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사활동 나온 학생들로 온 동네가 북적북적했다. 그들은 허술한 골목마다 빛나는 청춘의 생기를 채웠다. 일은 서툴렀지만 뭐든 주저하지 않았다. 종아리에 힘줄이 툭툭 불거진 다리를 내놓고 논일, 밭일 거친 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먼저 떠난 영감이 아쉽지 않게 부서진 농기계를 살려내고 부엌 문짝을 고쳐주었다. 알뜰하던 마누라 손길을 잠시 잊게 묵은 이불 홑청을 뜯어서 시원하게 때를 쏙 빼다 주었다. 느티나무 아래 앉아 오가는 사람 구경하며 온종일 소일하던 노파의 두꺼워진 손톱 발톱을 깎아주었다. 꼬부랑 지팡이 대신 손을 잡고 함께 보건소에도 다녀왔다.
저녁이면 마을회관에 연극 마당이 펼쳐지고 뒤이어 어김없이 신명 난 풍물놀이도 한 판 했다. 그럴 때는 찐 감자며 옥수수, 뜨끈뜨끈한 술빵에 시큼털털한 막걸리와 풋내 나는 열무김치로 걸판지게 한 상이 차려졌다. 상을 물리고 나면 팔씨름이 이어졌다. 지칠 줄 모르는 청춘들도 농사일로 굵어진 사내들의 팔씨름은 이겨낼 수 없었다. 어머니 같은 아낙들이 입에 넣어주는 수박을 덥석덥석 잘도 받아먹었다. 그렇게 평상에 가로세로 발을 겹치고 누워 밤별을 바라보고 있으면 어느새 생쑥 타는 냄새가 아련히 잠 속으로 스며들었다.
마당 모깃불이 사그라들고 밤이 좀 깊었다 싶으면 벌써 새벽이고 4시만 넘으면 통이 트고 있었다.
청춘, 그들의 농촌 일정이 물처럼 꿈처럼 흘러갔다.
목이 마른 경이의 갈증을 풀어줄 일이 생겼다. 서울에서 온 학생이 경이의 한글공부를 돕겠다고 나섰다. 책상 위 사진 속 인물 규진이었다. 규진에게 쓴 편지에 석영의 부탁이 있었다. 서울에서 내려온 학생이 주도하는 공개학습이라면 입암댁도 드러내놓고 반대할 수 없을 거라는 생각에서였다.
그동안 경이 공부를 반대하는 입암댁의 태도는 동두철신이었다. 경이가 한글을 깨치고 셈에 능하게 되면 더 이상 경이를 탱자나무집에 매어 놓을 수 없다는 입암댁의 계산에서 나온 무언의 폭력이었다. 경이의 세상을 탱자나무집으로 한정시켜 품삯 없이 부릴 일꾼을 무기계약하는 구속이었다. 경이가 심부름에서 돈 계산을 못하거나 시계를 볼 줄 모르는 것은 일을 부리는 입암댁 입장에서도 상당히 불편한 일이었기에 간신히 셈을 하고 시계 보는 정도만 가르쳐 놓았다. 또래들이 벌써 구구단을 외우고 책을 줄줄 읽고 일기를 쓸 때 경이는 한글 자음 모음도 깨치지 못했다.
이장 소일군은 봉사활동에 협조하지 않는 탱자나무집 원중에게 우격다짐으로 대청마루를 내놓으라 으름장을 놨다.
"시방 이 동네서 젤 부잣집이 이려도 되는 거여? 모다 덜 십시일반 힘을 보태는디 이 집만 말 살에 쇠뼈다귀같이 이려서는 안 돼야. 다른 거 필요 없고 이 집 대청마루가 너른게 공부 허는 장소나 제공혀. 시원한 수박 몇 덩이 준비허고."
입암댁은 이 모든 일들이 탐탁지 않았다. 재산으로 보나 가문으로 보나 이 동네 사람과 차별된 집안이라는 근거 없는 자만심을 갖고 있었는데 찬물을 잔뜩 뒤집어쓴 꼴이 되었다. 일이 어차피 이렇게 된 바에야 동네 사람들이나 서울 청년들에게 더는 야박한 모습으로 체면을 깎이고 싶지 않았다. 대청마루를 내주었다.
야학교실이 탱자나무집 대청마루이니 경이도 거기에 자연스레 끼어들 수 있었다. 석영과 규진이 도모한 결과였다.
입암댁이 울며 겨자 먹기로 경이의 야학교실을 허락했다. 그렇게 경이의 야학이 시작되었다.
규진이 주축이 되고 석영과 법학과 만세가 따라붙었다. 만세는 경이의 과외선생이 되어 한글 지도를 도맡았다. 경이는 삼복더위 아래 집안일에 지쳐 초저녁부터 오는 잠을 이겨내기 힘들었지만 허벅지를 꼬집으면서라도 어떻게든 한글을 깨치고 구구단도 외워야 했다.
입암댁은 경이가 공부를 포기하도록 종용했다. 그런 낌새를 알아챈 만세는 배포있게 입암댁을 겁박했다.
" 아주머니, 국민학교는 의무교육이라는 거 모르세요? 보호자에게 아동을 취학시킬 의무가 헌법에 명시되어 있어요. 학령아동을 취학시킬 의무가 있는데 왜 경이는 취학연령인데도 학교에 안 다니는 거죠? "
야학으로 신바람이 난 것은 경이뿐 아니었다. 규진과 석영은 함께 보내는 시간 틈틈이 다정한 눈빛을 주고받았다. 석영의 밤마실이 이어졌고 경이는 몰래 대문을 열어 주었다.
새벽부터 종일 울어대던 매미 소리가 잦아든 자리에 반딧불이가 한 밤의 왈츠를 추었다.
석영과 규진은 한 쌍의 반딧불이가 되어 농밀하고 끈적한 여름밤 풍경이 되었다.
밤늦도록 경이 방에는 불이 켜져 있었다. 만세가 사과궤짝으로 만들어 준 책상에는 경이의 공책과 연필이 올려져 있었다. 그걸 볼 때마다 경이의 마음속에는 조용한 바람이 생겼다. 석민이 서울에 올라가기 전 경이에게 주고 간 책을 읽어보는 것이었다. 겉표지가 까맣고 책배가 빨간 두꺼운 책이었다. 펼쳐보면 깨알 같은 글씨가 세로로 쓰여 있다. 경이가 가진 첫 책이고 유일한 책이었다. 경이는 그 책을 어서 읽어보고 싶었다. 책상에 엎드려 졸다가도 벌떡 일어나 졸음을 참아가며 읽고 쓰기를 반복했다.
처서가 지나면서 조석으로 시원한 바람이 섞여 들었다. 경이는 날마다 고추밭으로 나가 붉은 고추를 따느라 손이 얼얼할 지경이었다. 내리쬐는 땡볕과 땅에서 올라오는 지열, 고추에서 뿜어져 나오는 열기에 땀이 비 오듯 했다. 올해 고추 농사가 풍년이라 고추밭 일이 넘쳐났다. 경이와 입암댁 둘이 감당하기엔 역부족이었다. 탱자나무집 행랑살이가 고약하다는 소문이 근동에 나서 올해는 누구도 행랑살이를 하려 들지 않았다. 품삯을 주고라도 일손을 사야 하지만 입암댁 욕심은 그러지 않았다. 자연스레 경이가 해내야 할 몫이 곱절로 늘었다. 게다가 밤에는 공부를 한다고 늦도록 쉬지 못했으니 탈이 날 수밖에 없었다.
경이가 앓아누웠다. 열이 펄펄 끓고 장미 모양 발진이 돋았다. 물 한 모금만 마셔도 몸 밖으로 바로 내보냈다. 구토와 설사가 이어졌다. 입암댁은 일을 부리지 못하자 온갖 욕부터 퍼부어 댔다.
"이런 경을 칠. 어쩔라고 이 바쁜 때를 골라서 아픈 지랄을 허는가 모르겄네. 팔자에도 없는 공부를 헌다고 난리 해 쌌더니만. 필경에는 이 꼬락서니로 자빠져 있댜? 송충이는 솔잎을 먹어야 탈이 안나는거여. 내 말 명심혀."
비수 같은 말을 창고방 안까지 꾹꾹 밀어 넣고 휑 하니 고추밭으로 나갔다. 몸에서 물을 받아들이지 못하니 탈수 증세가 일었다. 열이 오른 머리가 불덩이였다. 베개가 겨울철 아랫목 담요처럼 금세 뜨거워졌다. 베개를 반대편으로 뒤집어 뜨거워진 면이 방바닥을 향하게 했다. 이마에 물수건이 없으니 그렇게라도 해서 열을 빼내고 싶었다. 불러도 대답할 기력이 남아있지 않았다. 눈꼬리에 마른 눈물 자국이 꽃처럼 피었다. 입술이 찐 감자 껍질처럼 거칠게 일었다. 학교에 다녀온 석영이 가방도 내려놓지 않고 창고방으로 곧장 갔다. 방 안에서 악취가 진동했다. 경이가 거기 누덕누덕한 이불을 덮고 죽은 듯 누워있다. 황급히 방 안으로 뛰쳐 들어가 경이를 흔들어 깨웠다. 경이가 석영을 보더니 희미한 웃음을 지었다. 석영이 뜨거운 눈물로 뜨거운 흰 죽을 끓였다. 김이 펄펄 오르는 죽그릇에 눈물이 고명처럼 뚝뚝 떨어졌다. 경이를 끌어안고 한 숟가락씩 죽을 입에 넣어주었다. 경이 입으로 흰죽반 눈물반이 흘러들었다.
'경아, 너도 나도 떠나자. 답답한 이 용제 들녘이 이제는 진저리가 나.'
석영이 주문처럼 읊조렸다.
'여길 떠나거든 너를 데리러 올게. 꼭 데리러 올게. 그때까지는 악착같이 살아있어야 해.'
경이의 눈꼬리에 말라붙은 눈물꽃이 석영이 떨어뜨린 눈물로 피어났다. 이러다 경이를 잃겠구나 싶었다. 그 밤에 들판을 내달려 거친 숨소리로 닫힌 약국집 문을 열었다. 약 한 봉지도 경이 이름으로 지어올 수 없었다. 3일분 약을 석영의 이름으로 지어왔다. 약국집 딸 라임이 친구였으니 가능한 일이었다. 밤새 경이 곁에서 걱정을 이불 삼고 졸았다. 앓아누운 지 닷새 만에 경이는 그제야 창고방을 걸어 나올 수 있었다.
경이는 이 세상에 태어난 흔적이 없는 아이였다. 부모가 누구이며 언제 태어났고 이름은 무엇인지 신분을 기록으로 알려주는 문서에는 없는 아이였다. 이것은 대한민국 법이 보호해 줄 수 없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법적 테두리 밖에 머물러 있는 아이,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아이였다. 경이에게 입학통지서가 나오지 않는 것은 당연했다. 출생하지 않은 아이에게 허락된 세상은 존재하지 않았다.
입암댁의 독살스런 모습에 석영은 치를 떨었다. 이중적이고 치졸한 인격자가 엄마라는 것이 견디기 힘들었다. 할 수만 있다면 엄마에게서 물려받은 피를 온몸에서 다 빼내어 세정하고 싶었다. 마음속 어딘가에 엄마를 닮은 독기가 있다면 펄펄 끓는 물을 뒤집어 써서라도 독기운을 사멸시키고 싶었다. 고등학교만 마치면 탱자나무집을 미련 없이 떠나리라 생각했는데 그때까지 버틸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그럴수록 규진에 대한 마음은 누룩처럼 부풀어갔다. 경이가 회복될 즈음 석영이 같은 질병으로 앓기 시작했다.
회복이 되지 않은 경이에게 입암댁은 새 크레파스를 갖게 해 주겠다고 설레발을 쳐서 고추밭으로 끌고 나갔다. 경이는 걷기도 벅찬 몸으로 다시 독하게 매운 일무덤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읽고 쓸 수 있는 글자가 한 자 한 자 늘어났다. 마당 풀을 뽑다가도 나뭇가지로 땅에 '경이'라고 이름을 썼다. 아궁이 불을 지피다 그을린 부지깽이로 이모, 석영을 썼다. 영란이처럼 글을 잘 쓰게 된다면 서울에 있는 석민에게 편지를 보내야겠다는 야무진 꿈도 생겼다. 새 크레파스로 그림까지 그려서 보낼 수 있게 된다면. 경이는 희망이라는 이름으로 그날을 기다렸으나 경이에게 희망은 그저 희망일 뿐이었다.
원중은 방학이 다 지나도록 집에 내려오지 않는 석민이 걱정이었다. 하숙집에 전화를 해도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는 날이 많았다. 이제 겨우 한 학기 대학생활을 보낸 아들이 뭐가 그리 바쁜지 도통 알 길이 없었다.
"다른 집 자슥들은 진즉 다 집에 내려왔는디 우리 석민이는 어쨔 집에 오덜안혀? 뭐땀시 그러는거여? 뭔 일 생겼냐?"
"별 일 없어요. 아버지. 공부 좀 하고 내려가려고 그래요. 걱정 마시고 조만간 한 번 내려갈게요."
원중에게 석민은 생각만해도 든든한 아들이었다. 석민은 형 석환과 달랐다. 뒷받침 해주는대로 열심히 공부했고 심성도 착했다. 어려운 사람을 그냥 지나치지 못했다. 싸준 도시락을 친구에게 주고 굶었다는 소리는 해마다 담임에게 늘 듣던 얘기였다. 입던 외투도 벗어주고 오는 녀석이었다. 원중은 그런 석민이 또 걱정이었다. 욕심도 부리고 사나이로서 야망을 가졌으면 좋으련만 석민의 세계는 다른 곳에 있는 것 같았다. 장남에게 느끼지 못한 듬직함을 석민에게 느꼈지만 어쩐지 늘 마음 한구석이 불안했다. 석민은 도내 수재들만 모인다는 강주 명문 사립고를 졸업하였다. 서울 신촌에 있는 대학교 신학과에 입학한다는 것을 원중이 식음을 전폐하고 드러누워 아들의 마음을 돌려놓았다. 원중의 단식투쟁으로 결국 석민은 아버지의 뜻을 받들어 서광대 정치외교학과에 장학생으로 입학했다. 그것이 올 봄 일이었다. 집에서 부리는 경이에게도 싫은 말 한마디 하지 않았다. 소풍이라도 다녀오는 날에는 경이에게 과자 한 봉지라도 꼭 사다 주었다. 원중은 그런 석민이 대견하고 든든했다. 자신의 뜻을 꺾고 아버지의 뜻을 받드는 석민의 효도가 한없이 기특해서 마음 속으로 노른자 전답을 석민에게 물려주어야 겠다고 결심을 굳혀갔다. 석민이라면 공부에 대한 여한을 원없이 풀어줄 수 있고 국회의 금배지도 달만 하다고 기대했다.
1980년 3월 개강과 함께 학생들은 '어용 교수 퇴진'을 외쳤다. 이른바 '학원(學園) 민주화 투쟁'이 시작되었다. 4월 9일에 성균관 대학교에서 '병영집체훈련 거부 사건'이 일어났다. 유신정권 시기부터 당시 대학교 1학년 학생들은 의무적으로 군대에 들어가 열흘간 군사 훈련을 받아야 했다. 학생들은 이 불합리한 훈련에 반발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병영집체훈련의 폐지를 요구하는 농성과 시위가 다음 입소 차례였던 서울대와 서강대 등 여러 대학으로 확산되었다.
1980년 5월 15일 오후 1시경 남대문에서 학생시위대가 버스를 탈취하고 전투경찰을 향해 돌진, 압사당하는 사고가 발생해 수명이 부상하고 1명의 경찰이 사망했다. 이에 신군부는 5월 17일 24시를 기해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면서 5월 20일 예정된 임시국회를 무산하고 국보위를 설치해 군부 주도로 정국을 이끌어나갔다. 군부는 5월 17일 단행된 조치에 항거한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을 무력으로 탄압했고, 이로써 서울의 봄은 막을 내렸다. 8월 18일 서울 서대문 사거리 고가도로 주변에서도 학생 시위가 있었고 경찰은 최루탄을 사용하여 강경 진압을 했다.
학생 시위대에 석민이 포함되어 있었다. 석민은 여름이 다 지나도록 탱자나무집에 내려오지 않았다.
변하는 계절따라 논의 벼이삭이 제법 굵어졌다. 때이른 잠자리들이 손에 닿기만 해도 녹아질것 같은 명주 날개를 파닥이며 들판을 수놓았다. 피사리(농작물에 섞여 자란 피를 뽑아 내는 일. 피발작업)를 다 마치지 못한 논에 눈엣 가시처럼 벼이삭 보다 피가 더 훌쩍 자라있었다.
곧 학기가 시작 될 것이니 아들에게 가보라는 입암댁의 성화가 날마다 이어졌다. 원중은 입암댁 등쌀에 못배겼다. 입암댁이 싸 준 보따리를 들고 서울행 기차에 올랐다. 아들이 용제를 떠나 청운의 꿈을 안고 상경했을 서울역에 내렸다. 눈 뜨고 코 베가는 곳이 서울이라지만 여기도 사람 사는 곳이지 않은가. 원중은 이 도시에 흐르는 공기중에 아들 석민의 숨결도 섞여있다는 생각만으로도 서울이 고향처럼 푸근했다. 버스를 갈아타고 신촌에서 내렸다. 서광대 담장을 마주하고 항아리 옆선같이 구부러진 길을 걸었다. 석민의 탄탄대로가 닦여질 기초석이 이 학교라는 생각에 가슴이 부풀고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긴 상경길이 힘들지 않았다. 새벽부터 나선 길에 반나절이 지나도록 물 한 모금 먹지 못했지만 아들을 만날 생각에 손에 쥔 주소를 거듭 확인하며 발길을 재촉했다. 신수동 경의중앙선 건널목까지 단숨에 다달았다. 철도 건널목을 건너 오른쪽길로 접어들었다. 주인 말대로 대문앞에 과꽃이 만발한 집을 찾아냈다. 간신히 찾아간 하숙집에서 들은 이야기는 원중을 그 자리에서 주저 앉게 만들었다.
"어휴, 말도 말아요. 그 날 하숙집이 난리가 났었거등요. 그 날 생각하니 지금도 떨리네. 석민학생 방이 어디냐며 사내들이 들이닥쳐서 방을 다 뒤집어 놓고 책이랑 뭘 찾았는지 가져갔어요. 여름들어서 석민학생이 집에 잘 안들어왔거등요. 별일 없어야 할텐데 걱정이네요. 도대체 세상이 어찌 돌아가려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