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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이테 Oct 16. 2024

장마가 다가올 때

유년의 은채 이야기 - 용제살이 3

모내기를 마친 논에 물이 찰랑거리면서 새끼 개구리들이 제법 팔딱팔딱 뛰어 오른다. 생육과 성장의 푸른 계절이 왔다. 며칠이고 거침없이 장마비가 쏟아지고 나면 들판이 붉은 황토물을 토해놓는다. 새초롬한 하룻볕에 이울듯 하던 푸성귀가 다시 발딱 일어난다. 


 마을 어귀 느티나무 밑 정자에 삼삼오오 사내들이 모여들었다. 날씨가 더워지면서 새벽 일찍 들일을 시작해 점심밥을 먹고는 잠깐씩 정자에 모여 장기판을 벌이곤 했다. 그러다가 한 두 사내가 하품을 시작하면 가장자리로 슬그머니 흙 묻은 발을 아무렇지도 않게 뻗는다. 목에 걸쳤던 수건은 둘둘 말린 베개가 되었다. 내 집 대청마루에 눕듯 얼굴에 밀짚모자를 덮고 손깍지 팔베게로 오수에 빠져든다.


한 무리의 아이들이 왁자지껄 뿌연 흙먼지를 일으키면서 동네 초입으로 들어섰다. 멀리서부터 시끌벅적하다. 아이들 목소리가 잠자는 사내들의 낮잠 속으로 거름망도 없이 섞여들어간다. 아비들의 귀는 추출기능이 탁월했다. 잠결에도 용케 내 핏줄 목소리만 골라듣고 벌떡 일어났다.


"아이구 내 새끼 학교 댕겨왔댜? 더워서 찌 걸어왔으까. 덥지?"


베개삼은 수건을 집어든다. 축구공을 발로 차며 걸어 오느라 땀이 목까지 줄줄 흐른 아들의 얼굴을 두꺼비 손으로 닦아준다. 몸집보다 가방이 더 큰 딸의 양 볼을 가볍게 잡아 흔들고 엉덩이를 토닥여 준다. 보기만 해도 배부른 것이 자식이다.


"초명아, 마루 다듬잇돌 옆에 성냥통 뒀니라. 거그 동전 몇 개 있응게 그걸로 하드 사먹어라."

"단풍이 얼릉 가서 숙제 허고 놀아. 낼 장에 가서 아부지가 우리 딸 샌달하나 사줄랑게."

"명환이는 만화책만 읽지 말고 냇가 은디는 절대 들어가믄 안돼야 ."


느티나무 밑에서 사내들은 그렇게 투박하고 깊은 애비의 정을 드러냈다.




경이는 무논에서 우렁이를 잡다가 느티나무 밑 요란한 소리에 허리를 폈다. 학교 파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아이들을 바라보니 속절없는 줄 알면서도 마냥 부러웠다. 취학통지서가  나오지 않아 올해도 학교에 가지 못했다. 벌써 또래들은 3학년이 되었으니 내년에 입학한다 해도 세 살 아래 동생들과 함께 다녀야 한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내년에는 꼭 학교에 가고 싶었다.


감꽃이 필 무렵부터 영란이는 감나무 밑 그늘에서 숙제를 하고 책을 소리내어 읽고 공깃돌로 셈을 했다. 생일 선물로 받았다는 48색 왕자 크레파스를 빠뜨리지 않고 챙겼다. 크레파스를 아끼지도 않고 척척 그림을 그렸다. 선택한 색깔대로 하얀 도화지 위에 만들어지는 세상은 얼마나 근사할까. 도화지 앞에 앉아 마음으로 밑그림을 그리고  손으로 만드그림이라니 이보다 두근거리는 일이 또 있을까. 경이는 그런 영란이가 언젠가 방송에서 봤던, 파나마 선수를 물리치고 KO승 챔피언이 된 홍수환 선수보다 더 대단해 보였다. 영란이는 이제 감꽃 목걸이, 토끼풀꽃 반지 만드는 놀이 같은 것은 시시해서 하지 않는다.


사실 석진의 방에도 도화지와 크레파스는 있다. 그러나 그림의 떡이다. 청소할때 서랍 속 그것들을 바라보는 것과 내것인양 휘휘 맘껏 그림을 그리는 것은 다르다. 몰래 꺼내봤다가 침을 꾸울꺽 삼키고 서랍을 닫았다.  손을 댔다가 발각되면 나머지 일조차 덤터기를 쓸 것은 불보듯 훤한 일이었다. 입암댁은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었다. 그걸 구실로 케케묵은 일들을 장터 다녀온 보자기 속 물건 꺼내듯 죄다 까발릴 것이다. 날아오는 욕지거리와 매질은 분이 풀려야 끝이 날게 뻔했다. 경이는 생각만으로 흠칫 놀라 고개를 절래절래 저었다. 크레파스와 도화지 뿐 아니다. 입암댁은 석영이 쓰다 만 학용품을 경이에게 주려는 것마다 차단시켰다. 단지 주는 것을 싫어하는 것이 아닌듯 했다. 유독 학교에 관련된 물건이라 생각되는 것마다 그리했다. 학교 입학에 대한 꿈조차도 물리적 형태로 존재했다면 빼앗고 말 기세였다.


또래들이 모두 학교에 다니는 동안 경이는 크레파스와 색종이 대신 호미와 낫을 쥐었다. 논밭으로 나가 벌레에 물리고 땀띠꽃을 피웠다. 위와 일에 지쳐 밥을 굶고 쓰러져 자는 날도 부지기수였다. 그럴수록 학교 갈증은 커졌다. 영란이가 작년에 감나무 밑에서 큰 소리로 읽던 '의 좋은 형제' 이야기가 아직 경이의 마음에 고스란히 남아있다. 책을 읽지 않아도 시켜만 주면 줄줄 이야기를 읊어댈 정도이다. 그 이야기가 오늘도 메아리 울림으로 커져간다. 그럴때 마다 욕먹을 작정으로 간신히 꺼낸 학교 이야기에 입암댁은 이렇게 말했다.


"암만 기다려도 통지서는 안 나올것인디. 일찌감치 포기허고 일이나 잘 배우고 참허게 지다려. 그라믄 시집 갈때 모른척은 안할텐게."


경이의 학통지서가 안 나오는 이유를 입암댁은 알고 있었으나 이유를 물어보면 이렇게 말했다.


"너 같은 멍충이를 핵교에서 누가 받아준다고 그려. 팔자를 잘 못 타고나서 부모가 없응게 종이가 안나오는 모냥이구만."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입암댁의 말은 틀렸다. 물머리집 옥선이는 할머니, 동생과 세 식구가 사는데도 입학통지서가 나와 학교를 다니고 있었다. 도대체 무슨 영문인지 알 수 없었다.

경이는 입암댁의 그 말이 싫었다. 팔자라는 게 뭔지 모르지만 팔자를 잘못 탔다면 이제라도 안 타면 그만 아닌가 생각했다. 매질을 당한 날 대나무 뿌리가 춤춘 곳마다 퍼렇게 멍든 곳을 만지며 훌쩍이다보면 마음을 붙잡아 둘 곳이 없었다. 그럴 땐 석영조차도 미웠다. 끝방 이모의 얼굴도 점차 희미해져 간다.


종아리가 따끔했다. 정신을 차리고 종아리를 보니 거머리가 달라붙어 있었다. 떼어낸 자리가 부풀어오르고 피가 났다. 우렁이를 잡다가 가려워서 자꾸 그리로 손이 갔다. 찌그러진 양동이속 우렁이가 기어 올라 밖으로 나오기 직전이었다. 경이는 답답한 마음에 양동이를 힘껏 발로 차버렸다. 기어오르던 우렁이가 껍데기 속으로 쏙 들어가버렸다. 양동이를 들고 무논에서 나왔다.


감자밭에도 가야하고 할 일이 많다. 감나무 그늘 아래서 숙제를 하는 영란이와 미진이는 이제 경이와 잘 놀아주지 않는다. 경이는 결코 들어갈 수 없는 견고한 담장이 그들 사이에 쌓아올려지고 있었다. 집에 가는 길은 감나무를 지나쳐야 빠른데 마주치기 싫었다. 숙제하는 그들에게 뻘흙이 덕지덕지 묻은 다리를 보여주기 싫었다. 멀더라도 논두렁쪽으로 방향을 돌렸다. 오후 햇살이 목덜미를 찌르듯 파고들었다.

가슴이 답답하고 뼛속까지 갈증이 났다. 어서 우물가로 달려가 시원한 물을 마시고 싶었다. 서두르니 논두렁을 걷는 발이 더 미끌미끌 휘청거린다.  오늘따라 유독 손톱밑 새까만 흙 낀 손이 밉게 보였다.


삼철이네 개 백구가 낳은 새끼를 한 마리 데려왔는데 밤새 마루밑에서 끙끙거렸다. 신작로에서 죽었던 흰둥이처럼 온 몸이 하얀털을 하고 코가 자반콩처럼 반질반질 새까만 강아지였다. 밤새 몸살하는 하룻강아지가 불쌍해서 둘째 날엔 창고방으로 데리고 들어왔다. 오줌을 찍하고 지렸다. 강아지는 여전히 끙끙거렸다.  몸을 바들바들 떨면서 꼬리를 다리 사이로 감추었다.  강아지를 쓰다듬어 주었다. 어미개와 뚝 떨어져서 지내는 밤이 얼마나 무서울까. 처음 탱자나무집에 왔던 그 날 마당에 선 채로 오줌을 쌌던 그 기억이 떠올라 서글퍼졌다. 그러나 처량한 강아지는 경이의 피곤을 이길 수 없었다. 땡볕아래 일하느라 지친데다 매질을 당한 서러운 몸은 강아지 울음소리보다 잠이 더 중요했다. 강아지를 곁에 두고 어느새 잠 속으로 빠져 들었었다. 그 날부터 경이는 매질을 당하면 몰래 강아지를 안고 한없이 울곤했다. 강아지는 언제든 경이를 반겨주었다.




장마를 앞두고 보리수확이 한창이라 경이는 눈코뜰새 없이 바빴다. 입암댁을 도와서 새참, 점심 준비를 해야하고 오후에는 감자밭에도 나가서 캐 놓은 감자를 한곳에 모아놓아야 한다. 석환이 먹을 점심밥을 챙겨줘야 하는데 어제 밤 늦게까지 술을 잔뜩 마셨는지 해가 중천에 떴어도 일어날 생각을 안하고 있다.

석환이 일어나기를 기다리면서 경이는 뒷마당으로 가서 앵두를 땄다. 석영이 앵두를 좋아했다. 앵두같이 빨갛고 작은 입술을 가진 석영은 모란꽃처럼 화사했다.


석환, 석민 아들만 둘이던 원중에게 딸 키우는 기쁨을 안겨 준 자식이 석영이었다. 석영은 어질고 순했다. 말썽 부리는 일도 학교에 불려갈 일도 만들지 않았다. 손끝도 야무져서 만두나 송편을 얼굴만큼 곱게 빚어냈다. 다른 집이야 딸을 살림밑천이라 하지만 원중에게 석영은 행여 시들까봐 겁나는 꽃이었다. 주변에 적당한 가시를 품어주기 바랐지만 석영은 누구에게나 친절하고 너그러웠다. 원중은 석영이 가정대를 졸업하고 조신하게 읍내 중학교 교사로 일하다 좋은 신랑감 만나서 결혼하기를 바랐다. 딱 한 가지 매사에 큰 욕심이 없어 그게 늘 원중의 성에 차지 않았다.

석영은 공부에도 욕심을 내지 않고 상업고등학교를 진학했다. 서울사는 사촌에 의하면 여의도에 증권가 시대가 곧 개막된다고 했다. 졸업 하자마자 석영을 서울로 올려보내도 좋겠다는 생각으로 원중은 상업학교 진학을 반대하지 않았다. 직장생활 하다보면 뒤늦게라도 공부하고 싶은 마음이 들 수도 있겠다 싶었다.

엇나가는 석환을 보면 억지로 해서도 안 될 일이라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생각해보면 석환이 엇나가기 시작한 것은 용제고등학교에 마음을 둔 석환의 생각을 꺽은 때부터였다. 판검사 만들어보겠다고 강주 신흥고등학교에 보낸 것이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되어버렸다.


요즘 석영은 무슨 좋은 일이 있는지 싱글벙글이다. 시계 보는 법을 배우느라 경이가 저녁마다 석영의 방으로 건너가는데 그 때마다 편지를 쓰는 석영의 얼굴이 발그레하다. 앉은뱅이 책상 아래는 구겨진 편지지가 털실뭉치마냥 여러 개 떨어져 있다. 한글을 모르는 경이는 거기에 무슨 말이 쓰여 있는지 누구에게 쓴 것인지 도대체 알 수가 없다. 시계 공부가 끝나자마자 앉은뱅이 책상 앞에서 한참씩 앉아 또 편지를 쓴다. 경이가 초저녁 잠이 든 날 자다 깨어 물 먹으러 가려고 마당을 지나다보면 그때까지 불이 환하게 켜져 있기도 했다.

궁금해서 물어보면 선보는 자리에 나간 아가씨처럼 수줍어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쬐그만게 뭘 안다고 물어. 호호. 넌 몰라도 돼."


수밀도처럼  달콤한 향기를 풍기는 석영이 집 안의 눅진하고 탁한 공기를 청정하게 만드는 것은 다행이었다. 석영과 달리 석환때문에 골머리를 앓는 입암댁 내외에게 딸의 존재는 마음에 바르는 옥도정기였다.




2년 전 오토바이 사고로 오랜 병원생활을 마쳤던 석환이 퇴원하고 며칠을 두문불출 하다가 택시를 잡아 타고 읍내로 나갔었다. 술에 취해서 거리에 오가는 사람마다 시비가 붙어 결국 용제지서에 끌려갔다. 큰 돈을 들여 간신히 합의를 하고 일을 마무리했다. 그 길로 서울에 가서 자리잡겠다고  날마다 논 팔아달라고 원중을 괴롭게 했다. 그런 석환의 마음을 붙잡아 두려고 용제역 앞에 울며 겨자먹기로 다방을 내줬다. 결국 면서기 꿈은 날아갔고 석환이 입버릇처럼 말했던 다방 주인이 되었다. 다방 안쪽 내실에 종일 틀어박혀서 술을 마시거나 만화책을 빌려다 보거나 다방 미스정을 불러들여 베개삼고 종일 누워있기도 했다.


간신히 마늘 수확을 마치자마자 장마가 시작되었다. 사내들은 삽을 들고 논으로 나가 논배미 물꼬를 텄다 막았다 하느라 옆 논주인과 가끔 큰소리도 났다. 비가 그칠 줄을 모르고 내리니 석환의 읍내 외출길이 번거로워졌다. 날마다 역전 꽃다방에 나가 시답잖은 농을 건네며 소일하거나 하꼬방집에서 대낮부터 술에 절어 사는게 석환의 일과였다.


그런 석환이 어쩐지 며칠째 읍내 발걸음을 하지 않았다. 장마에 신작로에 휩쓸린 붉은 토사처럼 갈곳을 잃은 눈동자였다. 신경질을 경이에게 다 부렸다. 막걸리 주전자와 담배갑을 빗속에 들고 다니는 건 당연했고 식재료도 없는 안주를 만들어내라, 아픈 다리를 주물러라, 급기야 술에 떡이되어 방 안에서 볼 일을 보는 망나니 짓을 서슴지 않았다. 그런 석환의 짓거리를 보면 울화통이 터져 입암댁은 불같은 화를 애먼 경이에게 퍼부어 댔다. 경이는 이래저래 뒤치닥거리를 해내느라 혼이 나갈 지경이었지만 가장 견디기 힘든 것은 입암댁의 구실이 분명치 않은 손찌검이었다. 그 때마다 경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혼잣말을 웅얼거리는 것 뿐이었다.


"이런 망할 할망구, 망할 할망구, 호랑이나 물어갈 망할 할망구."


경이는 장마가 싫었다. 땡볕도 싫었지만 비는 더 싫었다. 석환이 지랄발광을 하는 이유가 장마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어서 읍내 다방으로 나가기를 바랐다. 그런 석환이 하루는 종일 먹지도 않고 경이를 부르지도 않았다. 이런적이 없었는데 어디 아픈가 했지만 귀찮게 안하니 좋았다.


"오메, 치매걸려 똥칠하던 용덕이 할머니 있잖여? 아, 글씨 돌아가시기 메칠 전부텀 정신이 돌아왔는지 메느리 손을 잡고 자꾸 자네 고생많았네 해쌌더만 며칠 못 버티고 가셔부렀다드만."

경이는 벚꽃이 분분하던 그 때 꽃상여 뒤를 따르던 동네 사람들의 말이 떠올랐다.

'사람이 죽을 때가 되면 변한다더니 설마 큰 삼촌도? '

 한 밤중에 흐느끼는 소리가 온 집 안에 울렸다.


"에잇, .. 용수도 영문이도 다 사지육신 말짱해서 휴학하고 군대간다고들 난리고 에잇, 씨..승철이 새끼도 ROTC한다고 정복입고 내려왔더만 으휴...나만 이렇게...기가 막히네. 에혀, 저 새끼들 부러워할 줄 누가 알았냐고..흑흑."




닷새를 내리 장마비가 퍼붓더니 해가 반짝 났다. 대문간에 봉숭아꽃이 맑은 물기를 머금고 봉오리를 수줍게 터뜨렸다. 경이는 어석술로 감자 껍질을 박박 긁어서 밥물 위에 올려놓고 드럼통 간이 아궁이에 불을 지폈다.  삭정이가 타는 동안 봉숭아꽃을 땄다. 저녁에 석영과 함께 봉숭아꽃물을 들이기로 했다.

석영은 봉숭아물을 들이는 일에도 온갖 정성을 다 했다. 꽃잎을 깨끗이 털어내고 누름돌 위에 올려놓고 몽돌로 콩콩콩 찧었다. 씻어 놓았던 과자 봉지를 네모 반듯하게 자르고 깨끗한 무명실을 잘라 가닥가닥 늘어놓았다. 시집가는 처녀가 혼수 준비하듯 했다. 경이의 손톱에 찧어놓은 봉숭아를 올려주었다.


"경아, 너 봉숭아 물이 첫 눈 내릴때까지 남아있으면 사랑이 이루어진다는 말 알아?"


뭐가 우스운지 경이 듣기에는 전혀 그렇지 않은데 석영은 몸을 움찔거리며 웃어댔다. 싱글싱글 웃음이 터진 석영의 입술이 다물어지질 않았다. 저녁에 피는 분꽃마냥 화사했다.


느티나무에 매미소리가 요란해졌다. 학교마다 방학에 들어갔다. 타지에서 학교에 다니던 학생들도 모두 고향집으로 돌아왔다. 한낮의 뜨거운 지열에 넙적한 호박잎도 축축 쳐졌다. 경이는 날마다 고구마줄기를 벗기느라 손가락 끝이 소금에 절어 쭈글쭈글했다. 얼마나 더운지 작두샘의 물을 퍼올려 대야에 부어놓아도 금세 뜻뜻하게 달구어졌다. 대나무 소쿠리에 벗긴 고구마 줄기를 씻어놓고 부추를 다듬고 있는데 동네 이장의 방송 소리가 들렸다.


"아, 아, 흠흠. 장화리 새터마을 주민들께 잠시 안내말씀 드리겄습니다. 이장 소일군입니다. 내일 우리 마을에 서울에서 농촌봉사활동을 온다고 헙니다. 작년에 왔던 연서대 학생들이 이번에도 온다허니 일손이 필요허신 댁은 저, 이장에게 말씀혀주시면 감사허겄습니다."


연서대학생들이 봉사활동을 온다는 말에 입암댁은 방학이 되어도 내려오지 않는 둘째아들 석민이 생각났다.


"시상 공부라는 공부는 우리 석민이 혼자 다 허는가벼. 다른 학상들은 다 방학혔다고 집에 내려오는디 내 새끼는 워찌 지금꺼정 내려오덜 안허는가 모르겄네."


그 날 석영은 약국집 라임이강주시내 충경로까지 나가서 기타악보집과 옷, 신발을 한가득 사가지고 왔다. 장식품처럼 세워 두었던 기타를 팅팅팅 튕겨대는 얼굴은 구름에 둥둥 떠있는 사람같았다. 꼭 지난 가을에 음악다방 DJ 준을 따라 야반도주한 혜선이 떠나기 며칠 전부터 보였던 얼굴과 같은 표정이었다. 석영은 거울 앞을 떠나지 않고 머리를 이리저리 만져보고 새 옷을 입었다 벗었다 야단이었다. 가만히 앉아 있어도 등줄기에 땀이 줄줄 흐르는데 더운 기색도 없이 날갯짓하는 공작새가 다름 없었다.


석영은 경이에게도 리본장식 머리띠를 사다주었다. 머리 길이가 짧으니 딱히 필요하지는 않을테지만 이쁜 것을 갖고 싶어하는 소녀의 마음은 똑같을 거란 생각이었다. 입암댁은 식구들에게 머릿니가 옮을까봐 경이 머리를 사내아이처럼 상고머리로 깎아 주곤 했었다. 경이도 리본 머리띠를 두르고 석영에게 얻은 손거울로 이리저리 비춰보았다. 거울속에는 까맣게 그을린 얼굴에 버짐이 해뜩해뜩한 계집 아이가 생뚱맞게 화사한 머리띠를 두르고 있었다. 마당의 모깃불이 매캐하게 번지는 여름 밤이었다.




마을 어귀가 시끌벅적했다. 서울에서 내려온 대학생들이 마을회관에 짐을 부려놓고 정자에 모였다. 밥을 낼 만한 집에서 서울 학생들에게 먹일 점심을 십시일반으로 준비했다. 돈 자랑은 입술이 부르트도록 하던 탱자나무집 내외가 이런 일에는 이 동네에 갓 이사 온 사람처럼 조용했다.

그러나 탱자나무집 단 한 사람, 석영은 오늘을 기다리고 기다렸다. 충경로에서 사 온 흰 블라우스와 폭이 넓게 퍼지는 긴 치마를 입었다. 삼복 더위에 목에 스카프 까지 묶고 새 구두를 꺼냈다. 로마의 휴일에 나오는 오드리 헵번 같이 예뻤다. 약국집 라임이까지 달고 경이를 앞세워 수줍게 정자로 나갔다.  


열댓 명 남짓한 대학생 무리 중에는 여학생이 넷이고 나머지는 남학생 이었다. 이장이 얼음집에서 사온 얼음덩이를 조각 내어 콩물에 담방담방 넣었다. 온 동네가 시끌시끌 잔치집 같았다. 석영도 거기에 끼어 콩국수 대접을 쟁반에 날랐다. 실웃음이 얼굴에 새겨진 듯 끊이지 않았다. 멀리서 봐도 그들 중에 석영이 어디에 있는지 금세 눈에 띌만큼 고왔다. 사뿐사뿐 날아오를 왕오색나비같은 걸음이 바지런했다.


석영이 걸음을 옮기는대로 시선이 따라가는 청년이 있었다. 그의 시선을 내치지 않고 주는대로 함박웃음으로 받아내는 석영의 얼굴이 수밀도 같았다. 둘 사이가 꽃 본 나비 물 본 기러기다. 언젠가 석영의 책상에 편지지와 함께 놓여있던 사진 속 얼굴이 거기 있었다. 경이는 사진 속 얼굴이 그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남원부사 이몽룡과 백년가약을 맺은 춘향의 나이가 열 여섯이었던가. 그 나이를 지나면서 괭하던 속내를  감추고 가슴앓이를 하는 소녀가 그 곳에 있었다. 오뉴월 설익은 계절의 후텁지근한 바람이 용제들판에도 불어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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