이 차츰 다듬어졌다. 아직까지도 온전치 않은 원석이지만 앞으로 살아가면서 나의 원석이 더 가치있는 보석이 될 수 있게 끊임없이 다듬어 가는 과정이 필요하다. 당장에는 보석이 아니고 그저 가치없는 한낱 돌멩이일 수 있지만, 돌멩이는 억겁의 세월동안 수없이 깎이고 다듬어져 다이아몬드가 된다. 포기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그 여행 이후, 당시에 제일 중요했던 물음인 “원치않는 대학에 입학하게 될 경우, 나는 무엇을 해야할까?”에 대한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입시를 다시 준비하는, 재수는 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한다고 해도 잘할 자신이 없었고 더 좋은 대학에 가는 것보다, 차라리 대학을 입학하여 다른 학과로 “전과”한 후에 편입을 준비해야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무엇보다 1년의 시간을 자유를 통제하며 더 버틸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당시에 재수를 결심한 주변 친구들을 볼 때면,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 밖에 들지 않았다. 큰 결심이고 그걸 버틸 용기가 준비되어 있었다는거니까.
혼자 떠났던 또 다른 여행은 군대를 전역한지 한달이 채 되지 않은 시점이었다. 스물 두 살의 12월이었다. 1년 9개월의 시간동안 고생한 스스로에 대한 보상이었고 이 여행만을 바라보며 전역을 기다렸었다. 한달동안 배낭을 메고 태국, 미얀마, 베트남을 돌아다녔다. 태국과 베트남에서는 군대 동기들과 함께 했고 미얀마에서는 일주일 동안 혼자 만달레이, 바간과 양곤을 돌아다녔다. 미얀마에서의 그 일주일은 내 인생에서 제일 소중한 여행이 되었다. 그곳에서 정말 많은 것들을 경험하고 배우고 인생의 가치관을 정립할 토대를 마련할 수 있었다. 한국이었다면 경험하지 않았을 물갈이를, 만달레이에서 바간으로 이동하는 날에 겪었고 몸에 있는 모든 수분과 기력이 다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너무 심해 현지 병원까지 갈 정도였으니까. 그리고 이틀정도 지나고 몸이 괜찮아질때쯤 바간에서 100달러와 20만원 가량의 미얀마 돈을 도둑질을 당했다. 당시로서 가지고 있던 모든 현금이었다. 한국이었다면 겪지 않았을 일들이었기에 더 남다른 경험이었다. 미얀마에서는 모든 것이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았고 그래서 더 기억에 남는다.
계획대로 순탄하게 흘러가지 않는다는 것이, 여행과 인생이 닮은 점이라는걸 그 때 경험을 통해 배울 수 있었다. 물갈이로 인해 미얀마 일정을 조정할 수 밖에 없었지만 계획이 틀어진다고 세상이 무너지는건 아니었다. 그 여행 이후로 나는 여행을 계획할 때만큼은 모든 것을 다 계획하지 않는다. 어차피 틀어질 것이 뻔하기에 대충 어디가서 뭘해야지 정도의 큰 틀만 짜고 세부적인건 현지에서 겪어보고 당일이나 전날에 결정한다. 기대했던 것보다 현지가 별로일 수 있거나 더 괜찮을 수 있고, 휴식이 필요하거나 체력이 남아서 더 돌아보고 싶을 수 있으니까.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들이 발생하는 것이 여행이기에 더이상 모든걸 세세하게 계획하지도 예상하려 들지도 않는다.
우리의 인생도 마찬가지다. 항상 예기치 못한 곳에서 뜻하지 않은 일이 일어나고 이로 인해 기대했던 인생과는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기도 한다. 계획대로 잘 풀릴 때도 있고 정말 크게 미끄러져 남들은 경험하지 못할 것들을 겪고 좌절하기도 한다. 인생이 어떻게 흘러갈지 아는 사람은 단언컨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저 인생을 조금 더 예측 가능한 방향으로 끌고 가기 위해 노력할 뿐이다.
한달 동안의 여행동안 생각을 정리한 후, 복학하여 전과를 하였고 이 후에는 다른 대학으로 편입을 계획했다. 하지만 코로나 이 후, 모든 대학이 원격 수업으로 전환하면서 편입을 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모든 수업이 원격으로 대체 가능하다는 것을 경험한 후로 더이상 대학이, 장소에 구애받지 않는다는 것을 몸소 경험했던 것이 큰 계기였다. 온라인 강의가 빠르게 확산되고 이제는 원한다면 미국 MIT의 수업을 한국에서도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원한다면 그 수업에 대한 수료증까지 받을 수 있다. 모든 것이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았지만 이제는 계획이 틀어진다고 해서 초조해하지 않는다. 생각대로 잘 풀리지 않는다고 주변을 탓하는 것은, 나에게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여행을 통해 배웠고 틀어진 계획 속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 무엇인지 빠르게 선택하는 것이 더 나은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최고의 선택은 없다. 최선의 선택만이 있을 뿐이다. 무엇보다 현실의 벽에 좌절하기에는 남은 시간이 너무나 아깝고 소중해서 주변을 탓하기보다 주변을 그저 받아들일 뿐이다.
2023년 1월 미국 LA로 떠났던 여행은, 홀로 떠났던 세번째 여행이자 처음 아시아를 벗어나는 여행이었다. 감사하게도, 대학을 졸업하기도 전에 곧바로 회사에 입사하게 되었고 사회로 나가기 전 대학생 신분으로 맞이하는 마지막 여행이었다. 설렘 반 두려움 반으로 도착한 LA 공항은 기대했던 것과는 많이 달랐다. 미국 입국심사가 매우 엄격하다고 들었지만 별다른 의심과 질문없이 간단히 입국심사대를 통과했다. 걱정했던 것이 부끄러울 정도로 물흐르듯이 통과됐다. 세계 최대 가전박람회인 CES 전시회 기간이라 한국인이 유독 많았고 눈길 닿는 곳마다 한국인이 보였고 한국어가 들렸다.
미국 여행 자체는 큰 감흥없이 끝내고 돌아왔다. 큰 기대와 함께 여행을 나섰던 것은 아니었고 그저 휴식이 필요했다. 대학교 4년을 별 탈 없이 무사히 졸업해준 나에게, 그리고 마지막 1년은 정말 후회없이 달려온 나에게 주는 보상이었다. 그리고 곧 사회로 첫걸음을 하게 될 나에게 주는 응원이자 위로였다. 입사하기 전에 내가 회사를 통해 무엇을 얻고 싶은지, 원하는 삶은 어떤 것인지, 되고자 했던 나의 모습은 어떤 사람이었는지 등 스스로에 대해 돌이켜보고 다짐하는 그런 여행이었다.
글을 적다보니 대학교 2학년 때 다짐했던 목표가 불현듯 머리 속을 훑고 지나간다. “졸업할 때가 되면 내가 원하는 때에, 원하는 프로그램을 한계없이 자유롭게 만들 수 있는 사람 되기”, “졸업할 때가 되면 전공분야에서, 또래 학생들 중에 손에 꼽히는 사람 되기”. 돌이켜보니 졸업할 무렵의 나는 그런 사람이 되어있었다. 전국의 각 대학에서 선발된 내로라하는 팀들 사이에서 당당히 장관상을 거머쥐었으며 내가 만들고자 하는 프로그램은 밤을 새서라도 어떻게든 만들어냈었다. 당시에는 어쩌다보니 그렇게 됐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와서 돌이켜보니 평소에 그런 사람이 되려고 끊임없이 되새기고 견뎌내다보니 목표에 도달할 수 있었지 않았나 싶다. 안될 것 같다고 무작정 포기하고 목표없이 흘러가는 것보다, 목표에 도달하려고 끊임없이 머리속에 되뇌이고 또 되뇌이면 어느샌가 그런 사람이 되어있다. 적어도 그 근처에 도달해있다.
이 또한 여행과 비슷하지 않을까. 여행의 목적지를 정해놓으면 어떻게든 그곳에 도달하기 위해 비행기를 타든, 배를 타든, 걸어가든 그곳에 도달한다. 여행을 가야겠다고 다짐하지 않는 이상 우리는 그곳에 도달할 수 없다. 목적지에 도달하기 위해, 떠나야겠다고 생각을 하고 마음을 먹는 것이 선행되어야 우리는 그곳을 벗어날 수 있다. 반복적인 일상에서 반복적으로 떠도는 것을 우리는 여행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일상에서 벗어나 새로운 목적지를 향해 나아가는 것, 적어도 나는 그것을 여행이라고 부른다. 앞으로도 나는 끊임없이 일상을 벗어나 여행을 떠날 것이고 어떻게든 목적지에 도달하려고 발악할 것이다. 그것이 나에게 있어 삶의 의미이고 원동력이니까.
끝으로, 드라마 <스타트업> 의 대사 한 구절과 함께 글을 마친다.
“일단 빌어. 그리고 이뤄.”
2024년 11월 9일, 베트남 사파에서 작성한 글.
여행을 하고있을 미래의 나에게, 그리고 또 다른 누군가에게.
안되더라도 포기하지 말고 잠시 멈춰보는 것도 좋아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