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 인근에는 산이라 부르기에도 민망한 야산이 하나 있었다. 국가 소유지로, 오래전부터 공동묘지로 쓰이던 곳이었다. 세월이 흐르며 밭 사이사이에 띄엄띄엄 자리 잡은 분묘들이 어느새 그곳을 하나의 공동묘지로 만들고 있었다.
어느 날, 분묘를 모두 이장하라는 통지가 내려왔다. 이곳에 고속철도가 지난다는 소문이 뒤따랐다. 구불구불 이어지던 옛 기찻길 대신 KTX와 SRT가 달리는 곧게 뻗은 선로가 공동묘지를 가로질러 동네 앞 들판을 지나게 되었다. 이제는 서울까지 한 시간 남짓이면 닿는 세상이 되었지만, 그 선로는 우리에게서 추억의 자리 하나를 조용히 앗아갔다.
아버지는 담장 안 텃밭 외에는 가진 밭이 없었다. 그래서 늘 밭작물이 아쉬웠다. 특히 배고픔을 달래주던 구황작물은 어린아이들의 간식을 대신했다. 동네 형편이 다들 그러하니 경작하지 않는 땅이 있으면 밭을 일구느라 야단들이었다. 우리 집도 예외는 아니었다. 멀리 떨어진 공동묘지 구역 안에는 돌아가신 할머니께서 일구어 놓으신 외진 밭이 하나 있었다.
오싹하고 서늘한 기운이 감도는 그 땅을 갈아 구황작물과 채소를 심었다. 젊은 아버지와 어머니는 시간을 쪼개 새벽부터 밤까지 그 밭을 일구셨다. 먼 길을 오가며 당신들의 몸을 그곳에 부려 놓으셨다. 그 노동을 떠올리면, 마음 한켠이 노곤하게 저려온다.
엄마는 이 외진 밭에 혼자 가는 것이 무서웠는지 늘 나를 데리고 다니셨다. 어린 내가 엄마 일에 보탬이 될 리는 없었지만, 엄마는 나를 곁에 두고 일을 하셨다. 나는 밭 주변을 서성이며 익은 산딸기를 찾거나 땅강아지가 흙을 밀어 올리는 모습을 구경했다. 그러다 가끔, 비렁뱅이 차림의 부랑자가 공동묘지 구역을 지나가는 것을 보곤 했다.
그 시절에는 그런 이들이 드물지 않았고, 엄마는 그 적막한 밭에서 홀로 일하기가 두려워 어린 나를 곁에 세워 두셨던 것이다. 조금 더 자라서는 등교 전 새벽마다 그곳에 나가 엄마의 밭일을 거들었다. 무서움을 나누던 자리에서, 나는 어느새 일을 나누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 밭에서 가족이 함께 거둔 부식거리 가운데 단연 으뜸은 고구마였다. 고구마는 겨울철을 버티게 해주던 주된 간식이었고, 한편으로는 마냥 놀고 싶은 우리의 오후를 붙잡아 두는 일이기도 했다.
온 들판이 추수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쁠 때가 고구마 수확철이었다. 부모님은 이른 새벽부터 밭에 나가 고구마를 캐 놓고 돌아오셨다. 갓 캐낸 고구마는 젖은 흙을 종일 햇볕에 말렸다.
우리가 나설 차례는 오후였다. 하교 후 숙제를 마치면 언니와 오빠가 오기를 기다렸다. 오빠가 집에 들어서자마자 책가방을 던져두고 손수레를 잡았다. 그렇게 셋이 한 조가 되어 수레를 끌고 공동묘지 쪽 밭으로 향했다. 놀고 싶은 마음을 뒤로 미루고, 우리가 해야 할 몫의 일을 나누러 가는 길이었다.
가을볕은 따갑게 내리쬐었다. 가장 어린 나는 오빠의 수레에 타고, 언니는 뒤에서 수레를 밀었다. 밭에 도착하면 고구마가 이랑을 따라 길게 늘어서 있었다. 햇볕에 말라 고슬해진 고구마들이 줄지어 놓여 있었다. 우리는 이랑에 놓인 고구마를 바구니에 담아 수레로 옮겼다. 그러다 배가 고프면 고구마에 묻은 흙을 쓱쓱 털어내고 껍질째 오독오독 깨물어 먹었다.
한참을 담다 보면 해가 뉘엿뉘엿 기울었다. 귀신이 가장 무서웠던 나이였다. 어둠이 내려앉기 시작하면 마음이 먼저 급해졌다. 귀신이 나오기 전에 어서 집으로 돌아가야 했다.
놀거나 장난을 친 것도 아닌데 이랑에는 아직 고구마가 남아 있었다. 껍질이 벗겨지지 않게 조심해야 했지만, 마음이 급해질수록 손이 거칠어졌다. 나는 고구마를 바구니에 던지듯 담았다. 오빠의 짜증도 어둠이 내려올수록 짙어졌다. 오빠처럼 빠르게 해내지 못하는 내가 모든 일을 늦추는 것만 같았다. 그날의 해 질 녘은, 어둠보다 내 마음이 더 먼저 내려앉고 있었다.
해가 꼴딱 넘어가서야 고구마 수레를 끌고 집으로 향했다. 수레바퀴가 오솔길 가장자리로 빠지지 않게 살피면서, 고구마가 쏟아지지 않도록 수레를 끄는 일은 쉽지 않았다. 오르막과 내리막을 조심조심 넘고, 공동묘지를 벗어나 큰길에 들어서면 그제야 마음이 놓였다.
어두워도 괜찮았다. 동네 길이었으니까. 가다 보면 자전거를 타고 퇴근하는 아버지를 마주치기도 했다. 엄마의 귀가는 늘 더 늦었다. 언니는 밥을 하고, 나는 청소를 하고, 오빠는 미처 끝내지 못한 숙제를 했다. 막내는 초저녁잠에 들었다. 하루의 끝은 각자의 몫을 나누며 조용히 닫히곤 했다.
비만 오지 않기를 바라며 며칠에 걸쳐 고구마를 집으로 날랐다. 고구마는 창고에 두었다가 얼음이 얼기 전 방으로 옮겼다. 아버지는 나뭇가지를 골라
통풍이 잘되도록 통가리를 만드셨다. 통가리는 방 윗목, 아궁이와 떨어진
서늘한 곳에 놓였다. 쑥대나 싸리 같은 가지를 둥글게 둘러 새끼줄로 엮어 틀을 만들고, 그 안에 고구마를 차곡차곡 쌓아 올렸다. 그렇게 쌓아 두면 준비가 끝났다.
그 뒤로 우리는 고구마를 아궁이에 넣어 구워 먹거나, 무쇠솥에 쪄서 먹었다. 통가리 사이로 손을 넣어 생고구마를 꺼내 먹기도 했다. 겨울은 우리가 끌어 나른 고구마의 온기로 든든하고 따뜻했다.
지금 공동묘지 구역의 밭에는 고속철을 떠받치는 거대한 기둥이 세워져 있고, 그 사이로 잡풀만 무성하게 자라고 있다. 옛 기억을 더듬어 그 근처까지 가보았지만, 밭이 어디쯤이었는지는 끝내 가늠할 수 없었다. 겨울 풍경처럼 놓여 있던 통가리 속 고구마도, 그 밭도, 해 질 무렵 수레를 끌던 우리 모습도 이제는 모두 기억 속으로 스며들어 사라졌다. 남은 것은 손끝에 남아 있던 고구마의 온기뿐이다.
아버지가 지금 가꾸시는 텃밭 두렁에도 고구마 덩굴이 한창 넝출넝출 뻗어 있었다. 그러나 그 고구마는 단내도 시원찮고, 생김도 올통볼통해 상품으로 치면 하급에 가까웠다. 줄기를 뜯어 먹으려 심은 것이었지만, 막상 캐낸 고구마를 버리자니 그럴 수 없었다. 절약이 몸에 밴 아버지는 맛없는 고구마를 상자에 갈무리해 바람 잘 드는 곳간에 들여놓으셨다.
“아버지, 그건 그만두시고 해남 고구마 드세요.”
“농사지은 걸 아깝게 왜 버리냐. 금세 물러질 텐디, 이거부터 얼른 먹어야지.”
해남 꿀고구마를 부쳐 드려도 텃밭 고구마를 다 비우기 전에는 손도 대지 않으셨다. 결국 나는 단내 오른 고구마를 쪄다 드릴 수밖에 없었다.
맛난 것, 새로운 간식은 세상에 넘쳐났지만, 아버지는 왜 그 맛없는 고구마부터 드실까. 그렇게 생각하다가도 이내 마음이 아버지의 말에 머문다. 아버지가 드시는 것은 고구마 한 알이 아니라, 지나온 젊은 날의 시간인지도 모른다. 해남에서 자란 꿀고구마에 그 시절의 결이 깃들 리는 없었다.
어릴 적, 학교를 오가던 길에 보았던 기차역 화물창고에는 고구마 포대가 산처럼 쌓여 있었다. 공동묘지가 있던 그 야산은 기름진 황토에서 자란 고구마로 이름난 곳이었다. 그런 기억을 떠올리다 보면 아버지의 텃밭 흙도 황토로 갈아드려야 하나 하는 생각이 스치기도 한다.
여전히 아버지는 그 두렁을 묵묵히 일구고 계신다. 이미 지나온 세월을 품은 손으로 흙을 고르고, 다시 고구마를 심고 계신다.
두렁에는 해마다 고구마와 함께, 아버지의 시간이 묻혀 있었다.
* 통가리 - 쑥대나 싸리, 뜸 따위를 새끼로 엮어 땅에 둥글게 둘러치고 그 안에 감자 따위의 곡식을 채워 쌓은 더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