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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이테 Sep 04. 2024

해빙기에 봄동을 먹는 여인

친구아들 결혼식 & 내 아들 교도소

이 글은 실화를 바탕으로 한 소설이며 스토리의 대부분은 실화로 구성됩니다.

<중년의 은채이야기>입니다.




봄동배추가 제법 두툼하다. 은채는 뿌리와 겉잎을 칼로 잘라내고 잎을 낱낱이 떼어 씻었다. 아직 물기가 가시지 않은 잎 한 장을 탈탈 털어 입에 넣었다. 달달하고 고소하다. 이 즈음에만 먹을 수 있는 봄동은 은채가 가장 좋아하는 쌈채소다.


용제(한라도 용제군) 살이때 동네에서 논밭이 가장 많은 집 부엌데기가 배를 곯았다. 주인 할머니는 사소한 실수에도 밥그릇을 빼앗았다. 게다가 울타리 밖으로 이런 사실이 새어 나갈까 봐 동네에서 어떤 음식도 얻어먹지 못하도록 단속했다. 주린 배를 채우려 해빙기의 빈 밭을 돌아다니며 뜯었던 채소가 봄동이었다. 그렇게 은채는 버텼다.


해빙기가 지나면 꽁꽁 얼었던 은채의 어린 가슴에도 봄이 올 것 같았다. 2월로 접어들었으니 섣부른 봄타령이 터무니없지는 않았다. 그러나 어린 가슴에 품었던 봄은 소녀가 될 때까지도 멀고 먼 아지랑이였다. 봄이 와도 은채의 봄은 오지 않았다. 은채잡힐 듯 잡히지 않는 봄을 해마다 기다리며 해빙기 빈 밭을 찾아 헤맸다. 


매서운 북풍한설에도 죽지 않고 버젓이 살아남은 봄동. 칼바람 속에서 버티고 견딘 것들만이 내뿜는 고유의 색이 은채 자신과 닮았다고 여겼다. 꽁꽁 언 땅에 버려지고 차이고 뒹구는 것들끼리만 느낄 수 있는 인력(引力).


은채에게 봄동을 먹는 일은 의식과도 같았다. 빈 밭을 헤매던 어린 은채를 만나서 위로하는 의식. 자리에서 한 포기를 다 먹고 나면 해빙기 질펀한 삶에서 빠져나온 것 같았다.  봄 한 소쿠리를 먹은 듯 뺨이 매화빛처럼 뽀얘졌다.




은채는 테두리 옻칠이 벗겨진 상에 막 무쳐낸 섬초나물과 쌈장, 봄동잎을 한 소쿠리 담아서 TV 앞으로 들고 갔다. 전 날 저녁 먹고 남은 냉잇국도 보글보글 데워서 두 국자 덜어 놓고 먹기 좋게 간이 밴 고추장아찌도 꺼냈다. 비번인 토요일 아침 느긋하게 채널을 이리저리 돌려가며 밥을 먹는 여유를 즐겼다. 그러기에는 식탁보다 오래된 밥상이 제격이었다.


TV화면에서는 지중해의 에메랄드 빛 바다가 펼쳐지고 있었다. 뜨거운 태양아래 물에 들어가면 몸까지 파란 물이 들 것 같은 에메랄드 바다가 은채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은채가 막 배추쌈을 하나 싸서 입에 넣었는데 전화가 다. 화면에서 눈을 떼지 않고 손으로 더듬거려 핸드폰을 집어드니 현정이었다.

현정과 마지막 통화 한 지가 언제였던가. 은채는 기억회로를 돌려봤지만 정확한 날짜가 떠오르지 않을 만큼 격조했다.


"아이고, 이게 얼마만이야. 오랜만이네. 잘 지냈어?"

"응, 난 만날 애기 보느라 정신없었지. 잘 지내지? 새로 직장 옮겼다며?"


은채는 최근에 하던 일을 그만두고 사립중고등학교 급식실 조리부로 이직했다. 회전근개파열로 늘 통증을 달고 사는 어깨와 손목 때문에  급식실은 피하려 했지만 불가피했다. 낮에 학원차 운전, 밤에 신문과 우유 배달했던 이전 일을 오래 할 수 없었다. 자는 아들 혼자 두고 새벽 1시에 나오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지만 어둠을 등에 업고 다니는 게 너무 무서워서 날마다 신문에  눈물얼룩을 만들었다. 


현정의 목소리가 한껏 들떠있었다. 무슨 좋은 소식이라도 있는 건가? 은채는 한 입 넣은 배추쌈을 대충 우물거려 삼켰다.


"응, 뭐.. 그러게.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할 수 있는 게 그것밖에 없지 뭐."

"잘됐네. 밤에 일하는 것보단 낫잖아."

"그건 그렇긴 한데. 혼자 주걱질 하려니 어깨랑 손목이 남아나질 않아. 일하고 치료받고 일하고 치료받고 날마다 그러고 있어."

"아이고, 우리 은채 고생이다. 그 고생 언제 끝날지..."

"내 인생에 고생 끝나는 날이면 그건 죽는 날이다. 하하! 그나저나 오늘 어찌 시간이 났어?"


은채보다 한 살 많은 현정은 아직 나이 50세도 안 됐는데 손주가 생겼다. 현정의 결혼도 빨랐지만 현정 아들이 병역 의무를 마치자마자 바로 살림을 꾸려 아기를 낳았다. 맞벌이 아들 내외가 아기 때문에 발 동동거리는 것을 두고 볼 수 없어 일을 그만두고 손주  돌봄을 하고 있었다.

 이런 이유로 시간 내기 어려운 현정과 은채는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다.  마침 오늘은 현정 아들 내외가 휴가로 여행을 떠났다. 모처럼 시간이 여유로운 현정은 목소리가 한껏 들떴다.


통화를 마친 은채는 한숨이 길게 나왔다. 통화하는 동안 지중해 바다도  먹던 흐름도 끊겼다. 잠깐의 통화에 식욕이 없어졌다. 알콩달콩 사는 아들 내외와 한창 재롱부리는 손주를 둔 현정이 부러웠다.




현정은 올오버 벚꽃자수 숏원피스 차림으로 나왔다. 핸드메이드 얇은 아이보리색 코트를 어깨에 살포시 둘렀다. 뱅헤어에 그녀의 패션심벌인 굵은 머리띠도 빠뜨리지 않았다. 계절을 앞 선 옷차림에 나이보다 스무 살 아래쯤의 젊은 스타일이다. 현정의 패션 스타일은 흡사 딸 옷을 입고 나왔나 할 정도로 늘 과감했다. 추위라면 끔찍이 싫은 은채와는 정 반대 차림새였다.

큰길 건너로 먼 들녘 끝 송라산이 아련하게 보이는 창가에 자리를 잡았다. 테이블 밑으로 스포츠양말 신은 트렉킹화와 앞코가 칼날같이 예리한 하이힐이 대조되어 보였다. 신발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은채가 먼 산으로 시선을 돌렸다.


현정은 이른 점심먹었다고 카페라테 한 잔을 주문했다. 통화 끝에 아침 식사를 먹지 못했던 은채는 루꼴라토마토샐러드 접시와 에그타르트를 자몽차와 함께 주문했다.


"애기 보는 공은 없다더니 틀린 말 아니야. 차라리 나가서 돈을 벌고 말지. 손자가 아프기라도 해 봐. 죄인도 그런 죄인이 없다니까. 어깨, 허리, 무릎 아픈 건 옵션이고."


현정은 왼손으로 오른쪽 어깨를 주무르며 푸념을 하면서도 표정은 싱글벙글이었다. 한 손으로는 휴대전화 갤러리앱을  열어 막 걸음마를 시작한 손주의 동영상을 은채 앞으로 내밀었다.


"이거 봐, 얼마나 귀여운지 몰라. 어쩜 지 아빠를 꼭 닮았는지. 우리 준우가 애기 때 이랬잖아. 씨도둑은 못한다더니 그 말 딱 맞아."

"어머, 그러게. 정말 준우 얼굴이 있네. 애엄마는 내가 안 봐서 모르겠고 확실히 코랑 눈매가 아빠야."


은채는 현정의 손주자랑에 장단을 맞춰주긴 했지만 그다지 관심이 없어 이내 웃음이 사라졌다.

'할머니한테 자기 손주 이쁜 게 당연한 거지. 남인데 뭐 얼마나 손주 이쁘다고 저 난리야.'

괜한 심술이 났다.

 차오톡 프로필 사진 손주 자랑도 모자라 단체 차톡방에 뜬금없이 손주 걸음마 사진 올리는 멤버들 민폐라 여겼다. 다른 일엔 대체로 너그러운 은채가 유독 자식 얘기에는 예민해다.


주문한 음료가 먼저 나왔다. 카페라테를 한 모금 마신 현정이 동영상을 반복재생해서 보여 주었다.

은채의 시선이 동영상에서 자꾸 자몽차로 향했다. 그럼에도 현정은 아랑곳하지 않고 또 다른 동영상 플레이 버튼을 누르고 있었다. 은채는 마지못해 동영상을 보다가 식어가는 자몽차를 한 모금 마시며 말했다.


"겁나 귀엽네 귀여워. 따끈할 때 차 마시고 천천히 보자."

"응. 그래 그래. 아이참, 중요한 얘길 깜빡했네. 우리 손자 사진 보느라 꼭 이런다니까. "

현정이 반색을 하며 아들 결혼 소식을 알렸다.

"3월 마지막 주에 우리 준우 결혼식 있어. 둘째 낳기 전에 해야지. 딸도 낳고 싶다고 둘째 가졌잖아. 토요일 1시야. 자기 올 수 있어?"


은채는 호들갑스럽게 축하의 말을 전했다. 그 순간 불현듯 소식도 알지 못하는 그 아이가 떠올랐다.

현정의 눈을 피해 찻잔에 가라앉은 자몽조각을 바라보았다. 눈을 꼭 감았다. 자몽조각 사이로 그 아이 얼굴이 둥둥 떠올랐다.  차가운 물이 뒷 목덜미를 타고 등으로 또르르 흘러내리는 듯했다. 몸이 부르르 떨려 얼른 눈을 떴다. 손가락을 찻잔에 댔다 뗐다 하면서 시선을 들판 건너 송라산으로 옮겼다. 산으로 이어지는 해빙기의 황량한 들판에 군데군데 푸른 면적들이 보였다. 너무 멀어서 뚜렷하지는 않았지만 분명 봄동배추였다. 그 밭에서 누군가가 그것들을 채취하는 움직임이 보였다.

'아, 봄동배추를 거둬들이는구나.'  거둬지는 그것들이 어린 날의 은채 자신 같았다. 버리지 않고 거둬들이는 그 손길이 고마워졌다. 이런 생각이 들자 찻잔을 쥔 손가락이 차분해졌다.

물기 있는 눈을 현정에게 들키고 싶지 않아 은채는 얼른 휴대전화를 꺼내 캘린더를 열어 보았다. 새 학기 근무표가 어떻게 결정될지 알 수 없었지만 일단 일정표에 날짜를 저장해 두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결혼식에 가야겠다고 결심했다. 거기서 꼭 만날 사람이 있었다. 가슴이 방망이질하듯 쿵쾅쿵쾅 거렸다. 은채 자신도 낯선, 생기 있는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축하하러 가야지. 준우 결혼인데. 꼭 갈게."



- 8년 전 -


현정은 은채가 일하는 직장의 동료였고 함께 다니는 교회의 교인이었다. 현정이 본가로 합가 하면서 집 근처로 이직을 하느라 퇴사했다. 성격이 호탕하고 붙임성이 좋은 현정과 은채의 나이가 비슷해서 이직 후에도 둘은 여전히 친구처럼 지내오고 있었다.


특성화고에 입학한 현정의 아들 준우가 가끔 교회에 친구들을 우르르 몰고 왔다. 은채직장과 교회건물이 맞닿아 있어서 주차장을 함께 사용했는데 주차장 옆에 넓은 잔디밭이 있었다. 준우 일당은 잔디밭에서 농구를 하거나 예배당 안에 들어가 악기 연습을 하며 토요일 오후 내내 교회에서 시간을 보냈다.

은채가 토요일 오전 당직 근무를 마치고 퇴근하러 주차장에 나오면 준우 일당과 마주치곤 했다. 그러면 퇴근하다가 말고 근처 마트에 들러 간식재료를 사다가 교회 식당에서 떡볶이도 만들어주고 라면과 주먹밥도 준비해 주었다. 한창 크는 나이에 먹성이 얼마나 좋은지 시원스레 먹는 모습만 봐도 흐뭇했다.


모습 끝으로 은채 마음에는 항상 떠오르는 아이가 있었다. 준우와 동갑 나기인 첫아들 상민. 은채는 아들 상민에게 줄 수 없었던 사랑을 주듯 준우의 간식을 챙겼다.


세상은 넓고도 좁다는 말이 딱 맞았다.

그날도 현정의 아들 준우가 친구들을 데리고 교회 잔디밭에서 농구를 하고 있었다. 녀석들이 잔디밭과 주차장을 오가며 농구공을 튕기는 소리가 텅~텅~ 경쾌하게 들렸다. 농구를 하며 내지르는 소리가 주차장 가득 울려 은채가 근무하는 곳까지 선명하게 들렸다. 그들의 패기 넘치는 목소리에 은채는 업무 마감도 잊은 채 창가로 다가갔다. 2층에서 잠깐 내다보니 준우가 은채를 보고 인사를 했다.


"은채이모, 안녕하세요?"

"준우 안녕? 오늘도 친구들 데려왔구나. 이모가 간식 만들어줄까? "

"네 이모. 저야 좋죠. 중학교 친구들이에요. 감사해요 이모. 우리 이모는 천사표."

 

준우가 넉살 좋게 은채를 향해 머리 위로 팔하트를 만들어 보였다. 그러더니 친구들에게 손짓을 했다.

"얘들아, 우리 이모야, 인사해라. 이모가 간식 만들어 주신대."


준우 친구들이 일제히 은채를 향해 인사했다. 하나같이 밝고 싱그러운 웃음이 콸콸 쏟아지는 목소리였다. 인사하는 학생들 사이에서 어디선가 본 듯한 얼굴이 있었다. 웃을 때 보조개가 들어가고 각진 얼굴. 순간 은채의 심장이 쿵쾅쿵쾅 최대 심박수로 날뛰었다.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을 뻔한 걸 간신히 창틀을 붙잡았다. 얼른 벽 쪽으로 몸을 숨겼다.


분명 그 아이는 상민. 은채가 낳은 첫아들이었다. 준우와 상민이 친구라니 그럴 리가. 은채는 정신을 차리려 고개를 힘껏 가로젓고 간신히 일어섰다. 창틀을 잡았지만 왼쪽 검지에 낀 반지가 창틀에 부딪혀 달달달달 낮은 소리를 내었다.

'무슨 낯으로 그 아이 앞에 나타나? 그럴 수 없지.' 은채는 친구들과 함께 있는 상민 앞에 마주 설 자신이 없었다. 머릿속이 물안개 일듯 하얘졌다.


그토록 보고 싶었던 아들. 마음에 묻어뒀지만 예고도 없이 기습적으로 떠올라 기억의 실타래를 마구 헝클어놓는 존재 상민. 또래 학생들을 볼 때면 뾰족한 바늘로 변환되어 죄인인 은채 가슴을 찔러댔던 첫아들.

상민 앞에 당당히 나설 수 없는 이유가 된 억울함을 벗을 날이 올 수 있을까. 은채는 순식간에 상민을 두고 떠나 온 그날로 달음박질쳤다. 생각이 거기에 다다르자 고통스러운 듯 은채는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머리에 썼던 조리사모자가 바닥에 떨어졌다.


"지금은 아니야. 아직은 그럴 수 없어. 여전히  무서워."


급기야 은채는 바닥에 주저앉아 하염없이 흐느꼈다. 눈물이 신고 있던 흰 장화에 떨어지더니 조리실 바닥 타일 경계의 골을 타고 흘렀다. 도저히 아들 앞에 나설 수 없었다. 정신을 차리고 현정에게 전화를 해서 도움을 요청했다. 현정이 달려와서 준우 일당을 근처 분식집으로 데려갔다. 강산이 바뀌는 시간 동안을 은채가 마음에 품고 있던 아들 상민이도 그들 무리에 섞여 사라졌다. 방금 눈앞에 있던 아들이 신기루처럼 가버렸다.


그날 저녁 은채는 현정과 긴 통화를 했다.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않았던 결혼지옥의 파편이 담긴 고통의 상자가 봉인해제 되었다. 은채는 실오라기 한 가닥도 걸치지 않은 알 몸을 보여주는 것 같아서 너무도 고통스러웠다. 그러나 현정의 도움이 필요했다. 아들 소식에 목마른 어미가 부끄러울 것이 무엇이겠는가.

그렇게 상민의 소식은 준우를 통해 현정을 거치고 은채에게 전해졌다. 상민 소식을 준우에게 대놓고 물어볼 수 없었던 것은 상민을 위한 엄마의 어쭙잖은 배려였다. 어린 아들을 떠난 엄마가 이제 와서 아들을 배려한다는 게 어불성설이긴 했다. 하지만 상민은 지금 한창 예민한 나이 열일곱이다. 본인 동의 없이 친구에게 가족사가 까발려지는 것은 어느 누구라도 끔찍이 싫어할 일이라는 것쯤 은채도 알고 있었다.





은채가 준우 결혼식에 꼭 오겠다는 말 뒤끝에 현정이 반색을 하면서도 뭔가 망설이는 표정을 보였다.

그 표정을 놓치지 않고 은채가 되물었다.


"표정이 왜 그래? 뭐 또 할 말 있어? 결혼식에 상민이도 오려나.. 중학교 때 친구니까   준우가 연락하겠지?"

 

은채는 특유의 반짝이는 눈을 더 크게 뜨고 현정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현정이 몹시 난처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저, 그게... 사실,... 이 얘기를 해야 되긴 하는데 내가 입이 안 떨어지네."


화통한 현정의 성격상 저런 표정이라면 분명 중대사가 생겼다는 것이다. 아들 결혼식 앞두고 어떤 일이 생겼기에 저런단 말인가. 은채는 재촉하듯 물었다.


"무슨 일이기에 이렇게 뜸을 들여. 현정이 답지 않네? 말해봐 무슨 일이야."

"응, 그게... 준우가 그동안 상민이랑 연락이 잘 안 되었었나 봐. 군대에 2년 다녀오고 바로 취직해서 직장 다니느라 바빴지. 게다가 또 바로 살림도 나고."


"알지. 준우가 바빴을 거라는 거. 그러다 얼마 안 있어 아기 낳고 아빠 노릇도 해야 하고 바빴겠지. 근데 그게 왜? 중학교 친구들도 오라고 연락하겠지? "

"중학교 친구들 연락하겠지. 근데... 상민이는 결혼식에 못 올 거야. 지금... 주교도소에 있대. 준우도 엊그제 다른 친구에게 소식을 들었나 봐. 상민이가 연락이 안 돼서 여기저기 물어보다가. "


은채는 온몸에서 피가 빠져나가는 듯 손 발이 저리고 경직되면서 심장이 조여오듯 숨쉬기가 어려웠다. 맥이 사정없이 날뛰었다. 한 동안 안정적이던  부정맥증세가 시작된 걸까.


교도소라니 아무리 갈 곳이 없어도 거긴 안될 말이었다.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8년 전 교회 잔디밭에서 봤던 해맑게 웃던 상민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기에 교도소에 있는 것인가.


주문한 루꼴라토마토샐러드와 에그타르트가 나왔다. 토핑으로 얹어진 토마토의 붉은빛이 유난히 선명해 보였다. 오븐에서 갓 구워져 나온 에그타르트의 따끈따끈한 온기와 부드러운 버터향기가 어우러져 브런치로 손색없었다. 그러나 은채는 포크만 들었다 놨다 할 뿐 먹을 수 없었다.

한 동안 아무 말이 없던 은채가 간신히 입을 떼어 물었다.


"상민이... 무슨 일로 그런 거래?"

"나도 자세히는 모르는데 아마도 보이스피싱에 연루되어서 그렇다나 봐. 8개월 전엔가 필리핀 간다고 친구들 사이에서 한참 떠들고 다녔었대."


상민이와 필리핀, 보이스피싱과 교도소.


이런 말들이 딴 세상 언어처럼 다가왔다.

 이럴 때 생각나는 한 사람. 이번에도 은채는 그녀에게 도움을 요청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라고 뾰족한 수가 있으랴만 그래도 이 큰 사건 앞에 도저히 갈피를 못 잡고 엄두가 나지 않았다. 은채 머릿속에서 자음과 모음 글자들이 마구 헝클어져 둥둥 떠다니기 시작했다. 한 동안 잠잠하던 글자 울렁증이 시작되고 있었다.


서연이 쇼핑카트를 밀며 과일코너로 향하는데 부클점퍼 주머니에 넣어두었던 휴대전화가 부르르 렸다. 얼른 주머니에서 전화기를 꺼내보니 '조리실 은채여사님' 글자가 떴다.


"여보세요? 여사님어쩐 일이에요?"


서연의 목소리가 들리자, 은채의 움츠렸던 어깨가 서서히 내려갔다.

발효된 과일즙을 먹었을 때처럼 머리가 핑 돌고 말이 느려졌다.


"선생님, 부탁할게 생겼어요. 급한 건데... 말하기 좀 곤란한 부탁이에요."



[에필로그]

용제살이가 묻어 둔 이야기가 되었으면 이제 봄동배추 쳐다보기도 싫으련만 봄동배추만 보면 은채는 황량하고 쓸쓸한 해빙기의 빈 밭을 떠올렸다. 배곯던 쓰린 기억을 먹어 없애고 싶은 듯 집착이 있었다.

은채의 용제살이는 눈물로 꼬아 만든 누사(淚絲)가 되어 고통의 옷 몇 벌을 만들기에 충분했다. 몸에는 당시에 입은 학대의 흔적들이 여전히 남아있다.

몸이 이럴진대 마음은 어떻겠나. 봄동 배추 지긋지긋하지도 않냐 물어도 은채는 헛헛하게 웃을 뿐이다.

얼마나 배가 고팠으면 김장 때 쓸모없어 버려둔 못난이 배추를 겨우내 칼바람 속에서 찾아다녔을까. 배추뿐이겠나. 무, 당근, 고구마를 재배했던 밭마다 몰래 쏘다녔단다. 빨갛게 부풀어 오른 곱은 손을 호호 불어가며 소복이 쌓인 눈을 털어내면 나오는 그것들.  배고픔을 달래 준 은채의 눈물 젖은 빵이다.

봄동배추 따위는 집어치우라고 하우스 안에서 재배한 쌈채소를 들이밀어도 소용없다.

체념했다. 어느새 나도 해빙기에 은채를 데리고 시골 배추밭을 샅샅이 뒤지고 다닌다. 은채가 먹을 만한 봄동이 있나 찾아본다. 쓸만한 게 나오면 산삼보다 더 반갑다.

"심봤다."

이러는 게 맞는지 아닌지, 그녀의 아픔 속으로 더 빠져들게 하는지 나오게 하는지 알 수 없다.

은채는 용제살이에서 떠난 지 35년이 넘었지만 아직도 그곳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용제에 붙박이로 된 원심력이 그녀를 놓아주지 않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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