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년의 은채 이야기 - 용제살이 5
"나의 소중한 동생 석영아,
작은오빠다. 그동안 온 식구가 얼마나 걱정을 많이 했을지 미안한 마음뿐이다.
오빠는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그때마다 피할 길이 생겨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단다. 집에 한 동안 신분을 밝히지 않은 전화가 왔을 거다. 이 일은 걱정 안 해도 된단다. 오빠가 집안 식구들 안부가 궁금해 부탁해서 한 전화였다. 그렇게라도 식구들 안부를 듣고 싶었다. 매사에 전화도 편지도 조심스러운 상황이라 어쩔 수 없었다. 행여 여파가 장화리까지 미칠까 봐 마음 놓고 연락을 할 수 없었지.
8월에 있었던 서대문 네거리 시위에서 많은 학생들이 경찰에 붙잡혀 갔어. 오빠도 그 자리에 있다가 경찰에 쫓기던 중 백련산으로 숨어들었어. 거기서 간신히 실신 직전까지 숨어 지냈지. 계절이 늦여름이었으니 가능했던 일이었어. 비렁뱅이나 다름없는 행색에 쓰러져 있던 나를 산으로 기도하러 오신 최목사님께서 발견하시고 도움을 주셨단다.
사실, 서대문 시위 현장에 나가게 된 건 순전히 내 뜻이 아니었어. 결핵으로 몸이 아픈 친구가 시위하러 나가는 것을 만류하다 그 자리에 있게 된 것이고 엉겁결에 경찰에 쫓기게 되었지. 경찰에 끌려가 고문을 당하던 친구들에게서 내 이름을 들었을 것이고 경찰들이 나에 대해 샅샅이 조사했겠지. 그리고 하숙집을 급습했지만 다행히 오빠 방에서는 위험한 서적이나 물건이 발견되지 않은 모양이야.
그런데 지금 시국이 죄 없는 사람들도 여차하면 다 끌고 가는 험악한 상황이란다. 신군부가 계엄포고령을 내리고 삼청교육대라고 해서 군대식 정치범 수용소를 설치했어. 이 조치로 연행된 사람들은 깡패, 조직폭력배 외에도 무고한 일반인, 학생들까지 포함되어 있어. 들리는 말에 의하면 민심을 얻으려는 정권 차원의 조치였다 거나 인원수를 맞추려고 억울하게 잡혀간 사람들이 있다는 등의 말이 많아.
이런 세세한 이야기까지 하게 되었구나. 너는 이런 내용은 알 필요 없는데 말이야.
어쨌건 죄가 없어도 조심해야 하는 상황인데 더구나 시위 현장에 있었으니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죄가 될 수 있는 문제였지. 그래서 집에도 하숙집에도 연락을 할 수 없었어. 오빠로 인해 집안 식구들에게 위험한 상황이 생길까 봐 많이 두려웠어.
최목사님께서 사람을 보내 하숙집 골목을 배회하며 동정을 살피셨는데 아마도 하숙집에서는 경찰로 오인하셨을 수도 있었을 거다.
최목사님 도움으로 몸을 치료하던 중에 친구에게 결핵이 전염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 8월 28일에 전국 대학 휴교령이 해제되어 학교로 돌아가야 하는데 결핵증세가 점차 심해져서 복귀할 수 없었어. 꽤 심각한 상태까지 진행되었지만 치료 속도는 더뎠어. 다행히 두 달을 넘기고 나니 어느 정도 몸이 회복되기 시작했어.
오빠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정치외교학과에 진학했지만 정치에는 뜻이 없는 사람이야.
이 문제는 나중에 아버지와 따로 의논하려고 해.
지금 나는 강주로 내려왔어. 최목사님 소개로 강주 외곽에 있는 작은 교회에서 지내고 있어. 지금까지 집에 아무런 일이 없었다면 이제는 안심해도 되겠다는 생각이 든다. 올 해 안으로 이곳을 정리하고 집으로 돌아가려고 해.
이 편지를 읽거든 네가 아버지께 내용을 잘 읽어드려 주기를 부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