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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이테 Nov 06. 2024

나뭇잎 잎맥같은 실금

유년의 은채 이야기 - 용제살이 6

석민이 돌아온다는 소식은 탱자나무집에 뿌리내리던 근심을 순식간에 거둬들였다. 그 동안 석민의 모습이 보이지 않으니 동네 사람들 사이에서도 소문이 무성했다. 대처(大處)에 나갔던 자식들도 명절이 되면 7시간씩 입석을 타고라도 고향에 돌아오는데 그렇게 자랑하던 석민이 추석명절에도 돌아오지 않았으니 그럴만도 했다. 동네사람들의 의심 덩쿨은 확신의 담장을 타고 한없이 기어올랐다. 그럴때마다 입암댁은 눈에 쌍심지를 켜고 입에 담지 못할 말들로 쌈닭 달려들듯 했다.


"어느 주댕이가 그런 얼토당토 않는 소리를 씨부리고 다녀. 남의 자식일에 험하게 입 놀리는거 아녀. 우리 석민이가 시방 즈그 자식들이 못 간 대핵교를 댕긴게 강짜 부리는거여? 벌씨 1학년때부텀 방학이고 뭣이고 외무고시공부허느라 집에도 못내려온 귀한 아덜헌티 씨도 안멕히는 소리들을 혀쌌는디 나중에 즈그 말헌대로가 아니믄 내가 가만히 안 둘텐게 그런 줄 알어."


부지불식간에 삼청교육대로 끌려갔다는 억측이 터무니 없지 않은 어수선한 시절이었다.

입암댁에게 석민은 산삼보다 더 명약이었다. 그 동안 석환의 일로 골머리를 앓을 때마다 책상에 밤 늦도록 불을 켜고 공부하는 석민의 굽은 등을 보면 된서리 같은 근심이 햇살에 방울방울 녹듯 했다. 입암댁이 석 달 열흘을 굶어도 배고프지 않을 알토란 같은 아들이었다. 석민이 돌아오자 앓던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동네방네 돌아다니며 위세등등하게 큰 소리를 쳤다.

"입때껏 주둥이 잘 못 놀린 인간들 다 나와보라혀. 내 새끼가 이러코롬 멀쩡허게 돌아왔는디 이제 워쩔거여. 남의 자식 일에 험한 말로 그러는거 아녀. 뉘집 자식이 우리석민이를 앞서가겄어. 입 있으면 말들 좀 혀봐."


6개월만에 돌아온 석민은 지난 봄에 봤던 모습보다 몸은 수척해졌으나 눈빛만은 예사롭지 않았다. 섬광처럼 번뜩이는 눈빛은 사냥감과 대치하는 킬리만자로의 표범과 같았다. 그러나 목소리는 잔잔한 강물처럼 고요하고도 울림이 있었다. 석민이 집에 머무는 동안 입암댁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잦아들고 석영의 근심가득한 얼굴도 점차 옅어졌다. 경이는 이런 생경함이 좋았다. 야학 선생 만세가 서울에 올라간 후로 보내주었던 48색 크레파스를 처음 쥐어봤을 때의 가볍고 서늘한 감촉 뒤로 이어지던 내 것이 주는 느긋한 마음이 그때처럼 일었다. 아까워서 꺼내쓰지 못하고 뚜껑만 열었다 닫았다 하면서도 든든했던 마음이 석민을 바라볼 때 되살아났다. 용제의 온 들판이 꽁꽁 얼어붙었어도 석민이 머무는 탱자나무집은 봄의 향연이 무르익는 날들이었다.


경이에게 석민은 꿈결같은 세상을 바라보는 창문이었다. 경이가 누군가의 시야 안에 머무는 일은 주로 좋지 못한 일이 대부분이었다. 까닭이 있든 없든 입암댁이 길길이 날 뛸 때 그의 시야 안에 머물렀다. 표적이 되어 독안에 든 쥐처럼 쏟아지는 비난과 매질을 이리저리 피해다니거나 장독대의 뚜껑없는 항아리처럼 쏟아지는 폭언의 소나기를 고스란히 받아내야 했다. 그렇게 누군가의 관심을 받는 다는 것은 고되고 서글픈 일이라는 것을 일찌기 깨달았다. 아랫목에 깔아놓은 담요같은 포근함이 이따금 입암댁 모르게 석영에게서 흘러나와 꽁꽁 언 마음을 녹여줄 때도 있었지만 그런 관심은 흐린 밤하늘의 달무리처럼 아득하기만 했다.

 

석민은 경이에게 주고 간 까만표지의 책을 얼마나 읽어봤는지 물었다. 흙벽에서 바람은 새어들고 햇빛 한 줌마저도 순식간에 넘어가는 경이 방에 풍경화 속 정물처럼 놓여있는 그 책에 아무도 관심이 없었다. 실체는 있으나 만져볼 수 없는 세상이 책 속에서 흐트러짐 없이 배열된 채 도도했지만 글자를 읽지 못하는 경이에게 책은 고장난 트랜지스터 라디오에 불과했다.

석민은 당장 경이 한글학습부터 점검했다. 책을 읽기에는 터무니 없었다. 게다가 쓰는 것은 더 심각한 수준이었다.  야학 선생 만세에게 배웠던 글자들마저도 가물가물 잊어버리고 말았다. 아궁이 불을 지피며 잊지 않으려고 그을린 부지깽이로 바닥에 끊임없이 썼던 글자들만 간신히 붙들었다. 경이, 석영, 꿈, 책, 서울, 용제를 포함해 스 무 글자도 채 안되었다.

석민의 이런 친절은 삶의 언덕 너머 어딘가에 가보지 못한 꿈결같은 세상이 있다고 경이에게 알려주는 듯 했다. 석민은 꿈결세상의 나들목같은 존재였다. 매일 저녁 석민은 경이의 한글학습을 이어갔다. 학습이 끝나면 클리프 리처드 사진 아래 세워둔 기타를 연주하며 노래를 알려주었다.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들에는 반짝이는 금 모래밫 뒷문 밖에는 갈잎의 노래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이 노래를 부를때면 어쩐지 얼굴도 모르는 엄마가 그리워져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입암댁에게 매질을 당할 때 울고 버티면 더 심한 매질이 오듯 울면 다시 노래를 가르쳐 주지 않을 것 같은 두려움에 눈물을 꾹꾹 참았다. 그러느라 목이 아파 고운 소리를 내지 못하는게 아쉬울 뿐이었다. 그 마음을 아는지 석민은 경이를 칭찬했다.

"우리 경이 목소리가 꾀꼬리처럼 곱다. 나중에 전국노래자랑 대회 나가면 좋겠는데. 하하"

마크 트웨인이 사소한 칭찬으로 위대한 업적을 이루게 되었듯 이 때의 사소한 칭찬은 경이가 쓰디쓴 인생의 고비마다 한을 풀어내는 도구로 노래를 선택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경이는 석영과 석민이 주는 사랑의 씨줄과 날줄로 견고한 고치를 만들고 싶었다. 일에 지치고 입암댁의 냉대에 아플 때 비밀스런 고치 속에 들어가 있으면 상처가 꾸덕꾸덕 아물것 같았다. 그러나 좋은 것, 내 것이 아닌 것은 결국 내 손에서 떠날 것이라는 것을 경이는 잘 알고 있었다.




아들이 집에 돌아왔다는 안도감과 반가움은 며칠 지나는 동안 탱자나무집을 휘젓는 돌풍이 되어 입암댁의 심기를 건드렸는데 경이의 한글학습이 그 중심에 있었다. 석민이 입암댁과 원중을 마주하고 안방에 앉았다.


"너는 어찌 쓰잘데기 없는 짓을 혔냐. 경이 그 가시나를 뭐땀시 공부를 가르쳐? 공부안혀도 집안 일 부리는디는 아무 문제가 없어야. 내강아지가 안나서도 다 알어서 헐 것인디 그러냐."

"엄마, 지금은 여자들도 배워야 하는 세상이고 공부를 하지 않으면 살아가기 힘든 세상이에요. 예전과는 세상이 달라졌어요. 경이를 언제까지 우리 집에서 일만 부리는 아이로 묶어둘 생각이에요? 경이도 벌써 열 한 살이 코앞인데 세상 이치도 알아야 하고 앞가림도 하려면 친구들처럼 학교를 다녀야 해요. 지금도 늦었어요. 내년에는 꼭 학교 보내야 해요. "

"너는 경이가 네 동생이라도 되는 모냥이다? 경이 그것은 내가 알아서 헌당게 왜 그런 일까지 참견을 허고 그려. 네 동생은 석진이여. 네가 그리 말허믄 어매가 섭섭허지. 석진이 신경이나 써. 고등핵교 입학 허야는디 공부가 말도 못헌다."


입암댁과 석민의 상반되는 입장에 여러 번 말이 오갔다. 원중이 끼어들었다.

"석민이 말 틀린거 없어. 동네 사람들도 어린 것을 데려다가 일만 부리고 공부도 안시킨다고 뒤에서 수군거리는거 자네는 못 들었남? 우리가 장화리에서 말마디깨나 허는 집인디 체면도 있고 남들헌티 야박허다는 소리 들어서 좋을것은 없당게. 요새 젊은 사람들이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을매나 잘 아는지 우리덜은 거기다 대지도 못혀. 더구나 석민이 야가 수재아녀? 그러니깨 석민이 말대로 생각 좀 혀봐야 쓰것어. "

입암댁이 주춤한 여세를 몰아 석민이 쐐기를 박았다.

"경이 한글공부를 계속 책임지고 할 사람이 필요한데 나도 석영이도 언제까지 집에 있을 수는 없고 우리 집에는 그럴 만한 식구가 없으니 경이를 옆동네 만월리 교회로 보내게요. 제가 도움받은 최목사님 대학 후배되시는 분이 거기 교회에 계신다는데 어르신들을 위한 한글학당을 운영한대요. 그러니 경이를 일주일에 딱 두 번 한글학당에 보내줘요."

입암댁은 팔짝팔짝 뛰며 반대했지만 석환을 봐도 그렇고 결국 자식 이기는 부모가 있던가. 아들의 결심을 돌리기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다.

석민의 말은 단호하고 설득력 있었다.

"지금 우리나라 안팍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여기 시골사람들은 아무것도 모르고 있어요. 엄마 아버지도 마찬가지고요. 전라도 광주에서 어떤 일들이 벌어졌고 5공화국 내각이 어떻게 헌법을 개정하고 있는지, 이란 이라크전쟁이 전 세계에 어떤 영향을 줄지, 정부가 언론을 통폐합한 목적이 무엇인지 국민들은 알지 못해요. 이런 일들중엔 국민이 무지하고 힘이 없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들이 있어요. 그러니 어떻게든, 누구든 배워야 해요. 기를 쓰고 가르쳐야 해요. 남자 여자 어린아이, 노인, 직업에 관계없이 누구라도 배워야 해요. 그것이 개인이 살 길이고 결국 나라가 강해지는 길이에요. 지금 경이는 학교에 다녀할 나이에요. 우리나라 헌법으로 국민학교 교육을 의무로 정해놓았어요. "


흐트러짐없이 이어지는 석민의 말에 입암댁은 더 이상 강력하게 반대할 명분을 찾지 못했다.

"엄마가 경이 국민학교 입학에 반대하면 법을 어긴 것이니 어쩔 수 없이 처벌을 받을 수 밖에 없어요. 경이를 우리 집에 데려온 것은 경이에 대한 모든 책임을 엄마가 지겠다고 하는 것이나 마찬가진데... 게다가 그 동안 일을 부렸으면 거기에 합당한 댓가를 경이에게 챙겨줘야 해요."


석민의 질긴 설득으로 결국 소금기둥같던 입암댁이 한 발 물러섰다. 일주일에 두 번, 수요일과 일요일에 만월리 한글 학당에 다녀오도록 허락했다. 경이가 탱자나무집에 온 이후가장 고무적인 사건이었다. 그러나 끝내 학교에 보내겠다는 약속은 하지 않았다. 경이를 데려 올 때 정마담에게 건넨 돈이야 벌써 본전을 빼고도 남았다지만 학교에 다니게 되면 만만하게 부릴 일손을 잃는 것이니 결코 양보할 수 없었다. 경이는 만월리 한글학당에 다니면서 점차 읽을 수 있는 글자가 늘어나게 되었다. 석민이 집에 머무는 동안 석민을 따라 만월교회 한글학당에서 공부를 하는 꿈같은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석민은 다니던 학교를 휴학하고 군입대를 결정했다. 군복무를 마치고 나면 미국으로 건너가 신학을 하겠다고 마음먹었다. 세상 성공과 정치에는 관심이 없었으나 우격다짐으로 밀고가는 아버지 뜻을 거역할 수 없어 효심으로 정치외교학과에 진학했었다. 그러나 정치로 세상을 바꾸는 일에 관심이 없었고 결국 그 길은 내 길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빼앗고 억누르고 짓밟는 세계에서는 버틸 수 없는 여린 순 같은 성정이었다.


석민이 돌아오기 전까지 석영은 용제의 단조로운 삶과 입암댁의 이기적이고 위선적인 행태에 진저리가 난데다 규진에 대한 연모의 마음이 밀납처럼 굳어졌었다. 용제를 떠나 규진의 세상으로 날아가고 싶었으나 결심을하지 못하고 피기도 전에 시들어가는 작약꽃 같았다. 석영의 진로에 대해서도 석민이 적극적으로 나섰다. 석민은 먼저 석영에게 젊은이들의 낭만과 자유, 열정과 이상, 인권과 평등, 책임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닳도록 읽었던 민태원의 [청춘예찬] 을 석영에게도 권유했다.

석민은 [청춘예찬]의 일부분에 밑줄을 그어 놓았는데 그 문장들은 석민이 선택할 길의 예지몽과도 같았다.


이상! 우리의 청춘이 가장 많이 품고 있는 이상! 이것이야말로 무한한 가치를 가진 것이다. 사람은 크고 작고간에 이상이 있음으로써 용감하고 굳세게 살 수 있는 것이다. 석가는 무엇을 위하여 설산(雪山)에서 고행을 하였으며, 예수는 무엇을 위하여 광야에서 방황하였으며, 공자는 무엇을 위하여 천하를 철환(轍環)하였는가? 밥을 위하여서, 옷을 위하여서, 미인을 구하기 위하여서 그리하였는가? 아니다. 그들은 커다란 이상, 곧 만천하의 대중을 품에 안고, 그들에게 밝은 길을 찾아 주며, 그들을 행복스럽고 평화스러운 곳으로 인도하겠다는 커다란 이상을 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길지 아니한 목숨을 사는가시피 살았으며, 그들의 그림자는 천고에 사라지지 않는 것이다. 이것은 현저하게 일월과 같은 애가 되려니와, 그와 같지 못하다 할지라도 창공에 반짝이는 뭇 별과 같이, 산야에 피어나는 군영(群英)과 같이, 이상은 실로 인간의 부패를 방지하는 소금이라 할지니, 인생에 가치를 주는 원질(原質)이 되는 것이다.
발췌- 민태원 [청춘예찬]


진로를 함께 고민하며 이상과 꿈을 실현하도록 석영을 독려했다.


"앞으로 우리나라 사람들도 해외에 나갈 일이 많이 생기게 될 텐데 그렇게 되면 항공사 관련 업종에 인력이 증원될거야. 인천에 전문학교가 있는데 마침 거기 비행기 승무원 양성하는 항공운항과가 재작년에 개설되었어. 우리 석영이 천성이 누구에게나 상냥하고 친절하잖아. 얼굴도 곱고 호리호리하니 외국어공부만 신경써서 열심히 하면 어렵지는 않을거야. 석영이만 좋다고 하면 오빠가 도와줄게."


꽉 막혀 진척이 없던 석영의 진로 문제가 순풍에 돛단듯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대학 진학을 하게 된 석영이 집을 떠난다는 사실은 두 사람을 당황하게 만들었으니 입암댁과 경이였다. 입암댁은 석영의 뒷바라지에서 손을 놓게 되니 신바람이 나서 세간을 챙겼다. 반대로 경이는 석영이 집을 떠난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

석영은 시집가는 새색시가 신접살림 준비하는 것 같이 자취방 세간을 준비했다. 꿈과 이상, 정인(情人)을 찾아 떠나는 미지의 환상에 하루하루가 더디 갔다. 세간을 용달차에 싣고 인천으로 떠날 채비가 다 됐다.


용달차에 오르기 전 석영의 모습은 다시 돌아오지 않을 길을 떠나는 사람처럼 보였다. 석영에게는 단 두 사람 아버지와 경이가 눈에 밟혔다. 새 일어난 석환의 사고와 사흘이 멀다 하고 벌이는 주취사건들, 석민의 행방불명된 시간들이 원중을 나이보다 10년은 들어보이게 했다. 딸을 향한 아버지의 유별한 사랑을 받고 자란 석영은 목이 메어 제대로 인사 할 수 없었다. 이제는 탱자나무집에서 외롭게 살아갈 경이가 걱정이 되었다.

"경아, 아프지 말고 건강하게 잘 지내야 돼. 나중에 꼭 데리러 올게. "

경이는 탱자나무집에 처음 온 날의 석영이 생각나 눈물을 멈출 수 없었다. 그 동안 말로 다 할 수 없는 더부살이의 고통을 견딜 수 있었던 것은 석영의 보호와 사랑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석영은 경이에게 선물 꾸러미를 주고 떠났다. 지퍼로 여닫을 수 있는 손가방이었다. 가방 안에는 벚꽃잎처럼 연한 색깔의 속옷이 위 아래 짝을 맞추어 여러 벌 들어있었다. 당장 입기에는 지나치게 넉넉했다. 그 날 밤 경이는 석영이 떠난 빈 방에서 선물을 끌어안고 끝없이 흐느끼다 잠이 들었다.




해빙기의 밭에는 어김없이 한뼘쯤 길어진 햇살이 찾아들고 전령사 봄까치꽃이 풀인듯 꽃인듯 앙증맞게 피었다. 경이는 봄동밭을 찾아들었다. 점심 설거지를 마치고 나와서 어슬어슬한 초혼(初昏)이 지날 때까지 밭에 털썩 주저앉아 엉덩이가 젖는 줄도 모르고 봄동배추를 뜯고 뜯었다. 여염집에서 아이들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뒤이어 밥 먹으러 들어오라는 채근이 따랐다. 경이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도 들렸다. 입암댁의 앙칼진 욕지거리가 뒤이어 들려왔다.

굴뚝마다 하얀 연기가 피어오르는 풍경 뒤로 기적소리가 어슴푸레 들려왔다. 머언 용제 들녘을 굽이굽이 가로지르는 가물가물한 기차의 움직임이 눈에 들어왔다. 사르르 눈이 절로 감겼다. 눈꺼풀 안쪽으로 기차를 타고 용제역에서 내리던 날이 둥둥 떠올랐다. 행랑채 툇마루에서 잠결에 보았던 똑단발에 교복을 맵시나게 입은 석영의 뒷 모습이 스쳤다. 그 순간 한 줄기 미풍이 경이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몸을 씻기고 옷을 갈아입혀주던 다정한 석영의 손길인듯 해서 눈을 번쩍 떴다.


가슴에 나무잎 잎맥같은 실금이 그려졌다. 실금으로 얼음물이 지나갔다. 너무 시려서 입을 앙다물었다.

보글보글 밥물 잦아드는 소리가 온 몸으로 퍼져나가면서 아랫배에 똬리처럼 머물렀다. 찌르르 통증이 일었다. 통증은 아랫배에서 허리와 골반으로 퍼졌다. 제법 봉긋해진 가슴이 찌릿했다. 순간 울렁하고 뜨거운 무엇인가가 기분나쁘게 다리 사이로 터져나왔다.

열 네살 초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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