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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이테 Aug 28. 2024

실제와 어림 사이 은채!!

기억 속 가장 어린 날이 버려진 그날이었다

이 글은 실화를 바탕으로 한 소설이며 스토리의 대부분은 실화로 구성됩니다.


은채를 소개하는 일은 실제와 짐작과 허구 사이 어디쯤이다. 그녀의 삶 일부분은 확인할 길이 없는 짐작과 어림으로 채워져 있기 때문이다.


그녀의 이름은 김은채. 결혼하고 나서 제대로 된 이름이 처음 생겼다. 그 이전에 은채는 법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첫 번째 결혼지옥에서 방탈출하듯 빠져나와 빗장 지르는 심정으로 개명한 이름이 김은채다.

출생 연도는 대한민국 헌법이 인정하는 신분증에 7*04*8로 기록되어 있지만 어림일 뿐이다.


신체적 조건은 158cm/55 사이즈/235mm. 온라인 쇼핑에서 뭘 선택해도 실패할 확률이 적은 표준 사이즈라고 보면 된다. 그래서 그런지 은채는 의류의 대부분을 온라인 쇼핑한다. 그녀가 클릭한 제품들구매성공으로 이어져 가성비의 달달한 맛을 가져다주었다. 지금도 위시리스트에는 은채의 클릭을 기다리는 이월상품, 기획상품들이 꾸준히 쌓이고 있다. 온라인 구매를 하기까지 친구의 부단한 도움과 쇼핑 노하우가 베이스로 첨가되었다. 이러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소요되었다.  

서양인들이 경이로워하는 사각턱을 가졌다. 치아가 가지런하고 웃을 때 생기는 콧등의 왼쪽 주름이 귀엽다. 무엇보다 눈이 나이보다 한참 어려서 맑고 초롱초롱 반짝인다. 살아온 세월의 흔적이 얼굴을 비껴간 건 그녀의 몇 안 되는 타고난 분복 중 하나다.


군살이라고는 거의 없는 사지육신이 고생의 도가니 속에서 오래 달구어져 궂은날 맑은 날 구분 없이 1년에 330일은 아프다. 각종 파스( 뿌리고 바르고 붙이고)를 두루 섭렵했다. 주변 지인들일본 여행 가서 은채 몫의 동전파스를 빠뜨리지 않는다.


학력은 국민학교가 의무교육인 시대에 학교 문턱도 못 가봤다. 아니, 문턱은 가봤다. 은채보다 다섯 살 많은 주인집 막내아들 뜨끈뜨끈 점심 도시락 배달해 주러 가본 적이 있다. 취학 적령기를 30년 가까이 지나서 검정고시로 초등학교를 졸업했다.


좋아하는 음식은 채소류와 과일류. 채소는 어릴 때부터 주로 먹던 것이라 그렇고 과일류는 어릴 때 주인집  식구들이 먹는 모습에 침만 흘려 못 먹은 한이 있어서 폭식한다. 과일이 듬뿍 올려진 샐러드와 갓 구운 타르트, 자몽차를 우아하게 먹는 브런치카페를 좋아한다. 요즘에야 건강식 한다고 칭찬 들을 일이다. 그러나 코스요리 식사에서 전채요리만 먹고 끝인 것이 꼭 그녀의 결핍된 삶을 닮은 것 같아


"그 입맛 좀 버려 봐. 고기 좀 먹으라고."  


친구가 한 번씩 소리를 내지른다.

육류는 체질 탓인지 환경 탓인지  먹고 나면 복통과 설사가  이어진다. 역시 고기도 먹어 본 놈이 맛을 안다고 몸이 고기를 거부하나 보다. 그렇다고 베지터리언은 아니다. 생선회는 자신 있게 먹을 수 있는데 먹을 기회가 별로 없다. 채식 위주 식단인데도 매 끼니마다 식후에 직접 제조한 청국장  가루를 먹는다. 식사자리 어디든 갖고 다닌다. 휴대전화는 잊어버려도 청국장 가루는 절대 놓치지 않는다. 소화 기관이 부실하다는 얘기다.


허우대만 멀쩡한지 종합병원이 따로 없다. 삐그덕 거리는 몸을 온갖 건강보조제로 버틴다. 식탁 한쪽이 각종 보조제로 화려하다. 젠장. 절친이라면서 비싼 제품을 왜 이렇게 가난한 은채에게 팔아먹는지. 그냥 주면 안 되나? 너희들 자꾸 신제품을 소개하느냐고?  그렇게 좋은 걸 먹었는데 몸은 갈수록 삐꺽 대냐고? 글을 쓰다 보니 화가 난다.


싫어하는 계절은 여름. 더 싫어하는 계절은 겨울이다.  여러 직업을 거쳐 현재 하는 일이 조리실  뜨거운 불 앞에서 조리하는 일이라 여름에 기진맥진한 게 일상이다. 겨울은 어릴 때 북풍 칼바람이 몸에 동상으로 새겨져 스포츠 양말을 항상 두 겹 씩 신어야 한다. 여름에만 한 겹이다.


가장 싫어하는 날은 명절. 가장 좋아하는 날은 명절이 끝나는 날이다. 부연설명 없이도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그 지독한 외로움. 그걸 벗어나려고 곁에 수많은 사람들을 두고 관리하느라 벅차다.


취미라고 하자면 맨 입으로도 얼마든지 가능한 노래 부르기. 목소리도 눈처럼 맑아서 좋다. 취미이며 특기는 운전이지만 주변에서 장거리 심부름 부탁을 부담 없이 한다. 잘 거절하지 못하는 은채는 그게 별로 즐겁지 않다. 장거리 심부름보다는 경치 좋은 곳 드라이브를 더 좋아한다. 그들은 경치 좋은 곳 드라이브 할  은채 생각이 안나는 모양이다.


고소공포증은 있는데 비행기 타고 여행 가는 것을 엄청 좋아한다. 신혼여행도 못 가봤다고 직장단체연수 때 끼워 준 중국여행 1회, 제주도 2회 비행기를 타봤다.

가장 자신 없고 부담스러운 일은 글.자.쓰.기.

특히 서류에 뭔가를 작성해야 할 때는 식은땀 나고 아찔하다.


굳이 이런 내용을 밝히는 이유는 은채라는 캐릭터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함이다. 그러나 은채에 대한 편견을 가질 필요는 없다. 은채누가 보더라도 사랑스러워서 곧바로 친구를 삼고 싶은 여인이니까. 당신도 예외는 아닐 것이다.


은채는 이 지역 출신이 아니다. 태어난 곳이 어딘지 모른다. 자란 곳이 라도 용제군(현재 특별자치도 제시)이다. 이곳은 백제시대로 축조시기를 추정하는 대한민국 저수지의 효시가 된 가장 큰 규모의 수리시설이 있다. 그리고 국내 최대규모의 평야에 속하는 구역이다. 그만큼 논농사와 뗄 수 없는 지역.


지금은 중년이 된 그녀 은채가 이 지역에 정착하게 된 이야기를 먼저 해야겠다.




용제역. 이모인지 엄마인지 고모인지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아이는 그 젊은 여인을 이모라고 불렀다.  절대 놓쳐서는 안 되는 듯 아플 만큼 필사적으로 꽉 쥐어잡은 손. 기차에서 내리는 인파에 놓치면 안 될까 봐 그랬는지 손을 잡아 움켜쥔  여인의 손등에 굵은 힘줄이 툭 튀어나왔다. 뽀얗고 고운 손등에 난 초록색 힘줄이 아이의 거칠게 튼 손과 대조를 이루었다. 아이가 여인의 고운 손을 갖고 싶다 생각하는 순간 단잠을 깨우듯 여인이 잡은 손을 확 잡아끌면서 재촉했다. 


"빨리 따라와. 오늘 안으로 마무리해야 돼." 


뭘 마무리하는지 모른 채 빨리 가자고 서두르는 여인을 따라가느라 아이의 낡은 신발이 여러 번 벗겨질 뻔했다. 흰 바탕에 알록달록 꽃무늬가 반쯤 바랜 고무신이 아이의 발에 헐렁거렸다. 남에게 물려받은 신발인지, 오래 신으라고 일부러 큰 걸 샀던 건지 아이의 발은 신발 앞코 쪽으로 쏠려 있었다.


기차에서 내린 이후 줄곧 걸음이 빠르고 보폭이 큰 여인을 따라가느라 아이는 끌려가다시피 했다. 역사를 빠져나와 광장 앞으로 나오니 봄 햇살이 눈부셨다. 아이는 뛰다시피 걸으면서도 주위를 둘러보았다.


광장입구 쪽에서 큰 대야에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찐빵을 가득 담아 팔고 있는 할머니가 보였다. 할머니는 손을 활짝 펴서 찐빵에 달려드는 파리를 연신 쫓아내고 있었다. 할머니의 찐빵으로 눈길이 갔다. 배가 고프고 오줌도 마려웠다. 침을 꿀꺽 삼켰는데 소리가 꽤나 컸는지 여인이 흘깃 쳐다보았다. 침을 두 어 번 더 삼키는 동안에도 여인은 찐빵에는 눈길도 주지 않고  앞만 보고 걸었다. 배고픔도 오줌도 참을 만큼 참은 데다 서두르는 통에 잠깐이라도 숨을 돌리고 싶어서 눈치를 보며 아이가 말을 건넸다.


"이모, 배고파요. 오줌도 마렵고."

"참아. 지금 배고프다는 말이 나와? 내가 너 때문에 얼마나 고생인데."


아이는 어떤 일로 여인을 고생시키는지 알 수 없었다. 그냥 조용히 따라가기로 했다.

오줌을 참느라 다리가 꼬여서 걷는 게 더 늦어졌다. 그럴수록 여인은 손을 더 꽉 붙잡았다.

 가는 곳이 어딘지 몰라도 여인이 말하는 고생이 끝날 때까지 더는 말하면 안 될것 같았다.

사람들이 제법 왕래하는 역사 앞 삼거리에서 둘은 남쪽길로 방향을 틀었다. 가게 몇 개를 지나니 가방을 메고 도시락주머니를 뱅글뱅글 돌리며 왁자지껄 떠드는 한 무리의 학생들이 보였다. 근처에 국민학교가 있는 듯했다. 학교가 끝난 시간인지 문방구(문구점) 앞으로 우르르 몰려갔다. 막 문방구에서 나온 학생의 손에 들려 있는 뽀빠이 과자가 보였다. 아이는 꼬르륵 소리가 나는 배를 한 번 문질렀다. 시무룩해졌다.


'이모가 지금 가는 집에서 살아야 학교를 보내준다고 했는데. 이쁜 구두도 사주고.그땐 나도 저 언니 오빠들처럼 가방을 메고 학교를 다니겠지.' 


그 생각을 하니  기운이 났다. 학교 다닐 생각을 하니 배고픈 것도 오줌도 참을만했다.


흙먼지가 풀풀 날리는 신작로를 한참 걷다 보니 아이의 고무신 속으로 자꾸 작은 돌멩이가 들어왔다. 신발은 헐렁거리고 돌멩이는 신발 안을 굴러다녀 발을 찔러댔다. 내리막길을 내려가니 신작로에 잇대어진 샛길이 오른편으로 보였다. 소 달구지가 간신히 지나갈 폭의 샛길로 여인이 들어섰다.

길 옆으로는 벼 벤 자리에서 초록싹이 돋아난 논이 끝없이 펼쳐졌다. 꽤나 반듯하게 펼쳐진 그 길가에는 노란 민들레 꽃, 앙증맞은 봄까치꽃이 드문드문 피어 있었다. 한참 더 걸어가니 소나무가 몇 그루 심어진 언덕이 나왔다. 언덕은 막 돋아난 풀들과 마른풀들이 뒤섞여 있었다. 아이는 언덕 풀 위에 누워 하늘을 바라보고 쉬고 싶었다. 그대로 솔솔 잠이 들 것 같았다. 흰나비가 눈앞에 팔랑팔랑 날아다녔다. 저 나비를 따라가면 어디에 도착할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 여인은 언덕 따위에는 눈길도 주지 않고 지나쳐 갔다. 오줌을 너무 참았는지 아랫배가 아프기 시작했다. 언덕 옆으로 난 길을 돌아서자 길 끝은 마을에 닿아 있었다. 아이에게 낯선 이곳이 여인에게는 초행길이 아니었나 보다. 여인이 거침없이 동네 어귀에 들어서더니 얼핏 보아도 그중에서 가장 크고 넓은 집으로 휘적휘적 걸어갔다.


그 집 울타리가 가시 돋은 나무로 촘촘하게 둘러져 있었다. 나무에 잎도 꽃도 하나 없는데 가시만 빽빽한 게 아이는 무서웠다. 가시에 찔릴 것 같아서 바싹 움츠러들었다.

여인은 여전히 손을 잡은 채로 아이에게 몸을 돌려 입술을 옹동 그리고 말했다.


"지금부턴 암말도 말고 가만히 있어!! 절대 울어도 안돼."


그러더니 눈을 부릅뜨고 아이를 바라보며 고개를 한 번 크게 끄떡했다. 여인의 표정에서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음을 아이도 느꼈다. '배고프다고 오줌 마렵다고 말하지 말라는 건가?' 그렇게 생각했다.


여인은 주인을 부르고 나서 능숙하게 대문을 밀고 들어섰다. 집 뒤쪽에서 늙수그레한 여자가 머리에 둘러쓴 수건을 풀어내며 분주하게 나왔다. 무슨 일로 왔는지 알고 있다는 듯 아무런 말도 없이 아이를 힐끗 쳐다봤다. 그 눈빛에 하마터면 아이는 참고 있던 오줌을 쌀 뻔했다. 여인이 그제야 잡았던 손을 슬그머니 놓았다. 땀이 축축이 배었다. 초록색 힘줄이 툭 불거져 나온 그 손등이 서서히 매끄러워져 갔다. 늙수그레 여자가  몸빼바지 안주머니에서 누릿한 무언가를 꺼냈다. 누렇고 길쭉한 봉투였는데 두께가 두툼했다. 아이를 흘깃 보더니 몇 마디 말과 함께 여인에게  건넸다. 누릿한 종이봉투를 받자마자 여인은 인사도 없이 쌩하니 뒤돌아섰다.

아이는 여인을 따라가야 할지 어째야 할지 몰라 엉거주춤 서 있었다.

그러자 늙수그레 여자가 우물가로 가서 물 한 바가지를 떠서 아이에게 주며 말했다.


 "이런 경을칠... 마셔. 정신 바싹 차리고 이제부터 여그서 살어야 혀."


늙수그레 여자 말대로 아이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여자의 그 말이 마당을 둥둥 떠다니다가 울타리로 가서 자리를 잡았다. 아이가 깜짝 놀라 눈을 비비고 나서 더 크게 뜨고 그곳을 바라보니 분명 가시가 되어 거기 콕 박혀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가시가 아이향하더니 몸을 찌르고 들어갔다. 하필 오줌보를 쿡 찔렀는지 참았던 오줌이 터져 나왔다. 터진 오줌은 다리를 타고 꽃무늬가 벗겨져 희미한 고무신 속으로 줄줄줄 고여 들었다. 참았던 울음을 터뜨렸다. 뜨끈한 오줌물이 아이의 발을 적시고 고무신에 차올랐다. 그때 마루에 걸려있던 괘종시계에서 댕댕댕 소리가 들렸다. 햇살이 눈부시게 하얀 4월의 그 집 앞마당에 오후 세 시를 가리키는 시계 소리가 울려 퍼졌다.




[에필로그]

인간에게 가장 오래 남는 감각이 후각을 통한 기억이라는데 은채는 당시의 냄새 기억은 전혀 없고 손을 잡은 그 촉각만이 선명하다. 얼굴은 기억 못 하는데 그 손잡은 장면이 생생할까.


이모라고 불렀지만 젊은 여인이 피붙이는 아닐 것이라 생각했다. 기차에서 내려 끝내 찾아간 그 집 앞마당에 어린것을 세워놓기까지 손을 한 번도 놓지 않았다. 그것은 달리 말하면 따라오는 아이 상태가 어떤지 손을 놓고 마주하여 살피지 않았다는 얘기다. 하얗게 봄볕이 쏟아지는 그 집 마당에 아이를 두고 황급히 뒤돌아서서 가버린 것도 그렇다.

만약 피붙이가 그랬다면 생사도 모르는 젊은 여인을 저주할 만큼 미워했을 거다. 여인은 아이소개해주고 주인 여자에게 모종의 대가를 받기로 한 중매자였을 것이다. 거래할 물건을 도중에 잃어버리면 안 되니까 손을 필사적으로 잡았겠지. 절대!! 젊은 여인이 가족일리가 없다고 강하게 부정했다. 설령, 추측이 진실이 아니더라도 은채는 그렇게 믿고 싶다. 눈물 한 방울 없이 가족에게 버림받았다는 것은 너무 치명적이니까.




 개인차가 있겠지만 보통 가장 어린 나이의 기억이 일반적으로 만 3~4세 정도, 윤정부 이전의 한국나이로 어림잡아 5~ 6살쯤이라고 한다. 은채가 그 시골 마을로 들어왔던 해 1976년도를 6살로 어림 잡은 것이 나이가 되었다. 젊은 여인은 은채 나이도 이름도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았다.


그날부터 살게 된 집은 동네에서 가장 집터가 크고 농사와 식구가 많은 집이었다. 큰 강을 끼고 있는 용제의 들판은 호남평야에 속한다. 동네 앞, 뒤 양 옆으로 끝없이 펼쳐진 논. 그런 농사 많은 부유한 집에 수양딸이 되어 호사를 누리고 살았으면 좋으련만. 은채는 버려진 것이 운명이었던 것처럼 정 반대의 삶을 살게 되었다. 그 집 앞마당이 고통의 홈그라운드가 되었다. 아니, 이미 기억의 저편 이전부터 은채가 배아였을 때부터 고통의 숙명이 시작되었을지 모른다. 다만 기억을 못 할 뿐이다.


추억이란 과거의 인상 깊은 기억, 특히 행복한 순간들을 의미한다. 인간을 감상에 빠지게도 하지만 어떤 경우에는 평생을 살아갈 힘이 되기도 한다. 추억은커녕, 은채의 유년기부터 시작된 흑역사는 트라우마가 되어 지긋지긋한 고통의 기억으로만 남았을 뿐이다. 은채가 푸념처럼 털어놓는 흑역사. 그걸 뱉으면서 그녀는 때론 담담하게 때로는 말을 하지 못할 정도로 많은 눈물을 쏟았다. 그런 은채에게 나는 그저 어깨에 손을 얹고


"그래도 죽지 않고 살아줘서 고마워."


이 말 밖에는 할 수 없었다.

거친 시골을 누비며 은채와 동시대를 살았던  내가 듣기에도 묵은 책 속에서나 있을 법한 일들을 겪은 은채. 죽을 것 같은 삶을 이겨내고 지금에 이른 그녀의 이야기를 나는 보상하는 마음으로 풀어내려고 한다. 이 이야기에 엮인 사람들이 꼭 그녀에게 용서를 구할 날이 더 늦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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